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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폭력 담론의 탈역사성

미류님의 [4.3, 문재인 추념사, 그리고 -] 에 관련된 글.

이제 4.3도 좌/우, 진보/보수를 넘어선 '정의', '민주', '인권' 등의 보편주의적 담론을 통해 적극적 탈역사화의 대상이 되고 있다. 다시 말해 4.3도 신식민/자유주의적 정권과 운동체제에 의해 포섭되는 것 같다. 1987년, 1980년에 적용되었던 보편주의적 탈역사화 민주/자유 담론이 1948년의 4.3까지 먹어치우려는 형국이다. 영화 '1987'은 반공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의 단죄를 통해 더욱 내재화된 자유주의적 반공주의라는 시대적 지배이데올로기를 잘 보여준 바 있었다.

 

희생당한 이들은 아무런 이념적 지향이 없는 '양민'이었다는 탈민중적 접근, 그리고 책임은 당시 있지도 않았던 '국가'에 있다는 탈민족적 접근이 결합되고 있다. '양민'이 없었겠느냐마는 역사 속의 민중이 어찌 양민이기만 했겠는가. 민중을 학살한 우익이 있었지만, 어찌 그들이 추상적 국가의 대리인이었겠는가. 반공주의적 자유주의에게 해방정국이 탈식민을 둘러싼 신식민-제국/자유주의와 민족해방-사회주의 사이의 각축장이었음은 어떻게든 지워야 할 역사였던 것이다.

 

국가폭력이라는 가상, 그리고 구조적 폭력이라는 가상은 '국가'와 '구조' 자체가 가진 추상성/보편성으로부터 폭력의 원인을 찾는다는 점에서 현실을 이론에 환원한 결과물이다. 국가이론 또는 자본주의 구조비판이론, 나아가 페미니즘 이론 등등에서 자동적으로 폭력의 원인이 제시된다. 물론 이는 1990년을 전후로한 가상적 국가화에 의해 완성된 인식론적 전환이 학술이론에  반영된 구체적 표현이다. 그렇게 '폭력'은 탈역사화되고, 동시에 '탈주체화'된다. 그러면 '폭력'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무엇인지, 누구의 것인지 모호해진다. 심지어 지식담론에서 폭력은 이론을 증명하는 사례로 동원 및 이용된다. 때로는 날조될 수도 있다. 있지도 않은 폭력이라도 만들어서 이론을 증명하고자 하는 이론주의는 엘리트주의/포퓰리즘의 동일성에 기대어 어떤 폭력을 과장할 수도 있고, 어떤 폭력을 지울 수도 있다. 특히 우리 상황에서 이론주의는 운동체제와 결합되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진정한 문제는 이론의 규제하에 파악된 폭력과 실제 폭력 사이의 거리가 작지 않다는 것이다. 이론에 의해 파악된 폭력과 그 주체가 '비정상적 개인/집단'이자 사법적 단죄의 대상에 머물게 되고, 그러한 비난과 처벌이 이론적 관점에서조차 구조적 전환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 거리에 있을 것이다. 이는 현실에 대한 이론의 패배라 할만 하지만, 엘리트주의적 이론은 자신의 포퓰리즘적 지지기반을 들어 반성보다는 보완하면 된다는 변명으로 일관한다. 현실에서 잡히지 않는 이론적 '구조'이지만, 이를 내려 놓는 순간 스스로 진정한 현실을 대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식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최악이다.

 

그러나 대중 및 운동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최선일 수 있다. 그럴 것이다. 대중 운동의 관점에서 현실의 모순에 대한 인지, 그것의 해결을 위한 실천은 그 상황하의 지식담론을 참조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역사적 지식의 역할은 그러한 운동에 대한 평가에 있지 않다. 더욱이 운동에의 편승은 비윤리의 극치다. 지식의 역할은 오히려 그 운동이 지식담론을 참조하여 나아간 부분, 나아가지 못하고 막힌 부분에 대한 역사적 성찰을 지식 장역에서 전개하고 축적하는 것에 있다.

 

폭력은 이론적 '구조'에 기인하지 않는다. 폭력은 그것이 폭력적 장치를 경유한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역사를 갖는 사람들 내부/사이의 폭력이다. 보편적 좌/우의 구도는 이론적 산물이지만, 역사적 좌/우의 구도는 역사를 반영한 현실 내부의 힘의 균형을 드러낸다. 결국 역사 안에서만 폭력은 정확하게 인지될 수 있고, 또 정확하게 처리될 수 있다. 조정로의 '민주수업'은 그런 의미였다. 역사 안에 서기 위해서는 실천을 통한 '교육'이 필요했고, 그리고 교육을 통한 윤리 주체의 형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실천을 통한 교육이 가능하려면 교육에 동원되는 사상적 준비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문화대혁명에서는 모택동 사상의 풍부성이 결정적이었다. 

 

결국 사상의 회복이 관건이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사상운동이 전개되어야 한다. 대대적으로... 그럴 때, 폭력은 이론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고, '민주수업'을 통해 궁극적으로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화해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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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해를 회고하며...

뉴욕, 아프리카, 대만을 거쳐 서울로 돌아온 것이 2017년 2월 6일이었다. 그리고 3월부터 새로운 직장에서 일을 했고 이제 1년을 채워간다. 십년 만에 4대보험을 제공하는 직장을 갖게 되었고, XX교수라는 비정규직 타이틀도 얻었다. 그리고 무엇을 했나?

 

설 연휴를 보내며 지난 한 해를 회고해보니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박사학위 논문을 증보한 <사상의 분단>이라는 책의 중문판과 국문판 초고를 마무리했고, 그 가운데 일부를 영어 논문으로 내고, 또 일부는 이런 저런 자리에서 발표를 했으며, 그 연장선에서 제출한 정세비평이었던 <신식민/분단 체제와 민주수업의 불가능성>이라는 글이 중문/국문으로 저널에 게재되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한 걸음도 더 나가지 못했다. 아프리카를 경유한 대륙간 상호참조의 문제의식은 1년전 상태 그대로이고, 박현채 연구 또한 전혀 심화되지 못했다. 인터-아시아의 공백으로서 설정했던 북한에 대해서는 전혀 다가가지 못했다. 오히려 동력을 잃었다는 측면에서 보면 퇴보다. 실천적 지식생산의 의지는 꺽였고, 삶은 역동성을 잃었으며, 인적관계는 위축되었다. 그래서 고민을 담은 단상 조차 쓰여진 바가 거의 없다.

 

이 상태를 유지해야 할 어떤 이유도 찾지 못하고 있다. 유일한 이유라 하면 아마도 돈일텐데, 지금 한번 꺽이면 앞으로 끝 없는 추락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는 강한 위기감이 든다. 결단의 순간이 왔고, 이제 그 결단을 한다. 스스로 삶을 먼저 바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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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우연한 계기로 보게 되었다. 기본적인 메세지는 '반공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의 단죄'로 요약된다. 1980년 광주는 그렇게 다시 반공주의에 의해 억압 받은 자유주의적 가치의 기원으로 소환되고, 내전은 적색테러와 백색테러의 '동족상잔'이라는 이중부정을 거쳐 권력 내부의 '반공주의'의 기원으로 탈역사화된다. 이 또한 냉전에 대한 외재적 극복이 내전에 투사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주선율인 이상 이 영화는 역사적으로 반공주의에 기초를 둔 신식민적 자유주의 권력에게는 조금도 불편함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문익환 목사의 외침과 '그날이 오면', 그리고 화면에서 나타나는 현장의 역동성은 과거의 추억을 가지고 있는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리겠지만, 이는 역사적 희생의 의미와 가능성을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낡은 어떤 것을 극복하고자 했던 2016~7년의 자유주의적 맥락에 가두는 효과가 영화에서도 성공했음을 나타내는 표지일 뿐이다.

희생자들에 대한 예의는 어떠해야 하는가? 주인공의 논리가 지배적 논리를 반영한 현실의 구도로부터 연역된 것이라면, 희생자를 주인공으로 만드는 것이 죽음에 대한 진정한 예의일 수 있을까? 광주, 1987... 세월호까지... 누가 희생자를 입맛에 맞게 주인공으로 만들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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