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강연 메모(Perry Anderson, 2010/10/19)

http://www.soc.nthu.edu.tw/news/index.php?act=detail&nid=737

 

옆 학교인 (대만) 청화대학 사회학과에서 주최한 페리 앤더슨 초청강연에 가 보았다. 작은 강의실에 30-40여명 정도 좀 좁게 앉아서 들었는데, 영어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래의 메모는 매우 자의적으로 이해된 내용들이다.

 

특강의 제목은 '중국혁명: 역사로부터 개혁까지'(中國革命:從歷史到改革)였다. 영어 제목은 달지 않았는데, '중국혁명: 역사로부터 개혁으로'라는 번역도 후보에 올릴 수 있다.

 

먼저, 앤더슨은 중국혁명을 비롯하여 그 후 개혁개방의 성공과 현재의 지위 등 중국과 관련한 '내재적 본질' 또는 'unique China'에 근거한 접근 방식 자체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사실 지난번 왕초화의 문제제기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보인다. 다시 말해, 간접적으로 왕휘, 감양 등을 비판하는 스탠스를 취하는 것이다. 이와 다른 관점으로 제시된 것은 '비교'의 관점이다. 즉, 비교를 불허하는 특수주의에 대항하여 '역사적 비교'의 방식을 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비교는 역사적 관점에서 단계적으로 진행된다.

 

1. 볼세키비와 중국공산당

2. 내전과 혁명

3. 숙청과 집단화

4. 페레스트로이카와 개혁개방

이에 더해, 당의 정치적 리더쉽의 문제, 사회주체, 국제적 관계, 계급혁명/민족혁명 등을 추가로 분석한다.

 

중국적 측면에서 정리해보자면, 혁명주체에서는 농민이 포섭되었으며, 국공내전은 경제력의 파괴가 크지 않은채 혁명에 도움이 되었고, 혁명 후의 집단화와 숙청은 사실상 '실패한 재난'(러시아의 '성공한 재난'에 비해)이었으며, 이는 오히려 모택동 사후 관료계급의 지속성의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하였다. 나아가, 이는 개혁개방에서 리더쉽을 발휘할 수 있는 조건 중 하나였다. 사회적 측면에서 농민사회는 집단화 과정에서도 일정하게 유지되었으며, 개혁개방에 이르기까지 상대적으로 안정성을 가진다. 국제적 관계에서 볼 때, 미국 등 자유주의 진영은 '소련'을 주적으로 삼았으며, 중소분쟁은 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소련에서 경제개혁의 출구가 없었던 반면, 중국은 '미국'이라는 출구와 원시축적의 역할을 한 화교자본이라는 출구가 있었다. 소련이 국내적 계급투쟁의 성격이 강한 반면(나치즘과 관련한 부분은 에피소드에 불과), 중국은 반외세적인 민족혁명의 성격이 강했다.

 

마지막으로 많이 알아듣지 못한 부분인데, 아시아 속의 중국과 유럽 속의 러시아의 역사경험의 차이도 현재의 중국을 설명하는데 분석이 필요한 것 같다. 아마도 중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경계를 드러내는 듯 했다. 한편, 중국의 '성공'은 자본축적과 글로벌패권의 측면에서 볼 때 '성공'일 뿐이지, 혁명의 본래적 의미에서, 특히 '평등'이라는 가치에서 볼 때 전혀 '성공'이 아니라는 입장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페리 앤더슨 스스로도 아마 정리된 내용은 아닌 것 같고, 막 펜으로 작성한 글을 가지고 발표한 것으로 보아 앞으로 좀 더 연구가 진행될 듯 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왕초화(王超華,왕차오화) 특강 메모

어제1989년6.4천안문 사건의 학생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유명한 왕초화의 특강이 열렸다. 이 특강은 우리 연구소 수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인데, 한 학기 동안 학위 과정의 기술적인 부분들에 대한 지도와 더불어 각 분야의 저명한 연구자들을 초청하여 강연을 듣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초화의 특강 제목은'지식사상 공공화의 곤경'이었고, 부제목은'중국사회 장기역사발전에 대한 지식사상의 인식과 개입'이었다.

 

왕초화는 먼저 지난7월 세상을 뜬 미조구치 유우조(溝口雄三)의 문제의식에 대한 소개로 강연을 시작하였고, 특히, 다케우치 요시미에 대한 반성과 극복의 부분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이어 왕휘, 감양 등의 글을 검토하면서 왕휘, 감양과 미조구치, 다케우치 사이의 관련성을 지적한다. 한편, 최근 뉴레프트리뷰에서 논쟁이 된, Joel Andreas와Huang Yasheng의 논쟁도 소개되었다. 마지막으로 팍스콘 노동자 자살의 케이스를 통해 중국 농촌의 문제를 다시 환기시켰고, 앞서 제시한 왕휘, 감양 등의 오류를 확인한다.

 

강연과 약간의 오차가 있겠지만, 필기에 따라 요점만 정리하면,

 

감양은 중국의 사상적 자원으로 유가, 모택동, 개혁개방을 제시하고, 이는 親情人情, 正義平等, 自由權利라는 긍정적인 부분만 부각시킬 뿐,等差秩序, 大躍進/文革, 市場化등의 문제에 대해서 맹목적인 문제가 있다. 왕휘는 국가와 정당의 문제에서 독립주권성격을 강조하고, 농민과 관련해서 토지혁명과 인민공사의 연관성, 그리고 초국적 자본의 침투 하의 농촌경제의 의존성 증가의 문제를 지적한다. 종합하면, 감양과 왕휘는 지방분권적인 전통사회의 특성과 중국혁명을 통한 농촌포위도시 전략, 토지혁명, 인민공사 등이 농업자본주의(향진기업) 낳음을 긍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개혁개방과 중국의 부상으로 인해 농촌자주모델이 도시의존적 농촌으로 변화했음도 지적된다.

 

이러한 분석에서 공통적인 것은 ‘중국’적 특수성을 강조하는 부분인데, 왕초화는 이를 미조구치 유우조 및 다케우치 요시미 등과 관련 짓는다. 이 부분은 내가 개인적으로 고민해온 주제와 매우 흡사하다. 나는 여기에 진광흥(陳光興, 천꽝씽)을 추가하고 싶고, 어제는 문득 한국의 김지하도 떠올랐다. 물론 고민이 아직 충분하진 못하다. 왕초화는 팍스콘 문제를 제기하면서 어쩌면 아주 상식적인 ‘국가’와 ‘자본’의 공모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식적 비판이 왕휘와 감양에게서 나올 수 없는 상황 자체를 중국 지식사상의 곤경으로 보는 듯 하다. 왕초화는 스스로 연구 중인 주제라는 한계 속에서 일정한 유형적 상동성을 정리한다. 사실 이 부분은 강연 장소에 있던 손가(孫歌, 쑨거), 진광흥(陳光興) 등에 의해 토론시간에 반박되기도 하였다. 왕초화의 정리는 다음과 같다.

 

* ‘자본주의’의 개념적 해석력 부정: 미조구치, 감양

* 반서방중심(1): 미조구치, 왕휘(농촌)

* 방법으로서의 중국: 미조구치, 다케우치

* 반서방중심(2): 다케우치, 왕휘(정치)

 

참고로 손가(孫歌)는 미조구치의 다케우치 비판은 말기에 그가 다시 다케우치에게로 돌아간 점을 통해 다시 고려되어야 할 것이라는 점과 당시 미조구치의 비판의 대상도 다케우치의 영향을 받은 중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라는 점을 부연해주었다. 한편, 진광흥(陳光興)의 반박은 좀 더 적극적이었는데, 그가 미조구치의 ‘적자’임을 드러내는 듯 한 인상을 받았다. 그는 왕초화가 미조구치의 절반만을 이야기하였고, 나머지는 생략하였다면서, 외부/내부, 서방/반서방 등의 대립의 사이의 복잡성을 생략했다고 비판했다. 한편, ‘방법으로서의 중국’에서 그치는 미조구치가 아니라, ‘목적으로서의 세계’까지 함께 이야기해야 미조구치의 사상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다는 입장을 개진하였다. 왕휘, 감양 등에 대한 비판과 관련해서, 다른 교수들과도 토론이 있었는데, 진광흥(陳光興)은 왕휘 비판 자체가 그다지 의미 없다는 입장을 제기하였고, 오히려 미조구치의 관점에 따른다면, ‘입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입장’을 배제한 ‘분석’이 중요하다는 관점을 제시하였다. 왕초화는 마지막으로 비판이론의 성장, 전화의 역사 속에서 ‘자본주의’를 망각하는 측면을2010년 정세적으로 제기하고 싶었다는 입장을 제시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댓글 목록

[번역] 왕휘, 중국은 왜 붕괴하지 않을 것인가('汪晖:为何中国不会崩溃')

 

 

 

 

 

 

 

  • 번역 글에 앞서.

     

    왕휘(汪暉, 왕후이)의 최근 글에 대한 번역을 실어본다. 이 글은 지난 9월2일자 환구시보(環球時報)라는 중국매체에 실린 글이다. 이 글을 번역하는 이유는, 우리 연구소에서 오늘 오후 왕초화(王超華, 왕차오화, 6.4천안문사건학생지도자) 초청 강연을 하게 되는데(사실상 나의 추천으로), 왕초화가 강연을 위해 학생들에게 일독을 추천한 자료 중에 이 글이 포함되어 있고, 분량이 짧고 비교적 명쾌하게 왕휘의 최근 관점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왕휘는 한국에 지나칠 정도로 많이 소개된 측면이 있는데, 역설적으로 그만큼 왜곡되어 소개된 측면도 있는 듯하다. 이에 대한 교정이 없진 않았지만, 여전히 충분해 보이지는 않다고 보인다. 이 번역이 이를 교정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물론 왕휘가 갖는 상징성이나 지식담론형성에 있어서의 중요성을 감안할때, 그를 소개하는 연구자들의 노력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한국 연구자들 중의 일부는 왕휘의 핵심적 결함(당/국가주의적 경향)을 지적하지 못하는 한계를 노정했다고 본다. 게다가 이러한 문제는 한국 지식인의 문제만도 아닌 것 같다. 나는 왕휘의 초기작업(박사논문)에서 중후기 중국적 현대성 탐구로의 전환에 이미 이러한 문제들이 배태되어 있었다고 본다. 이 문제는 노신연구를 포함하는데, 개인적으로 이에 대한 좀 더 포괄적 논의는 이후의 연구작업의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한편, 나는 중국 내부에서 ‘사회주의 중국’ 을 ‘좌익적으로’ 비판하는 문제가최근에 남한에서도 떠들썩한 북한 사회주의에 대한 ‘좌익적’ 비판의 문제와 고도의 유사성을 갖는다고 본다. 나아가 이는 ‘대안적 아시아’를 실천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왕초화의 강연정보는 다음과 같다.

    講題:知識思想公共化的困境

    主講人:王超華‧中研院近史所博士後研究員
    地點:交通大學人社二館106A研討室
    時間:2010年10月13日(三)14:00~17:00
     
    주제: 지식사상 공공화의 곤경
    강연자: 왕초화(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 박사후연구원)
    장소: 대만 국립교통대학 인문사회2관106A
  •  

  • 시간: 2010년 10월 13일(수) 14:00~17:00
     
    왕초화는 왕휘의 글 외에도, 감양(甘陽, 깐양)의 “중국의 길: 30년과60년”이라는 글을 추천하였고, 팍스콘 및 신세대 농민공 관련한 글을 참조해달라고 전해왔다. 나는 왕초화가 올해 초 ‘사상’이라는 대만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짧게 왕휘의 문혁관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제시한 부분을 본 적이 있는데, 이번 강연에서 그 부분을 좀 구체적으로 전개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
    [번역] 왕휘, 중국은왜붕괴하지않을것인가('汪晖:为何中国不会崩溃')
    環球時報2010-09-02

     
    중국모델과 관련한 토론 가운데, 많은 학자들이 중국의 발전이 갖는 안정성을 강조하면서 중대한 위기가 출현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정확하지 않은 이야기이다. 개혁개방30년간 중국 최대의 위기는1989년 위기이다. 가장 심각하고 지속적인 위기는 곧 정치영역과 국가기구가 나날이 시장관계에 의해 침투되었던 것이다. 오늘의 금융위기와 마찬가지로1989년의 위기는 동일하게 국제정치와 사회위기의 일부분이었는데, 바로 소련/동유럽위기의 전주곡으로 볼 수 있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 역시 공산당이 영도하는 사회주의 국가였다. 하지만, 왜 중국은 그들과 달리 무너지지 않았는가? 궁극적으로 어떤 요인들이 중국의 안정성을 유지하고 고속성장의 조건을 제공했는가? 30년 개혁을 경험한 후, 이 조건 자체에 어떤 변화가 발생했는가? 중국경험의 독특성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먼저 대답할 것은 바로 중국과 소련/동유럽, 특히 변천 후의 러시아 등 전 사회주의 국가들 사이의 큰 분기이다. 이 큰 분기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중국체제가 소련/동유럽체계와 구별되는 첫 번째 특징

     
    소련/동유럽체계의 와해는 관료체계와 민중의 대립, 냉전정치 중의 전제정치, 나아가 결핍경제가 낳은 민중생활의 곤경 등의 복잡하고 심각한 역사적 원인을 갖는다. 이러한 요인은 중국에도 정도를 달리하여 존재했다. 하지만, 중국이 소련/동유럽체계와 구별되는 첫 번째 특징은, 독립자주적으로 사회발전의 길을 탐색하였고, 이로 인해 독특한 주권지위가 생겨났다는 점이다.

     
    냉전시기, 양방의 정치가들은 “브레즈네프의 법칙”이라는 개념을 자주 사용하여 동유럽국가들의 “불완전 주권”상태를 조소하였다. ‘바르샤바조약’체계 중에 동유럽 국가는 완전한 주권을 가지지 못하고, 소련의 지배를 받았으며, 소련에서 문제가 발생하기만 하면, 소련/동유럽체계 전체가 함께 무너지게 되었다. 2차대전 이후 민족국가의 주권체계가 확립되었는데, 사실상 세계범위 내에서 진정한 독립주권을 가진 국가는 매우 적었다. 단지 소련/동유럽국가 뿐 아니라, 서유럽국가도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아시아에서 일본, 남한 등의 국가 역시 냉전의 구조 속에서 그들의 주권은 미국의 전지구적 전략에 제약을 받았고, 동일하게 불완전 주권 국가였다. 냉전의 구조 속에서, 양대 진영은 모두 결맹 국가체계였고, 어느 한 진영 가운데의 헤게모니 국가가 변화가 발생하거나 정책이 전변하면, 다른 국가들도 모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중국혁명과정 그 자체가 그 독특한 길을 가지고 있는 것 처럼, 중국은 건설시기에 독립자주적인 발전의 길을 걸었다. 지난 세기50년대 중반부터, 중국은 적극적으로 비동맹운동을 지원하였고, 그 후 다시 소련공산당과 공개적인 논전을 전개하였다. 정치, 경제, 군사를 막론하고 모두 일부 학자들의 용어로 말하자면 소련과의 ‘종주관계’에서 벗어나, 스스로 사회주의체계, 나아가 세계 전체에서의 독립적 지위를 확립하였다. 이 과정은 강요된 부분이 있으며, 중국 당대 역사 가운데 가장 고난하고 거대한 희생을 치른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과정 속에서 중국 국가의 정치성격이 주권적이고 고도의 독립자주적인 방향으로 전환되었으며, 이러한 정치성격의 주도하에 형성된 국민경제체계는 공업체계를 빼고도 고도로 독립자주적이었다. 이러한 자주성이라는 전제없이 중국의 개혁개방의 길을 상상하기란 매우 어려우며, 중국의1989년 이후의 운명을 생각하는 것도 매우 어려울 것이다.

     
    개혁개방 과정이 개시되던 시기, 중국은 이미 하나의 독립자주적인 국민경제체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개혁의 전제였다. 20세기70년대부터80년대까지의 개혁을 통해서 볼 때, 중국의 개혁은 하나의 내부논리를 갖는, 자주적인 개혁이었으며, 하나의 주동적이지, 피동적이지 않은 개혁이었다. 이는 동유럽이나 중앙아시아의 각종 복잡한 배경을 갖는 ‘색깔 혁명’과 매우 다르다. 중국의 발전은 라틴 아메리아식의 종속경제와도 다르며, 일본, 남한, 대만 등의 지역과 비교해도 아마 동아시아 모델로 간단히 환원할 수 없을 것이다(국가의 역할, 정부산업정책 및 일부 발전전략 방면에서 유사성과 상호성이 존재하더라도). 정치의 각도에서 볼 때, 중국개혁의 전제는 자주이며, 앞서 지적한 각국의 발전은 대체적으로 종속형발전으로 개괄할 수 있다.

     
    중국의 자기조정은 피동이 아니라 주동[능동]이다.

     
    이러한 상대적으로 말해서 독립완전한 주권성격은 정당의 실천을 통해서 완성되었다. 이는20세기 정치에 있어서 돋보이는 특징이다. 중국 공산당이 이론과 실천에 있어서 얼만큼의 오류를 범했다고 하더라도, 당시 중국공산당의 ‘반제’와 그 후의 소련과의 변론은 중국 주권성을 완성하는 기본 요소였고, 이 문제에 있어서 세세한 문제에 갇혀서 판단을 할 수는 없다. 소련 공산당과의 공개 변론을 통해, 중국은 먼저 두 당 사이의 종주관계에서 벗어났고, 이어서 국가간의 종주관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독립적인 모델을 형성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주권근원은 정치적인 것인데, 정당관계와 정치과정 중에서 발전해나오는 일종의 특수한 정치독립성이 국가와 경제 등의 영역에서 현현된 것이다. 식민주의 역사 가운데, 규범적인 주권개념과 독립자주는 아마 거의 관련이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는 국가는 국제법의 의미상 반드시 하나의 주권 국가이지만, 이 주권과 독립자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상 냉전시대의 양극화 구조는 점차 와해되고, 이는 이러한 양극 구조의 지속에 대한 중국의 비판과 투쟁과 관련된다. 중국의 개입이 없었다면, 미/소 사이 직접적 대결의 가능성이 훨씬 더 컸을 것이다.

     
    경제, 정치, 문화 영역에서, 사회주의의 길에 대한 중국의 탐색과 개혁의 실험 모두 다양한 편차, 문제, 심지어 비극적 결과를 낳았는데, 그렇지만 지난 세기50년대, 60년대, 그리고70년대, 중국의 정부와 정당은 부단히 스스로의 정책을 조정해왔다. 이러한 조정은 당연히 세계적인 환경과 조건 가운데에서 발생하여, 냉전, 베트남전, 경제봉쇄, 중소관계의 악화 등이 중국의 정치와 경제 정책의 제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나, 그에 대응한 방식은 주동적인 것이었다. 곧 대내외적 실천 가운데 출현한 문제에 근거하여 조정을 진행한 것인데, 이는 곧 독립자주라는 구호의 정치적 함의이다.

     
    중국은 또한 교정기제를 가지고 있다

     
    일종의 정당 노선 교정기제로서의 이론변론, 특히 공개적 이론변론은 정당과 국가의 자기조정, 자기개혁 중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공산당내 일종의 서방적 의미의 민주기제가 결여되었기 때문에, 이론 변론과 정책 차이가 잔혹한 권력투쟁을 낳은 적도 있지만, 이러한 요인이 노선 변론과 이론변론이 역사 속에서 행한 중요한 역할을 덮을 수는 없다. 이러한 각도에서 보자면, 개혁 이래의 일정한 습관적 담론을 다시 사고해 볼 필요가 있는데, 예를 들어, 개혁이 준비된 모델, 준비된 정책이 없었다는 점에 대해 말하자면, “돌을 더듬어 강을 건넌다”는 말은 당연히 정확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준비된 모델이 없다는 것 자체가 중국혁명 전체의 특징이다.

     
    준비된 모델이 없을 경우에 무엇에 기대는가? 기댈 것은 이론변론, 정치투쟁, 사회실천이다. 이론변론은 중국의 혁명과 개혁 과정 가운데 중대한 작용을 하였다. 개혁의 이론원천, 사회주의 상품경제의 개념은 바로 상품, 상품경제, 가치법칙과 자산계급의 법적 권한 등등의 이론적 토론 가운데 생산된 것이며, 사회주의 실천 가운데 모색된 것이다. 가치법칙 문제와 관련한 토론은 지난 세기50년대에 출현하였는데, 손야방(冶方)과 고준(顧準)이 가치와 가치법칙 문제와 관련한 논문을 발표하였고, 그 큰 배경은 중소분열과 중국사회모순에 관한 모택동의 분석이었다. 이 문제는 지난 세기70년대 중반 다시 당내 변론의 중심과제가 되었다.

     
    이러한 이론변론이 없었다면, 그 이후의 중국의 개혁이 가치법칙, 노동에 따른 분배, 사회주의상품경제, 사회주의 시장경제 등의 논리적 발전을 따라가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 지식인 차원에서 보면, 지난50년대, 60년대부터70년대 까지, 사회주의, 민주사회주의, 인도주의적 사회주의 등의 문제는 그치지 않고 전개되었다. 개혁은 그 체제 안팍에 이론적 원천을 갖는다. 오늘날, 발전노선과 관련한 변론은 이미 과거의 정당 내부에 제한된 것과 다르다. 하지만, 이론변론이 정책노선에 대한 조정의 의미는 여전히 막대하다. 만약  GDP 성장만 치중하는 발전주의에 대한 체제 안팎의 비판과 저항이 없었다면, 새로운 과학발전 모델에 대한 탐색은 일정에 올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세기90년대 중국 정치구조의 변화에 따라, 중국 지식계의 변론은 부분적으로 과거의 당내 노선 변론의 기능을 대체하게 되었으며, 지난 세기90년대 말 이래로의 삼농문제에 대한 관심, 2003년 이후 의료개혁에 대한 반성, 2005년 국유기업개혁과 노동권리에 대한 관심, 나아가 생태환경보호의 이론선전과 사회운동 등등은 모두 국가정책의 조정에 영향을 끼쳤다. 이론변론은 방향을 인도하는 문제에 있어서 아주 큰 기능을 한다.

     
    현재 민주는 교정기제라고 자주 말해지는데, 사실 이론변론과 노선변론 역시 하나의 교정기제이고, 정당의 교정기제이다. 20세기의 역사에 있어, 당내 노선 변론은 시시각각 폭력과 전제의 특징을 드러냈고, 이에 대한 깊이 있고 장기적인 반성은 필요한 것이지만, 당내투쟁의 폭력화에 대한 비판은 이론변론과 노선변론에 대한 부정과 같은 것일 수는 없다. 사실상 후자[이론변론과 노선변론]가 바로 독단을 벗어난, 자기교정적인 루트와 기제이다. 사회구조의 변화에 따라 이론변론은 더 이상 정당과 국가내부에 제한되지 않으며, 심지어 사회공중의 공간에서도 발생한다. 이로 인해, 어떻게 공공 토론에 이익이 되는 사상공간을 촉발시키고 창조해 낼 것인가의 문제가 중국의 발전노선을 탐구하고, 공공정책이 특수이해관계에 의해 좌우되는 것을 피하는 첫 번째 과제 중 하나이다.
    ***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