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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은 중국에서...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고, 역사의 동력 또한 민중의 삶에서 나오지만, 동시에 그것에 구체성을 부여해주는 '민족적인 것'의 역할 또한 불가결한 것이다. 지식은 그 나름의 한계를 가지기 때문에 늘 비판에 겸허한 자세를 취하지만, 또한 동시에 지식의 역할을 통하지 않고서는 민족적인 것이 역사성으로 누적될 수 없다는 점에서 주어지는 사명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이 둘 사이의 균형이 중요한데, 이 균형이 무너지면, 곧 엘리트주의=포퓰리즘이 되어버리고, 이는 나아가 구체적 폭력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사실 작금 우리의 신식민주의적 담론 공간을 구성하는 원리가 기본적으로 엘리트주의-포퓰리즘이기도 하다. 외로움을 느끼지만 이 또한 적절치 못하다.

 

12월은 중국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 것 같다. '제3세계'를 다시 소환하면서 동시에 '일대일로'도 논의하는 한 달여 간의 국제회의 시리즈의 초안이 나와서 정리해 보았다. 나는 3주 정도 참여할 것 같다. 상해 일정 이후에 대만에서의 일정이 일주일 정도 잡혀 있는데, 이 부분은 함께 하지 않는다. 역사적 전환기를 능동적으로 준비하는 회의가 될 것이다.

 

12월 9일 arrival at Guangzhou

12월 10~11일 Guangzhou conference

12월 12~13일 Xuyi conference

12월 14~15일 Nanjing conference

12월 16~19일 Beijing conference

12월 20~23일 Hangzhou conference

12월 24~26일 Shanghai conference

12월 28일 back to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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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2

이토록 '평화'로운 민중총궐기는 명예혁명의 일환이 될까? 그 명예혁명은 누구를 위한 혁명일까? 지난 해 민중총궐기로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는 한상균 위원장의 상황과 지금의 평화로운 집회는 참으로 대비된다. 아마도 정권의 난맥상도 객관적으로 주어졌지만, 주체적 계기는 백남기 선생의 죽음과 희생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계기는 추상적 '국가폭력' 이상의 담론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백남기 선생은 단순히 추상적 국가에 저항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와 백남기 선생은 구체적인 모순으로 고통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과거의 '투쟁'문화와 다른 '시민'의 평화로운 집회를 미디어는 찬양하고 있다. 앞으로도 '폭력' 시위 하지 말라는 경고다. 그러나 우리가 모순이 없고, 폭력적 장치들이 없어서 지금 평화로운 집회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보기에 적어도 지금까지는 여전히 그들의 '정상화'로서의 '민주' 프레임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조직된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민중의 힘이 앞에 서지 못하는 상황 자체의 아래로부터의 변화가 없이 당분간 이 상황은 변화하지 않을 것 같다.

 

지금 진정한 배후의 핵심들이 두려움을 느낄까? 아니면 상황을 즐기고 있을까? 곧 복원될 그들의 '민주'가 어떻게 다시 우리에게 거대한 '폭력'을 행사할 지, 나아가 그 폭력의 합법성을 제공할 수많은 '시민'의 모습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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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식민현대성

인권 및 '정체성identity' 담론은 사실은 '인간'을 여러 차원에서 나누어 놓고 결국 통합하지 못하면서, 결국은 '인간'을 이론적 차원에서 '죽은 인간'으로 내버려 놓았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실천이 바로 '현대성'의 식민주의적 수용의 결과인 듯 싶다. 현대성에서 비롯된 '민주'의 문제와 관련해서 '과학'의 문제도 이렇게 제기된다. 여러 가지 권리와 정체성에 따라 '인간'을 분해해 보는 '이론'적 시도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현실에서 인간은 그렇게 분해된 채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이론은 '현실'의 실천에 결합될 때 하나의 '통합' 과정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사회'를 인식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회를 여러 차원에서 분석하기 위해서 나누어 볼 수 있지만, 사회 또한 역사를 가지는 이상 하나의 유기적 생명체이기 때문에, 결국 개별적 분석은 통합의 과정을 겪어야만 의미 있는 해석으로 제시될 수 있다. 결국 '통합'의 기준에 대한 물음에서 우리는 '역사'의 위상을 논의하게 된다. 지식담당자의 인식행위의 현대화는 대상에 대한 인식론적 분리를 실제적 분리로 착각하게 만들면서, 지식담당자와 대중 사이에 인식론적 격차가 심화된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우리 세대의 경우 역사를 삭제해버리면, 아주 쉽게 답을 얻게 될 것이다. '세계시민주의'와 '세계체계'라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손쉬운 보편-특수 분석 담론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안에서 우리는 동력을 찾을 수 없다. 거기엔 사람도 역사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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