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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9

박사논문은 남한과 대만의 종별성을 응축하고 있는 "사상의 빈곤"과 "사상의 단절"이라는 대만 및 남한의 사상가의 서로 다른 문제의식을 대비시키면서 박현채 선생의 신식민성 인식과 실천의 곤혹을 드러내고자 했고, 나아가 역사내재적으로 현재적인 지식의 식민성에 대해 발본적인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자원으로 삼고자 했다. 특히 종별성의 대비는 '분단'이라는 맥락에 의해 구체화된다. 

 

사실 후식민주의가 탈식민주의적 실천을 대체하는 것 같은 가상이 지배적인 '식민지'적 지식상황을 내파하고 전환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후식민주의에 대해 단순히 탈식민주의를 대당시키는 것으로 역부족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사상의 구체성을 담보하는 역사맥락화가 필요한 것이고 이는 지식의 탈식민화의 출발점이자, 이론과 실천의 유기적 결합에 있어서 이론 방면의 전제이기도 하다.

 

나는 이와 같은 신식민성을 다원적 세계구성의 맥락에서 대만과 남한이라는 역사적 종별성을 가지는 상호참조 대상을 바탕으로 검토했는데, 이를 '제3세계'적 맥락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진 선생님의 조언이다. 세계, 권역, 민족의 삼차원 구성에서 역사, 지식, 이론, 실천, 윤리 등의 범주가 갖는 상호 관계를 밝히고자 했던 것이 논문의 주 목적이었는데, '권역간'이라는 문제의식이 다시 추가된 것이다. 

 

'권역간'의 문제는 '영어'의 이중성의 문제와 연결된다. 이에 대한 문제의식의 심화가 이후 1년 학습과 연구의 기본 구상으로 이어질 것이고, '영어'적 공간에서 진행될 내 실천의 구체적 내용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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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4

'조망'적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진 선생님의 의견을 우선 접수한다. 식민화된 지식사상 자체를 상대화하는 권역적/상호참조적 분석과 고찰 또한 다시 식민화된 언어문화 체계 내에서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이럴 때 바로 '조망'적 시각을 가능케 하는 '영어'의 장역이 필요한 것이다. '제3세계'를 매개하는 '영어'는 바로 이런 의미이다.

 

'영어'로 작성되지 않더라도, 그 맥락을 의식하는 글쓰기가 내게는 부족했던 것이다. 어쩌면 부족했다기 보다는 상호참조적 맥락에 더욱 충실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자체만으로는 여전히 한계적인 것은 분명하다. 어제 진 선생과 알랭 블로사 사이의 논전이 보여준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진 선생은 중국어적 맥락에서 중국어로 진행되었다면 내부적 맥락에 의한 왜곡으로 인해 전개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던 이야기를 충분히 명료하게 아주 설득력있게 압도적인 분위기를 만들며 전개했다.

 

논문 심사가 잘 끝나고 여러 제안을 받게 되었다. 구체화되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릴 수도 있지만, 어쨌든 후속 작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것 같다. 오히려 '한국'적 맥락에서 갖는 내 문제의식의 고립성과 위험성을 내가 너무 의식하면서 스스로 논문에 대한 의미부여의 정도가 너무 낮았던 것이 논문 자체를 더 밀고 나가지 못했던 원인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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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9

문혁 50주년 토론회에서 발표를 마치고 이런 저런 생각들이 들었다. 예상했던 대로, 내 발표는 '토론'이라 할 만한 어떤 반응을 끌어낼 수는 없었다. 행사가 끝나고 일부 선생님들로부터 '신식민-분단체제' 개념에 대한 일정한 조언들이 있었던 것이 그나마 수확이었다고 할까. 

 

발표하면서 머리 속으로는 줄곧 누군가는 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는 사람이 있겠지... 아마도 그 '누군가'는 연구자가 아닐 가능성이 많고, 또는 연구자라고 해도 '중국' 연구자가 아닐 가능성이 높고, 연구자가 아니더라도 기존의 '관성'적 타자 접근방식에 물들지 않은 학생 또는 신참연구자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농후한 지적인 '주입'의 분위기 속에서 좌절감을 느끼면서도, 그 누군가를 기대하며 자신감을 갖고 내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밤 늦게까지 뒷풀이가 이어졌으나, 단절된 느낌은 여전했다. 늘 그렇듯이 시간이 늦어지면 '젊은 연구자'들의 밥 벌이 걱정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데,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당연히 그러한 '선의'가 고맙지만, 역으로 나는 그러한 '선의'가 어떤 책임소재에 대한 알리바이가 될 위험성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선의'의 주체와 대상 모두에게 관련된다. 나는 세대간 관계에서 선배 세대들이 더욱 열심히 연구를 해서 역사와 사회에 대한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노력이 늘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더욱 치열한 논쟁을 통한 발전적 전망을 보고 후배들 또한 일정한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의 상황은 어떤 '과거'에 발목잡힌 빈곤의 악순환이 아닐까. 내가 나를 '용서'하는 순간, 동료를 용서하게 되고, 나아가 나 보다 어린 집단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를 댈 수 없는 법이다. 사실 이러한 쉬운 '용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찰'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 여전히 '성찰'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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