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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긴장이 풀려서였을까? 몸을 사리지 않았더니 바로 감기가 왔다. 한국에서도 일년에 한두 번 걸릴까 말까한 감기가 이 곳에 온지 한 달도 되지 않아서 걸렸다. 다소 만만치 않은 놈이어서 조금 고생했지만, 적응의 신호라고 긍정적으로 읽는다.

 

'적응'은 사실 많은 것들에 대한 이해를 잠정적으로 포기함을 댓가로 한다. 적절한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지는 것이 적응이다. 미국, 특히 뉴욕이라는 곳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지만, 우선 이 정도로 이해해두자는 개인적인 판단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감기는 예견되었던 것이다.

 

어떤 중심성/대표성을 가진 뉴욕의 지적 담론은 국가/국민/세계시민의 틀을 기반으로 한 담론이 주도적일 것이라는 예상을 해 봤다. 그런데 사실 뉴욕에서의 담론적 발화 자체에 대한 사려 깊은 넉넉한 관심을 가질 수 없었던 나였기 때문에, 짧은 기간 뉴욕으로부터의 발화에 대한 나의 수용은 체감에 좀 더 기댈 수 밖에 없었다. 짧았지만 체감은 일정한 축적을 이루었고, 이는 적응의 근거가 되었는데, 그 주요한 두 원천은 브롱크스, 할렘, 콜롬비아 대학으로 이어지는 등교길에서의 다양한 장면과 조우, 그리고 콜롬비아 대학 내에서의 사뭇다른 풍경들이었다. 대단한 체험은 아니었더라도 적응의 근거는 되었던 것 같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지하철과 길거리에 구걸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이다(이를 panhandler라고 부르는 모양). 그 방식도 다양한데 히스패닉 계의 어떤 아저씨는 만돌린 같은 악기를 가지고 지하철 안으로 들어와 연주를 하고 돈을 받아 갔고, 어떤 중년 흑인 여성은 성악가와 같은 목소리로 찬송가를 불렀으며, 우리 지하철과 유사하게 자신의 처참한 상황을 쪽지에 써서 돌리는 경우도 있었고, 버스 정류장에서는 무작정 돈을 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맨 마지막의 이 경우가 가장 많다. 심지어 돈을 안주면 큰 제스쳐를 취하며 욕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은 이른바 '유색인종'들이었고, 흑인이 대다수였다. 

 

대도시가 그렇듯이 뉴욕 또한 왜곡된 계급/계층 구조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자립성이 없으니 충격에 취약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도시인데, '자본주의'는 도시가 마치 자립적인 것 처럼 이야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윤이 마치 경영자의 노력에 의한 것처럼 이야기 되어야 하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삶을 꾸려가려는 사람들의 의지와 노력은 구조와 대결하거나 구조의 외부에 자신의 삶의 공간을 구축하는 것으로 이어져 왔을 것이다. 그것이 전혀 역사적 계보 없이 돌발적으로 발생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이는 문화 연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도시의 원천적 제약인 비자립성은 지속된다. 도시는 본래부터 교통/매개의 장소가 아니었던가? 물론 도시는 지식이 매개되는 장소이기도 했다. 결국 도시를 형성하게 했던 그 농촌들의 존재성에 대한 해명 속에서 도시의 역할 및 도시인의 삶을 가늠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뉴욕 또한 그런 기본 틀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지만, 거기에 '제국주의' 미국의 문제가 추가된다. 특히 지식이 매개되는 장소로서의 도시의 측면에서 보면 '제국주의'의 문제가 뉴욕의 지식 성격에 결정적인 듯 보이기도 한다. 이는 서울과 어떻게 같고 다른가? 여의도는 어떤가?

 

그래서 뉴욕에서 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하위 단위에 대한 이야기는 당연히 단골 소재가 된다. 그것이 제국에 대한 저항이나 비판이라고 해도 뉴욕은 이를 포용한다. 특히 콜롬비아 대학은 이와 관련하여 지적 정점에 있지 않을까? 매일 열리는 '세계'에 대한 다양한 발표와 논의들은 참으로 '뉴욕' 답다. 이 공간의 지적 유효성 자체를 기각하기는 당분간 어려울 것이다.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책임감을 발휘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러한 무거움의 이면은 가벼움이기도 하다. 제국주의의 왜곡이 낳은 산물이라 할 수 있는 것인데, 이러한 지적 담론과 뉴욕 사람(민중)의 생활이 조응되지 않는 어떤 현실이 문제적이다. 물론 이 현실만이 현실성의 전부는 아니다. 적응 이후의 생활은 아마 그러한 세계에 대한 관심이 되지 않을까.

 

몇 가지 관심사가 정리되는데 아직 전개할 능력이 안 된다.

- 미국/뉴욕이 '세계'를 해체하는 과정, 그리고 권역적 참조체계를 형성하는 과정은 어떤 것?

- 권역적 참조체계 없는 미국에 대한 직접적 탈식민화 주장의 낭만성(엘리트주의)

- 제3세계 현대사상이 미국에 참조점이 될 수 있을까. 관성의 문제...

- 溝口 선생이 제기한 '기체'는 미국에 원용 가능한가? 그 조건은...

 

마지막으로,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고 가정되고, 그에 따라 뉴욕 또한 그 연결고리의 하나라고 주장될 수 있지만,  나아가 뉴욕의 지방성 또한 그러한 연결망 속에서 재해석될 수 있다고까지 이야기된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처음부터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가정에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뉴욕과의 관계는 주체적으로 재설정되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가정에서는 위에서 아래로 지도를 보는 듯한 구도설정이 전제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보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지도는 주어져 있지만 또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다원적인 관계망 속에서 입체적으로 또 운동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 까지 써 놓고 보니, 사실 감기가 다 나은 것은 아니었다는... 힘이 부쳐 결론까지 끌고 가지 못하지만, 본래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뉴요커'들은 서로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나는 그들과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뉴욕은 단지 매개의 공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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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이제 보름 정도 되었다. 콜롬비아 대학이 아이비 리그에 속하는지, 그리고 뉴욕에 있는 지도 몰랐던 나의 뉴욕/콜롬비아대학 생활은 이렇게 적응되어 가고 있다. 아직은 이방인으로 여러모로 낯설고 호기심도 생기고 또 여러가지 독단적 억측도 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말은 아직 잘 안 들리고 잘 나오지도 않는다. 처음 중국 가서 천진에서 공부할 때 3개월 정도 있었을 때 갑자기 들리기 시작했던 것처럼 그 순간이 오기를 고대할 뿐이다.

 

오기 전에 여러 요구와 기대에 둘러싸여 있던 관계로 부담감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외부의 요구와 기대는 여전히 외재적인 것일 뿐이었다. 그것이 나 자신의 내부로 들어오면 재전화될 수 밖에 없다. 며칠 전부터 전체적인 생활을 기존의 내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재편하고 있다. 기간의 이런 저런 요구들은 추가적인 것으로 판단되었다. 우선은 주어진 과제들을 조금씩 수행해 가면서 생활의 물질성을 만들어가고, 그런 가운데 미국/뉴욕/콜롬비아대학이라는 현실과의 접점을 모색해보려고 한다. 접점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1년이라는 시간, 방문학자라는 신분 모두 큰 제약 요인이다. 그렇다고 무리할 수는 없다. 민폐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문을 다시 꺼내 들게 되었다. 마침 9월 28/29일이다. 박현채를 빨리 잊고 다음 작업을 하기로 했던 상황은 조정을 받게 된 셈이다. 영어판 작업도 일부 진행하기로 예정되어 있다. 물론 청강은 청강대로 하면서 권역간, 3대륙적 참조를 위한 분위기 적응은 계속하게 될 것 같다.

 

* 파타 차터지 선생님은 확실히 '대가' 급이다. 직접 강의를 들어보니 전리군 선생과 유사한 측면이 많았다. 군더더기 미사여구가 없는 진솔한 화법이면서도 매우 명확한 논리로 문제틀을 제시한다.

** 뉴욕의 생활 조건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서울 보다 안 좋은 느낌이다. 그러나 북경이나 천진 같은 느낌도 많이 든다. 이 점은 좋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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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과 빈곤

현재로서는 원리적으로 밖에 설정되지 않지만 제3세계적 권역간/대륙간 상호참조를 기반으로 한 탈식민주의적 세계변혁의 사상에서 박현채 사상과 진영진 사상을 권역내/상호참조적으로 조망할 경우 다음과 같은 초보적 정리를 얻게 된다.

 

식민지 하 민족해방의 주체성을 분유하고 있는 남한의 박현채는 식민의 연속으로 신식민을 인식하면서 문제해결의 주체적 면모를 드러낸다. 이는 신식민 남한의 개별적 특수성에 대한 해명으로 전개된다. 이 때문에는 박현채는 '제3세계'라는 참조점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성이 신식민적 전환 속에서 소통불가능하게 되면서, 단절의 문제를 제기한다. 특히 신식민성의 핵심은 가상적 국가화와 가상적 현대 지식주체 및 지식-대중관계의 형성에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모순이 폭발한 1980년대에 '사상적 단절'에 대한 고민이 심화되면서, 징후적으로 '문학'에 대한 사유로 나아갔다. 이는 소통 언어의 '빈곤'이라는 사유였다. 즉, 주체성의 확신에서 출발했던 박현채는 사상의 단절을 마주하면서 언어의 빈곤으로 사유를 심화해 나갔다. 그리고 가상적 국가화를 문제화하는 '분단-신식민'의 사유를 심화했다. 그러나 언어의 빈곤은 기본적으로 상호참조적 관계망을 통해서 역사 및 현실에 대한 재인식을 통해서 극복 가능한 만큼 박현채의 문학비판은 단초로서의 의미를 가질 뿐이다. 이러한 단초를 계승하여 문제의식을 심화/확장할 때, 박현채의 사상에서 추상적으로 남아 있는 다원주의적 세계변혁의 전망을 주체적 실천 속에서 구체화할 수 있을 것이다.

 

할양으로 식민화된 대만은 중국 대륙과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비주체성'이 국민당이 접수한 반식민지 시기에 일정하게 극복되었지만, 다시 분단-신식민으로 전환되면서, 비주체성이 다시 부활한다. 진영진은 신식민하 대만의 개별적 특수성을 역사/전통의 문제의식에서 식민성의 지속과 식민주의(현대주의)적 왜곡의 심화로 제기하였고, 중국 대륙과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비주체성'과 신식민적 대만의 개별적 특수성에 대한 천착에서 주어지는 주체성이 공존하는 시기를 거쳐, '비주체성'의 측면을 상수(원칙론)로 전제하면서, 사상적으로 신식민적 대만의 개별적 특수성 인식의 심화를 위한 노력을 전개한다. 대만의 개별적 특수성의 핵심은 분단-할양의 맥락에서 연속된 '비국가성'이며, 이는 대만의 가상적 '국가화'를 근원에서 제약했고, 이러한 '비국가성'은 상대적으로 관계성에 근거하여 역사적 변동을 더욱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되는 조건이 된다. 이 맥락에서 진영진은 '사상의 빈곤'을 제기하며, '정치경제학'에 천착하고, 종속이론 및 남한의 사회구성체론(민족경제론) 등 제3세계의 사상을 적극적 참조점으로 삼는다. 진영진은 중국 대륙과의 관계에서의 전략적 비주체성과 신식민 대만에서의 실천적 주체성의 입장을 취했는데, 상호참조적 사상형성에서 실천 양식의 역사적 단절을 인식했을까? 진영진에게는 아마도 권역간, 대륙간의 문제의식이 부재했을 수도 있다. 이는 모종의 단절에서 온 것이거나, 아니면 새롭게 인식해야 할 사상과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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