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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6 페이스북 논란 후기

 

페이스북에서 이병한 선생에 대한 비난을 둘러싸고 약간의 대화가 오고 갔다. 이런 개입을 잘 하지는 않지만, 그냥 지나치기는 어려웠다. 단순한 한 개인의 문제라기 보다는 하나의 지식 문화의 문제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이병한 선생 뿐만 아니라, 나도 해당 될 수 있고, 이후의 수많은 젊은 연구자들에게도 해당되는 문제로 보았다. '정치적 올바름'으로 연구자의 사상해방을 가로막는 지식 문화가 얼마나 지식의 실천성을 제약하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여러번 반복해서 이야기 해 왔지만, 이는 '정치적 올바름'을 알리바이로 삼아 사실상 지식의 역할을 방기하고 나아가 그 역할의 공간 자체를 무화시키는 행위다.

 

정리된 상황은 이렇다. '사적인' 공간에서의 발언에 내가 너무 '진지'하게 개입해서 흥을 망친 셈이 되어 버렸다. 페이스북에서 친구들끼리 모여서 누군가에 대해 이런 저런 험담도 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이다. 나 또한 그 '사적인' 공간에서 그 험담을 듣고 있던 '페친' 가운데 한 명이었는데, 이에 대해 내가 정색을 하고 "아무리 사적인 공간이어도 그렇지 말씀 삼가세요"라고 문제를 제기한 셈이 되어 버렸다. 내 입장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1) 사적인 공간에서의 말이기 때문에 너무 진지하게 대하면 안 된다는 말은, 바꿔서 말하면 '농담'을 '진담'으로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만약 계속해서 이 공간이 그분들에 의해 '농담'의 공간으로 주장된다면, 내가 '진담'으로 제기한 문제제기에 대해 이곳에서 논의할 수는 없게 된다. 이야기를 지속해봐야 나는 '농담'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이상이 되기 어렵다. 그리고 그 분들이 내 '진담'에 대해 답변한 내용이 '농담'인지 '진담'인지도 확인할 수가 없다.

 

2) 사적인 공간에서도 말은 가려서 하는게 맞다. 그래서 나는 '선동'과 구별하고자 했다. 만약 '친구들' 사이에 기본적으로 적극성의 차이만 존재할 뿐 유사하거나 충돌되지 않는 입장을 가지고 있을 때 친구들을 '선동'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선동'은 누군가에게 불폄함을 줄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대통령을 욕하는 것과 같은 선동과 달리 한 연구자에 대한 '선동'적 비판은 연구자간의 비평 문화에 관계되는 것이다. 

 

3) 문제제기의 대상이 된 글의 표현들은 일반적으로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쉽게 할 수 없는 '쌍욕' 수준의 비난이었다. 보기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처음에 내가 불편했던 이유는 이것이 현재의 활동이 기존의 (진보적) 학술규범의 내용과 형식에 부합하지 않는 후배 연구자에 대한 이른바 '단도리'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조만간 나도 그와 같은 '단도리'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다는 공포감도 느껴졌다.

 

4) 사적인 공간으로 주장되지만 일반적 의미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사적인 공간과 다른 가장 큰 차이가 페이스북이 '글'로 쓰여진다는 것이다. '말'에 부여되는 책임성이 덜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대체적으로 글보다 말에 덜 신중한 편이고, '말실수'에 대해 사과와 정정의 기회를 준다. 역으로 '글'로 쓰여지는 페이스북 공간은 일반적 사적 공간 보다 책임성이 더욱 기대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글실수'는 일반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5) 마지막으로 페이스북에서 '친구'는 무엇일까? '친구의 친구'는 친구일까? 사실 이게 확장되면 거의 모두가 친구가 되는 법이다. 그렇게 되면 사적인 성격은 허물어진다. 사실 친구가 친구의 글을 공유하면 자연스럽게 관계는 친구의 친구까지 확장된다. 그런 확장은 지금도 페북에서 일상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결국 애초에 페이스북은 사적인 공간을 위장한 공적인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없지만 있는 척을 적당히 수줍게 하기 좋은 공간이기도 하다.

 

* 본래 문제제기의 대상이 된 글 및 추가적으로 주고 받은 내용은 인용하지 않는다.

 

2016-10-16

프레시안에 <유라시아 견문>을 연재하고, 최근 그 묶음으로 책도 출간한 이병한 선생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아는 두 분 선생님께서 페이스북에서 몇 마디 하셨는데, 이에 대해 내 마음이 그다지 편치 않아 몇 마디 적어 본다. 부탁의 말씀으로 이해되면 좋겠다.

 

물론 두 분께서 본격적인 비평으로 제시한 것은 아니고 '잡감' 정도로 제시한 만큼 나도 여기에서 그들 사이에 핵심적 분기를 낳았을 법한 쟁점으로 깊이 들어갈 생각은 없다. 그러나 두 분 선생님이 의혹을 두는 지점과 별도로 나는 그런 의혹을 두는 방식과 이유에 대해서 내 나름의 방식으로 징후를 포착하고 있다. 이는 지식의 탈식민주의적 생산/실천 방식과 관련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쟁점이 매우 중요하다는 판단도 하고 있다. 계기가 주어지면 이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장기적으로 개입적인 글쓰기를 할 계획이다.

 

두 분의 글이 차라리 본격적 토론이나 비평으로 제시되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글은 '설익었다', '거칠다', '자의적이다', '황당하다', '논리의 비약' 등 대체로 '기본이 안 돼 있다'는 판단을 하면서도 본격적인 비평을 진행하지는 않는다. 아울러 누군가 제대로 비평해달라는 요청 또는 기대를 제기하고 있다. 상당히 모순적인 느낌이다. 기본적으로 비평 상대에 대해 자격미달로 규정하는 제스쳐를 취하면서 다른 누군가가 비평해주기를 바라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우선 나는 이런 '비평 아닌 비평'이 적절한가 의문이 들었다. 페이스북이라는 공간이 공/사의 성격이 모호한 공간이어서 '뒷담화'하듯이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기도 하지만, 연구자 사이에서의 상호 비평은 좀더 신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 비판은 모종의 포퓰리즘적 공간에서 자신이 가진 지적 '권위'로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부정하는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부정'이 필요할 때도 있다. 그건 '정치적 선동'의 순간에 그렇다. 페이스북이 그러한 '선동'에 잘 어울리는 공간인 것도 맞다.

 

그러나 연구자 사이의 비평은 성격이 다르다. 연구자들 사이에 미리 '틀렸다'는 전제를 먼저 걸어 놓고, '선동'적 비난을 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다. 마치 선생님들 또는 선배님들이 후배나 어린 학생에 대해 '쟤 안 되겠어'라고 뒷담화하는 느낌을 내가 받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안 되겠어'라고 판단하는 데는 좀더 깊은 진지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이는 앞으로의 가능한 논의의 일부가 될 것이다.

 

두 선생님께서 이 지점을 좀더 솔직하게 드러내며 정확한 비판을 해주기를 바란다. 비판이나 비평까지는 아니더라도 오히려 스스로 어떻게 다른 생각인지를 정리하여 설명하는 것이 논의에 도움이 될 것이다. 연구자로서 우리는 답을 미리 정해놓고 판단 및 규정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자명한 것 같은 답도 뒤 흔들며 의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중화중심주의'나 '반미'와 같은 손쉬운 레테르는 포퓰리즘적 선동에 적합한 자명한 개념규정이지만, 관성에서 벗어나 조금만 다르게 보면 그만큼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지식사상적 테마도 없다. 나는 그렇게 보는데, '현대성'의 문제의식에서 보면 정말 그렇지 않나?

 

나도 이병한 선생을 잘 아는 사람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이라며 글을 시작할 수도 있었다. 사실 아주 잘 아는 사이는 아니다. 그러나 또 아주 모르는 사이도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박사논문 감사의 글에 또래 가운데 유일하게 선생님의 호칭을 붙이기도 했다. 수 년간 여러 차례 이메일로 주고 받은 대화에서 배운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다 동의하지는 않는다. 당연히 그럴 수도 없다. 그러나 하나라도 배울 수 있는 점이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나는 지금도 그의 프레시안 연재에서 여러 가지 시사점을 많이 얻는다. 나 뿐만은 아닐 것 같다. 그것이 논의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제 어느덧 마흔이 되어 선배와 후배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역할도 맡게 될지 모르겠다. 그런데 아직은 변함 없다. 선배 연구자들께서 후배 연구자들의 잘못이나 문제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에 대해 나는 충분히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지만, 그 방식에 대해서는 후배가 선배를 비판할 때 보다는 더욱 신중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먼저 내려놓지 않으면 논의는 시작될 수 없다. 내려놓는 행위는 스스로 공백과 한계를 밝히면서 배움을 구하는 말걸기에서 시작될 것이다. 기존의 관성적 인식과 판단을 유지하는 일은 우리가 하지 않아도 '정치'가 아주 잘 해나가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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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뉴스의 공백

이곳에 오고 나서는 종종 저녁이나 아침에 전날 방송되었던 JTBC 뉴스를 듣곤 한다. 세월호, 정권 감시, 특권 비판 등등과 같은 내부적 이슈와 관련해서 보여준 JTBC의 경향은 때로는 내게 진보적인 것으로 인식되곤 했다.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많은 이들이 주류 미디어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신뢰할 만한 뉴스 채널로 간주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 늘 불편한 구석이 있다. '북조선'이나 '미국' 또는 국제 정세와 관련한 보도에서는 다른 보수적 미디어들과 거의 차별성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적인 것과 국제적인 것이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국내적인 것의 착시 효과를 문제화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한다. 특히 어떤 의미에서는 '신식민'적 조건에서 오히려 언론적 실천의 기준은 '국제적인 것'에서 주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한계의 근원에는 지식사상계의 역할/능력 부재가 있다.

 

암튼 이 문제화가 진척이 있을 경우, 아마도 국내적인 것에서 가려진 것이나 회피된 것들도 비로소 그 자취를 드러낼 것이다. JTBC가 잘 하고 있는 측면 보다 안 하고 있는 측면이 얼마나 관건인지도 드러날 것이다. 무엇인가 아주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정해진 원을 절대 넘지 않는 선에서  선 밖에 존재하는 것들을 안 보이게 할 정도로 원 내부에서의 개입을 진지하고 성실하게 해내는 것이다. 물론 나아가면 이는 JTBC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진보/개혁'의 이중성과 관련될 것이다. 이는 진보/좌익 운동의 입장에서 보면 허약한 뿌리의 방증인 것이고, 권력의 차원에서 보면 강력한 지원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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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공산주의의 인간론

<민족간 평등, 개체의 자유가 소외되지 않는 사회와 세계의 존재형식>

 

우선 존재론적 의미에서 역사지리적 다원주의에 근거한 민족성으로부터 관계적 평등이 도출된다. 이러한 존재론적 전제 하에서 개체의 자유가 비로소 '역동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역으로 보편주의적 사회론에서는 개체의 자유가 '정태적인 것'으로 제약된다. 양자 사이에 지식 작용의 차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공동체간의 관계적 평등은 다원주의라는 원리에 의해 뒷받침된다. 다원주의는 보편주의적 기원론 및 목적론에 비판적이며, 관계성의 맥락에서 상대주의를 실천적으로 극복한다. 이러한 전제 하에서 개체의 자유는 '차이'에 근거하지만, 이 '차이'는 '역사' 안의 차이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외부 모순과 연동되어 내부 모순의 근거가 된다. 이 모순에 근거해서 민중이라는 운동적이고 주체적인 개념이 도출된다.

 

cf. 개체의 자유를 '보편주의적 자유'=인권(권리)론적 자유(계급, 성...)=소유론적 자유로 이해할 경우, 이는 기본적으로 원자화된 개인이라는 철학적 존재론에 의해 뒷받침된다. 이는 관계론과 차원을 달리하면서, 공민(시민)적 자유와 궤를 같이 하고, 정치적으로 대의제(의회제)로 귀결된다. 이와 같은 틀에서 '反특권'은 항상적 주장으로 제기되지만, 이는 여전히 '(평등적) 소유론'에 불과하다. 특히, 지식의 문제와 관련해서 보면, '엘리트주의'와 '포퓰리즘'의 동일성이라는 기제가 핵심적이게 되는데, 이 기제가 작동되는 장역에서 '지식'은 모두의 지식 또는 지식인만의 지식에 머물게 된다. 이러한 원자론적 개인을 전제로한 권리론은 매우 反봉건적이고 현대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현대'라는 가상 속에 인간의 능동성과 주체성을 정지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본래적이면서 다원적인 관계적 존재성을 부정하게 된다. 

 

아마 안티고네에 대한 연극평이 확장되었던 글에서 아마 '역사적 공산주의'를 언급하지 않았던가 싶다. 역사적 '공산'은 바로 관계론적 인간론이자 역사론을 함축하고 있었다. 따라서 관계론적 인간론은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공유의 주체를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에 대한 평등론은 당분간 유보시켜야 할 지도 모르겠다. 평등하게 존재하지 않음에도 평등하다는 '가상'을 제시하는 것은 기만적이고, 평등해질 수 없는 평등에 근거해서 평등을 강제해서는 '자유'로운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평등은 폭력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평등은 개체 간의 관계성을 제거한 채 공상되는 평등인데, 이것이 실제에 적용될 경우 당연히 매우 폭력적일 수 밖에 없다. 인간을 대상화하고 사물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적 공산주의는 바로 '공유'의 대상이 가지는 역사성에 근거해서 그러한 물질성을 둘러싼 내부의 개체간 관계성의 양식을 다시 찾아 재건하는 운동이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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