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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3

 

참 오랜만에 조금은 어색하고 또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마음 껏 쉬고 있다. 아마 오늘까지일 것 같은데, 내일부터 돌아가기 이전 몇일은 왕휘 선생의 책을 정리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중국/사상사를 접근하는 다양한 시각과 방법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이 문제에 대한 접근은 한편으로는 헤겔의 개념적 사유와 존재와의 동일성, 즉 이성에 의한 개념과 실재의 동일성을 통한 주체성의 설명의 방식을 지지하면서 출발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이와 대립되는 슈티르너에서 니체, 하이데거, 데리다에 이르는 개념 외부의 실존을 중심으로 개념적 사유를 거부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을 그 내용으로 갖는다. 다케우치 요시미가 '문학가로서의 루쉰'을 이야기 할 때의 입장은 '사상'이라는 표피 너머의 실존을 핵심적인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역시 같은 맥락에 위치하며 비판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는 개인의 독자성을 '사상'에 환원할 수 없다는 나름 정당한 논리가 등장하고, 정치(실천)에 대한 문학의 관계를 부분적으로 드러내지만, 그 독자성의 출현의 조건을 개인의 실존에 환원하는 방식으로 설명함으로 인해 역시 일정한 실존철학적 편향을 드러낸다. 나는 실천의 차원은 늘 개념과 그 외부와의 관계를 포함하지만 여전히 개념을 전제로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관점을 갖고 있다. 루쉰의 경우에도 문학에서 정치로의 전환은 '회심'이라는 개인적/실존적 결단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그 결단의 조건을 이루는 사회적 관계/구조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설명하는 것이 내가 취하고자 하는 방식이다.

 

한편, 정치적으로 중국에 대한 국가주의적 반반공주의적 경향을 갖는 것으로 보이는 미조구치와 다케우치의 차이는 좀 더 많은 독서를 요하는데, 가설적으로 다케우치의 해체주의적 특징에서 미조구치의 본질주의적 특징으로의 전환이 갖는 일반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해체주의는 해체가 멈추는 순간 곧 본질주의화 되어버리기 일수인데, 이는 해체가 존재론적인 층위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라고 생각되고, 물론 해체의 목적은 아니겠지만, 그 효과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다시 비존재론으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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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6

2011.1.15-30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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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와 강연

대화는 둘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이 어느정도 평등한 관계에 있음을 전제하는 것 같고, 강연은 일정한 청중을 대상으로 강연자라는 지식인이 본인의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는 차이를 갖는 관계를 전제하는 것 같다. 둘 사이가 명확히 구분되지는 않겠지만, 어떤 경우 대화를 하면서 강연을 듣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강연을 들으면서 대화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최근에 경험한 어떤 경우는 대화 중에 상대방이 강연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보통 '가르치려' 든다는 그런 느낌이 드는 그런 것이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고 청자가 관심이 없거나, 아직 동의할 수 없는 전제를 깔아놓고 자신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그러한 화법은 대체적으로 이미 지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게서 흔히 보이는데, 이런 화법은 지적 위계를 전제하고 재생산하는 화법인 것 같다. 제도권 내의 많은 수업에서 교사와 학생 사이에 나타나는 단절도 비슷한 맥락의 결과일 것이다. 강요된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과 지적 권위에 의거한 일방적 논의전개로 수업을 진행하는 교사 사이에 접점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정말 제도권 내에서만 그러한가? 대중들의 자기교육이라는 테마에 관심을 갖는다면 아마도 이러한 문제를 피해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교사는 자신이 교사가 아니게 되기 위해 교사가 되어야 하는 것인데, '무지'한 대중들 위에서 '유식'을 단지 자랑하하고, 그러한 지식을 단지 '추종'하는 대중을 끌어모으는 현상은 흥미롭게도 지식인 중심주의와 반지성주의가 어떻게 공모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물음을 던져본다.

 

이런 생각을 하게 해준 그가 정말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단지 그의 이미지가 나에게 지식인 운동의 어떤 흐름에 대해 이런 혐의를 가져 보도록 해주었다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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