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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휘 수업의 텀페이퍼의 주제를 잠정적으로 정했는데, '박현채'이다. 일전 왕휘 선생과 사석에서 1980년대 한국 사회운동을 이야기하면서 권유를 받았던 것을 실천에 옮겨 보려는 것인데, 현재 조건이 전면적으로 작업을 진행하기 어려운 상황인지라 현재 접근 가능한 자료들 중에서 주제를 좁혀 한 두 가지 논점을 잡아 연구노트 식의 글을 써보고자 한다. 박현채 전집이 출간된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상해에 이 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나중에 작업을 확장하면서 불가결한 자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다.
사실 근래에 내 주변에는 백낙청 선생과 민족문학론이 진광흥 선생이 주도하는 일군의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자주 회자되는데, 나는 이에 대해 다른 시좌를 제공해주고자 하는 조금 작지 않은 목적도 가지고 있다. 일전에 "대만사회연구계간"이 특집으로 관련 논의로 도배한 적이 있고, Inter-Asia Cultural Studies 지난 겨울 호 역시 동일하게 도배를 한 바 있다. 나의 작업은 백낙청 선생의 논의에 대한 직접적 비판 보다는 오히려 그와 긴장을 형성할 수 있는 박현채 선생의 논의를 불러내 그 갈등적 상황을 재현해 보려는 목적도 포함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민족문학론과 민족경제론의 대비와 갈등이 어떤 의미에서 아주 고전적이면서도 일반적인 의미를 가져, 현재 우리의 논의, 정치(정치적인 것)와 역사에 대한 논의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까지도 중요한 참조점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다. 여기에서 정치적인 것(또는 문학예술적인 것)을 사회과학에서 어떻게 전유할 것인지의 문제도 논의될 수 있고, 궁극적으로 정치와 역사, 변증법과 유물론 등의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논의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기대한다. 내가 과문하고 이해가 천박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는 우리의 80년대의 이론과 운동 안에 이미 그 후에 남한에서 유행되었던 아주 많은 서구/유럽/프랑스 사조들의 문제의식이 충분히 담겨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더욱 살아 있는 언어로 생생한 역사 상황을 분석하고 묘사하고, 또 그 안에 참여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옥석을 가리는 작업이 주변화되고, 90년대의 대전환이 벌어진 것은 참 아쉽다. 정말 무능했던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제 인터넷에서 접근 가능한 박현채 선생 관련 자료 인쇄를 마쳤다. 인쇄비가 싼 중국에서 150원RMB(약 3만원)이 나왔다. 우선은 번역에 집중하고, 종종 한 두편씩 속독을 하고 주말 시간을이용해 다시 꺼내어 전체적으로 통독을 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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藝術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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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작업을 하기로 결정한 데는, 개인적으로는 조금 중요한, 하지만 아직 불안한 결심이 있는데, 바로 '중국 연구'에 대한 판단과 관련된다. 나는 본래 '중국 연구'와 '한국 연구'가 상호계기가 되어 일정한 효과를 내는 과정을 따라가려고 했다. 이는 방법으로서의 '중국'이자 '한국'이라 할 수 있는 것이고, 형식적으로 상호주체성을 따르지만, 내용적으로 그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개입해야 하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의 이론적 사유의 공간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이미 그런 방식으로 이론적 사유를 진행하기에는 내 주변의 상황은 훨씬 덜 국민적인 것이다. 상해에 와서 살아보니, 막연히 더 그런 생각이 든다. 이러다가 한국으로 못 돌아가지 않나 싶기도 하고...ㅋ藝術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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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론의 발전적 계승 작업은 사회운동과의 관계를 빼 놓을 수 없다. 내가 보기에, 우리는 우리의 사회운동을 객관화하고, 그 가능성과 한계를 명확히 판단하여, 이론과 운동의 새로운 발전 가능성을 탐구하는데 매우 무기력했던 것 같다. 특히, 늘 참조점을 유럽, 남미 또는 사회주의권으로 삼으면서 한국의 사회운동은 늘 뒤쳐진 것으로 여겨지고, 이는 이론적으로 늘 수입국의 처지에 머물도록 강제한 측면도 있다. 사실 중요한 것은 뒤쳐지고 앞선 것이 아니다. 고유한 개별적 경험을 일반화하려는 노력과 능력일 뿐이다. 민중의 수많은 의식적 희생과 실천이 투여된 사회운동의 역사 자체는 이미 이론적 보물이다. 21세기에 들어서서도, 사실 조금만 시야를 돌려 아시아에 주목하면, 사실상 21세기 새로운 혁명, 또는 혁명까지는 아니라도 좌파정부가 들어설 수 있는 곳은 거의 한국의 유일하다. 문제는 이러한 가능성은 90년대 이후의 이론적 전환과는 그다지 무관해 보인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 이론적 전환으로 인해 이 가능성은 점차 쇠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는 것이다. 어쩌면 90년대 이후 현재까지 한국의 사회운동은 80년대에 축적한 양분을 소진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