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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映真 [1937-2016] 선생을 추모하며

 

 

북경/대만 시간 11월 22일 대만의 사상가 진영진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79세의 일기로 삶을 마감했다. 1937년 생으로 박현채 선생님 보다 세 살 아래인 그다. 박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20세기 식민, 분단, 냉전의 당사자이자 그와 같은 대만의 역사에 대한 단절적 인식을 극복하고자 헌신적이고 실천적인 삶을 살았던 사상가다. 한편 내게는 박현채 선생에게 다가설 수 있는 근거지였던 진영진 선생이었다. 나는 내 박사논문에서 이 둘을 당대의 ‘역사적 중간물’로 마주 세웠다.

 

진영진 선생의 문학 작품을 읽기 시작했던 것이 아마 2013년 가을이었던 것 같다. 이듬해 자격고사를 준비하며 그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작품 전체를 한번 통독을 했었다. 이 시기는 이미 대만에서 공부를 하고 생활을 한 지 7년 차에 접어들 때였다. 대만에 대한 공부도 적다고 보긴 어려웠고 관심도 꾸준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대만은 더더욱 실마리를 찾기 어려운 복잡한 대상으로 여겨졌었다.

 

그 즈음에 진영진 선생이 1980년대 중후반에 혼신의 힘과 열정으로 만들었던 《人間》이라는 잡지를 계승한 《人間思想》이라는 잡지가 2012년 창간 되었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다른 친구들보다는 훨씬 늦게 진영진 선생의 작품을 읽기 시작했다. 사실 당시 우리 써클에서 진영진은 점차 하나의 공통 언어가 되어 가고 있었지만, 나는 여러 핑계를 들어 거리를 두고 있던 참이었다.

 

그리고 아마 그즈음 나는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박현채 사상을 주제로 정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실행가능하려면 반드시 대만이라는 근거지가 필요했다. 그 기대를 품고 진영진 선생의 문학 작품을 읽어나갔다. 그리고 나는 여러 번 가슴 뛰는 경험을 하면서 비로소 ‘대만’을 일방적 타자가 아닌 대화적 관계에서 다가갈 수 있는 출발점으로서 초보적인 상호참조의 범주를 추출할 수 있었다. 그것은 식민, 분단, 내전이라는 범주로 개괄되었다. 그래서 나는 박현채 선생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다시 박현채 선생도 내개 ‘남한’ 그 자체로 간주되었다. 진영진 선생이 곧 대만이었던 것처럼. 그만큼 둘 다 역사적 중간물로서 곤혹과 긴장과 치열함을 넘치도록 간직하고 있었다.

 

사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진영진 문학작품을 번역하며 평생을 살아도 안타깝지 않겠다는 생각까지도 했었다. 그의 문학 작품은 대만의 단절된 역사를 다시 이어주기도 하지만, 초기부터 후기까지 그의 작품 모두 사실상 남한 지식사상계를 향한 선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는 주로 소설가로 알려져 있지만, 미술에도 조예가 깊었고, 80년대를 대표하는 잡지를 만들어 발행하기도 했으며, 대만 좌익/통일계열의 정치가이기도 했고, 대만 사회성격논쟁을 제기한 사회과학 연구자이기도 했다. 그의 삶의 궤적은 이와 같이 사상가적 면모를 물씬 풍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사상이 그의 문학에 가장 충실하게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 현재 국내에는 진영진 선생의 마지막 소설집 《충효공원》(문학과지성사, 2011)에 실린 세 편의 중편과 중국현대문학전집에 실린 단편 <야행화차>만 번역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초중기 역사구도를 정립하는 작품들, 그리고 신식민적 지식문화를 풍자한 작품들, 특히 출옥 이후 나온 워싱턴 빌딩 시리즈와 백색테러 시리즈 모두 어서 빨리 한국어 번역으로 우리 지식사상계와 만날 수 있게 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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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의 의미...

 

김진 논설위원이 문제를 제기했었던 모양이다. 내 고민과 맥락은 다르지만 고민해볼 필요는 있다.

 

100만... 2016년의 100만은 1987년의 100만과 어떻게 다를까. 통계적 근거는 없지만 1950년의 100만 또는 1945년의 100만과는 어떻게 다를까.

 

지금 100만은 성인인구를 낮게 잡아 4000만으로 놓고 봐고 2.5%에 불과하다. 중고생들이 포함되어 있으니 실제로는 2% 남짓으로 봐야할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통계적 비율이 낮다고 의미가 반감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갖는 대표성일 것이다.

 

나는 80년대의 '민주화'를 포함해서 그동안 고귀한 희생은 반복적으로 있었으나, 우리가 진정 진보의 길로 걸어왔는가에 대해서는 강한 의구심을 가진다. 게다가 나는 이 과정에 대해 자화자찬하는 '민주화 담론'을 역사적 단절을 기반으로 한 신식민체제의 담론적 완성으로 이해한다. 앞서 다른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 자율성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의 모순이 열어제끼는 대중적 공간은 변혁적 운동과 지식이 대중적으로 조우하고 소통되는 장소여야 하는데, 해방 이후의 전반적 추세는 지식 작용의 소멸과 쇠퇴의 과정이었다. 2000년대 이후의 여러 '촛불'들은 이러한 모습을 매우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노골적 '탈지성화/반지성화'가 사실은 신식민주의적 '보통교육'의 안정화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제약조건을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분단 하 변혁적 '당'의 불가능성이라는 문제가 그렇다. '당'이 없는 우리들의 조건은 지식과 대중 사이에 접점을 갖지 못하게 한다. 우리 나름의 실천/조직 양식을 창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권역적 국제주의'는 아마 이 문제를 감당하기 위한 하나의 담론적 실험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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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6

유럽적 현대성의 현대적 구심으로서의 미국에서 뉴욕은 아마도 그 중심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그 미국의 쇠퇴가 이미 분명해지고 있지만, 관성은 여전히 남을 수 밖에 없는 법이다. 학술사상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국 중심의 학술체계는 아마도 다른 곳에서 먼저 무너질 것이고, 이곳은 아마 나름의 방식으로 조정을 받다가 주변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지만 옆에서 드는 느낌은 이들도 스스로 '말빨'이 서지 않음을 속으로 느끼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아마도 더 확실한 것은 직감이긴 하지만, 어떤 '무기력'이다. 전성기의 미국이 본래 가진 거품이 빠지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능동적으로 전환을 만들어내지는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가진 좁은 접촉에서 얻어지는 것이지만 무엇인가 일시적 충동을 넘어서 원대한 희망 가지고 미래를 능동적으로 만들어가는 열정과 동력 같은 것들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처음부터 하나의 전체로서의 그런 느낌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제3세계의 이론과 사상이 교차하는 지점으로서의 뉴욕 내지 콜롬비아 대학을 상상했던 것인데, 이 점도 다소간 예상과는 다르다. 기본적으로 전성기 미국의 학술체제로서의 서구적 현대성과 국민국가적 지식(그것에 대한 '철학'적 비판으로서의 '후'식민주의를 포함)의 틀 자체의 주도성은 여전히 강력하게 관철되고 있기 때문에, 제3세계의 문제의식은 제도적으로는 기존의 틀 안에 '포용'될 뿐이다. 역으로 제3세계적 문제의식에서 이와 같은 '국민국가'적 틀이 가진 자원을 활용할 가치가 있기 때문에 공존이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어찌됐든 나는 이러한 조건에서 내 자리를 찾기가 어려워진다. 이른바 '인터-아시아'는 뉴욕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고 할까? 중국, 대만, 한국 등등으로 분절되어 있는 학술지식체계로 들어가지 않으면 접점 자체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한국'은 제3세계가 아니라는 가상이 미국에서는 더욱 강력한 것이다. 그러면 그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방청하면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사실은 그런 가능성도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근에 더욱 확실하게 느끼게 된 것이지만, 그런 방식이 '여유'로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지식작업자로서 '삶'의 물질성을 박탈당한 이 느낌이 불편해진다.

 

본래 민중은 자신의 터전에서 떠나면 땅에서 뿌리뽑힌 식물처럼 말라 죽게 되어 있다. 민중은 어떤 의미에서 아주 강한 보수적 힘을 내재하고 있다. 그것은 바꿔 말하면 역사의 힘이다. 그런데 지식인은 기본적으로 '뿌리뽑힘'을 감당해야 하는 역할을 맡게 되어 있다.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 것일까? 생산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는 지식작업자의 특수한 삶의 양식은 윤리적 책무를 부여한다. 즉 '뿌리뽑힘'은 뿌리박은 자들을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뿌리뽑힘' 자체가 늘 양가적이다. 민중의 양가성과 유비된다. 뉴욕으로 온 것은 한번의 뿌리뽑힘이었는데, 여기에서 말라죽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식사상적 '접목' 같은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뉴욕이 그런 공간은 아닌 것 같다. 뉴욕 스스로의 뿌리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보이는 의미있는 사상들은 뉴욕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다.

 

그래서 모종의 작은 결심을 하게 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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