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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휘 수업, 제6강 <전쟁, 문화 그리고 정치>

내용은 좀 산만하게 전개 되는데 몇 몇 포인트는 중요한 것 같아서 메모해둔다.

 

왕휘의 글 <문화와 정치의 변주: 전쟁, 혁명, 그리고 1910년대 '사상전'>은 1차 대전, 즉 전쟁의 위기와 중국의 공화 위기라는 '위기'의 정세 속에서 '자각'은 문화적인 것(또는 곧 정치적인 것)을 낳고, 여기에서 정치와 역사간의 단절이 발생했다는 점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이 문화 운동이 5.4 신문화운동인데, 왕휘는 이 신문화운동에서 <신청년>과 갈등적 위치에 있었던 <동방잡지>를 분석함을 통해 '역사화'를 시도한다. 그리고, 그 당시에 <신청년>에게 패배했던 <동방잡지>가 한 세기 이후 현대성을 고민하는 데 있어서 제시할 수 있는 참조점을 찾고자 한다. 흥미로운 것은 <신청년>이 적극적으로 현대성 또는 민족국가를 수용하고 청년이라는 새로운 주체를 통해 실천을 창조해 내고, 나아가 이는 사회주의혁명의 기초를 제공하기도 한 반면, <동방잡지>는 오히려 민족국가 보다는 문명국가를 제시하면서 국가의 정치를 넘어서는 문명의 정치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왕휘의 분석은 그다지 깊게 나아가지 않는다. 물론 왕휘는 민족국가가 인민주권과 같이 권리주체로서의 개인의 인격화를 통해 형성됨을 비판한다. 이는 소위 사회계약의 허구성 또는 정치의 자율성의 허구성을 비판하는 것과 유사한 맥락인 것 같다.

 

한편, 중간에 흥미롭게도 3.1운동에 대해 언급했는데, 윌슨주의의 영향과 그에 대한 실망의 차원에서 조선의 사례도 나름 중요한 분석대상이 된다는 설명이다.

 

1924년 손문의 대아시아 개념은 일본의 도쿄학파와 일정한 차이를 갖는데, 손문의 것이 혼종성을 포함하는 일종의 초국가적 개념이라면, 도쿄학파의 것은 동질성으로 표현되는 공동체주의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손문은 동으로는 일본, 서로는 터키, 남으로 인도까지 포함하는 대아시아 개념을 갖게 되는데, 이는 바로 '러시아 혁명'의 정치성을 전유한다는 것이 왕휘의 해석이다. 따라서, 손문의 '왕도'는 오해받기 쉽지만, 혼종성을 포함하는 공존의 원리라고 해석될 수 있다는 것. 왕휘는 두 가지 예를 들었는데, 하나는 중국 역사 속에서 쇠망하는 청조와 오히려 조공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던 것은 네팔이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련의 불평등조약 폐기를 왕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티벳과 몽고를 포함하는 중국의 국가형성과정이 민족국가(민족자결)의 논리와 다르다는 점에 의해 다시 지지된다.

 

이는 종족성/민족 등의 번역문제와도 관련된다. ethnic은 미국식 개념이고, national(ity)는 민족체는 중국적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라는 왕휘의 설명은 흥미롭다. 기존에 나오키가 체계적으로 민족을 ethnic으로, nation을 국민으로 번역하는 부분에서 '국가'이전의 인민의 이름으로서의 '민족'(주의) 그리고 '민족해방'은 ethnic한 것이 아니라는 반론을 폈던 적이 있는데, 나는 이 지점이 바로 역사성을 요구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마침 왕휘는 nationality를 민족/국민의 두 가지를 포함하되, 민족을 의미할 경우 반드시 동질화의 경향을 가진다기 보다는 혼종성, 차이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정치체를 구성하는 원리를 내재할 수 있다고 본다. 좀 더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간단한 뒷풀이에서 나는 두 번째 수업 텍스트에서 왕휘가 언급한 "아시아 역사에 대한 재사고는 유럽의  '세계역사'에 대한 재구성"이라는 관점에 대해, 이러한 '세계사'의 시각은 보편성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물어 보았는데, 데리다의 '연역'을 이야기한 부분은 내가 잘 모르겠고, 바디우의 개별적 보편성 이야기를 하면서 '이론'에 대한 문제는 옆 자리에 있던 류교수에게 물어보는게 좋겠다고 했다. 왕휘는 바디우의 사건적 개별적 보편성에 대해 별 이의 없이 수용하는 태도를 갖고 있었는데, 바로 구조의 역사, 또는 역사의 동역학에 대한 침묵이 바디우와 왕휘에게 공통적이지 않은가 싶다. 왕휘가 수업 말미에 이야기했던 일종의 허무주의적 언급은 바디우의 모종의 낙관주의와 동일한 논리적 구조를 가지지 않는가 의심해 보고 있는데, 왕휘는 20세기 출현했던 거대한 '정치성'이 지금은 불가능해졌고 어떻게 정치를 부활시킬 수 있을지가 불확실한 시대라는 진단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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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8일 잠시 한국으로.

결국 대만에서 중국비자를 받는 것을 포기하고 한국을 경유하기로 했다. 대만에서 외국인이 받을 수 있는 중국비자는 1회방문 1개월 이내 체류 가능한 비자 밖에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한국의 비자대행여행사에 알아보니 한국에서 중국 비자 받기는 1개월이든 3개월이든 별 까다로운 절차가 없는 듯 하다. 덕분에 한국에 한번 더 들어가게 되었는데, 어쩌면 잘 된 것 같기도 하다. 마침 수집하여 가져갈 책들도 있고, 한울 출판사 쪽이나 '조반유리'와 만나서 번역 관련한 이야기를 할 필요도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결국 4월 중순은 되어야 상해에 들어갈 것 같고, 7월 중순에 한국으로 다시 들어온다. 4월 8일 낮 비행기로 한국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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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역사

아마도 박사과정 들어와서 지속적으로 반항하면서 일부 동의하게 된 것 중 하나가 바로 '역사화'라는 것일테다. 진광흥(천꽝씽) 선생의 조금은 불친절한 강조에 대해 여러번 흥분하여 대응하기도 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그에게 당신은 '역사화'는 있지만 '정치화'는 결여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었다. 이 측면에서 볼 때, 왕휘에게는 '역사화'와 '정치화'라는 두 범주가 모두 존재하는데, 그것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그 사이에 긴장이나 모순이 있지 않은지,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풀어내는지에 대해 어제 수업 중 질문을 던져 보았다.

 

왕휘는 제임슨의 '영원한 역사화'의 입장에 있기 때문에 역사화는 본질주의화와 다른 것임을 먼저 강조하고, 한편 '정치'란 일정한 의미에서 '역사의 중단'이며, 곧 역사가 중단되는 곳에서 정치가 탄생하는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이야기를 더 끌고가지는 않았고, 이후 수업이 주로 역사화/정치화라는 범주를 중심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이후 충분한 논의를 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왕휘 선생님과의 대화 덕분에 '역사'와 '정치'를 그 관계 속에서 좀더 분명하게 개념화할 수 있는 길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다. 물론 내가 보기에 왕휘는 '역사화'를 비본질주의화하면서, '정치'의 가능성의 조건을 탐색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 왕휘 선생에게 있어서 '역사화 또는 역사서술'은 '정치화'(또는 정치적인 것)을 위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왕휘 선생과 사카이 나오키 선생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그들의 작업이 갖는 효과를 고려하면 또 다르지만. 나는 이와 대비되는 시도로 전리군 선생님의 작업을 주목하고 있다. 전리군 선생은 '정치화를 위한 역사화'를 시도하기 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인 역사서사'를 시도한다. 따라서, 왕휘가 '당대의 정치'를 위해 현대성이라는 '과거의 역사'에 주목하는 반면, 전리군은 '당대의 정치'를 위해 '당대역사의 재구성'을 시도한다. 즉, 전리군 선생은 역사 속의 대안적 주체의 계보를 재구성하는 작업을 통해 당대의 정치적 공간에 직접 진입하는 시도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흥미롭게도 왕휘는 '서술'의 관점에서 역사를 대하는 반면, 전리군은 '서사'의 관점에서 역사를 대하는 대비가 드러난다. 물론 이러한 구도는 두 선생님이 진행하고 있는 작업을 전반적으로 포괄하고 있지는 않고, 게다가 진행 중인 부분도 있기 때문에 이후 진행될 부분을 배제하고 판단하기가 어렵기도 하다. 아마도 전리군 선생은 소위 '역사화'보다 '정치화'에 더 방점을 찍고 있는 듯 하고, 나아가 역사화의 문제를 나름 해결하는 방식을 노신에서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왕휘 선생은 정치화를 위한 사상적 자원을 역사화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데, 그러한 역사화가 어떻게 새롭게 정치화를 가능하게 하는지, 또는 할 것인지는 두고 볼 문제이다.

 

이 문제는 사실 자세히 살펴보면 유물론과 변증법의 문제와 매우 유사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근래 내가 알튀세르를 통해 고민해 왔던 문제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문제이다. 역사화가 해체적이고/유물론적인 것이라고 할 때 정치(성)에 묶여있는 목적론적인 부분은 어떻게 해소될 수 있는지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그러한 목적론을 배제할 경우 일종의 '우연의 유물론'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도 제기될 수 있다.

 

아무튼, 조만간 정치적인 것(정치)와 역사적인 것(역사)의 관계에 대한 소론을 써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편, 왕휘 선생과 3박4일 동부해안을 돌아보면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는데, 왕휘 선생은 한국의 80년대 사회성격논쟁와 한국 사회운동의 궤적에 대해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적극적으로 글을 한편 써보라는 권유도 했었다. 물론 나는 나보다 훨씬 더 많은 '권위'자들이 한국에 있고, 나는 생계를 위해 당분간 중국연구자가 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는 '현실론'을 폈다. 생계 문제가 해결되면 언젠가 돌아가야 할 주제임은 분명한 것 같다. 나 스스로 한국 사회운동을 얼마만큼 전유하고 있는지 아직 확신이 없지만, 지속적으로 반추하고 역사화/정치화해야할 자원임은 분명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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