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2010/12/13

인문학은 해체나 유물론, 또는 그러한 비판으로서가 아니라면 별 의미가 없지 않을까.

해체나 유물론의 대상은 사회과학일까?

 

그럴 수도 있겠다.

사회과학이 닫히면서 현실성을 갖는 구조에 대한 분석을 지향한다고 하면 그렇다.

구조의 열림을 향하는 인문학은 궁극적으로 '여는 행위' 자체 보다는 여는 행위를 통해 구조분석이 더욱 현실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여는 행위'가 실제로 열고 있는지 어떤지 그 행위에 대해 알 수 없다.

 

알튀세르가 철학의 새로운 실천을 정의할 때 바로 이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마르크스를 따라 예술의 무기와 무기의 예술을 구분하며 노신이 문학을 실천으로 규정할 때도 같은 맥락에 있다고 나는 본다.

 

전리군(첸리췬) 선생님의 작업에 나타나는 유물론적 특성, 비판성에 대한 연구의 방향을 고민하면서 문득 드는 생각들이다. 현재로서는 포스트모택동시기의 비판사상궤적에서의 전리군선생의 위치, 1957년학의 역사해석에서의 비판성, 비판성의 요소로서의 노신과 모택동, '노신좌익'과 '1957년학'을 통해 본 정치와 역사의 관계  등의 문제 등을 고민하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댓글 목록

2010/11/29

한 학기 1학점 씩 3학기동안 들어야 하는 '개별연구'라는 과목은 교수와 1대1 세미나를 진행하는 수업인데, 이번 학기도 Liu교수와 함께 스피노자 관련해서 공부를 해오다가 발리바르를 만나면서 남은 학기를 발리바르에 쏟기로 했다. 물론 내 개인적인 결정인데, 이는 다른 과목 수업에서 바디우를 다루면서 촉발된 측면이 강하다. 프랑스철학 연구자도 아니면서 그쪽 이야기를 왈가왈부하기가 뭐한데, 중국 사상 연구자(가 되고자 하는) 입장에서 유럽 현대철학은 외부이지만 나는 그 일반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본다. 물론 깊이가 좀 없긴 하지만...

 

아무튼, 여러가지 정황적인 것들을 동원해서 초보적으로 판단을 해나가는 중이다. 결국은 역사이론의 문제인데, 역사유물론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결국 바디우에게는 역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는 철학적으로 아주 다르면서도 사카이 나오키에게 받았던 유사한 역사의 부재를 떠올렸다. 바디우가 그런 것(수학적 존재론, '공산주의'도 그렇고, 네가지 진리의 조건들도 그렇고)은 라깡 때문이다라고 '무식한' 결론을 내려보기도 하고, 나오키가 그런 것은 데리다 때문이다라고 결론을 내려보기도 한다. 형식이나 범주의 체계를 중심으로 역사를 설명하다보니 역사 속의 주체와 역사 동력을 이루는 우연성/독특성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나오키와 아주 유사한 방식으로 일본의 근대성(일본어, 일본인, 일본) 등에 대한 '해체'의 작업을 진행하는 젊은 연구자에게 내가 일전에 던졌던 질문도 동일한 맥락이었는데, 근대성 자체를 역사화하지 못한다는 문제 즉, 근대성의 출현과 확립의 역사과정 속에 주체는 어디로 갔는지라는 문제가 왜 이항대립이라는 형식적 필연적 틀에 그 설명이 갇히는지 말이다. 여기에서 천꽝씽 교수와 맞닿은 지점이 있는데, 천교수는 내 뜻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듯 했다. 어쩌면 포스트식민주의에서 탈식민주의로의 전환이 나오키에서 천꽝씽으로의 전환이 아닐까 생각을 해보았는데, 이 전환은 내가 보기에는 또한 아시아를 '방법'으로 삼으면서도 결국 본질주의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는 댓가를 치르면서이다. 이는 정확히 나오키가 과녁으로 삼고 있는 파농이 지적한 거울유희의 전통적인 포스트식민주의의 문제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결국 역사의 동력을 존재론적 질문을 통해서 풀려고 하다보면 결국 본질주의에 갇히게 되는 듯 하다. 들뢰즈나 네그리의 스피노자론도 일정하게 그런 느낌을 준다. 또 아주 다르게 형성되어 온 아시아의 탈식민주의나 제3세계론도 유사한 맥락을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발리바르의 '비존재론'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댓글 목록

2010/11/23

대만 민족주의가 반한감정에서 이제 반중국 감정으로 전환되는 양상을 띠고 있다. 지방 선거와 맞물리면서 그렇게 되었는데, 이제 이 문제는 일종의 블랙홀로 들어갔다고 해야겠다. 그 효과는 아무도 해결방안을 갖고 있지 않고, 가질 수 있다고 기대도 하지 않으면서 유권자를 둘로 나누는 것 뿐이다. 대안세력은 없다.

 

스포츠는 스포츠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진 않은 것 같다. 분명 스포츠에서도 소위 '강대국'의 입김이 작용하고, '약소국'의 '국민'임으로 인해 차별 받는 일도 발생할 것이다. 게다가 스포츠 뿐인가? 그런 게임들은 무수히 많다. 그런데, 그렇게 '강대국'의 입김이 작용하여 금메달을 더 딴 강대국 '국민'은 실로 행복한가? '빼앗긴' 금메달 때문에 약소국 국민은 정말 불행한가? 민족주의는 '민족'의 이익을 말하지만, 그 민족은 이미 평등의 구호 안에 불평등의 원리를 내재하고 있지 않은가. 가상의 행복과 가상의 슬픔일 뿐이다.

 

얼마전 KTX노동자들의 승리, 기륭 노동자들의 승리에 이어 현대자동차 비정규직/그리고 정규직의 승리를 기원한다.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된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는데, 이제 대결의 구도로 진입하는 듯 하다. 비정규직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노동의 분할에 맞선 단결의 문제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