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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玄埰 잊기...

더욱 폭 넓은 정세적 맥락 속에서 주어진 요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나름 매듭을 짓고 한 발 더 내딛을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 이 요구는 나로 하여금 박현채 사상에 대한 연구 작업을 매듭 지으라고 하고 있다. 나는 박현채 사상에 대한 천착이 오히려 박현채 사상을 개인적 사유私有로 가두는 위험을 경고하는 것으로 이 요구의 의미를 이해했다. 

그래서 곧장 중문판 출간 준비를 시작해서 단기간에 마무리 짓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로 했다. 이는 박현채 선생과 그의 사상에 대해 최대한의 예의를 갖춘 마무리 작업이 된다. 박현채를 잊는 것이 박현채의 사상적 지향에 부합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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余華가 그랬어?

藝術人生님의 [2016/01/31] 에 관련된 글.

사례가 하나 더해지면 해석은 좀더 풍부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례의 반복은 오히려 문제제기의 힘이 부족함을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면서도 사례의 반복 자체가 주는 긴장감은 좀더 다른 방식으로 생각을 해보게 만드는 것 같다. 그래서 몇 글자 적는다. 식민주의적 '자유주의'라는 문제를 던져 보고 싶은데... 쉽게 되지는 않을 것을 알지만 한번 꺼내본다.  

 

'余華가 그랬어?' 

 

엊그제 "루쉰이 그렇게 말했어..."라는 余華의 말을 인용하고 "JTBC가 그렇게 말했어"라는 희망으로 이를 변주한 JTBC 손석희의 앵커 브리핑을 두고 "余華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라며 오류를 지적하는 '중국 전문가'적 문제제기가 있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余華는 "루쉰이 그렇게 말했어..."를 어떤 "맥락"에서 했는지, 그것을 주관식이든 객관식이든 정확히 이해하고 답하는 것이 우리의 공부법이다. 그래서 당연히 여화가 말한 "노신"은 "비이성적인 시대의 권위의 상징"이라고 정답을 제기하며  JTBC의 인용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 모범생들이 나타나기 마련인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러한 '상식'적인 답안과 그 답안에 근거한 오류 지적은 상당한 이념 및 가치 지향성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이념 및 가치는 대중적 담론 수준에서 매우 지배적이고 주류적인 지위를 갖는 것이다. 예를 들어 '권위'와 '비이성'에 대한 비판이 갖는 정당성이 그렇다. 나와 동료들은 이를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불러왔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지식인의 포퓰리즘적 추구가 현실인식과 역사인식에서 얼마나 큰 실천적 제약으로 작동하는지 논의해 왔다.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지식은 기본적으로 역사성이 부재한 식민주의적 자유주의 지식에 머문다. 올바름의 기원이 우리 안에 있지 않고 나아가 정치경제적으로 매우 계급편향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우리가 숭배하는 '민주화' 담론과도 관련된다...

 

그래서 이는 단순히 인용의 오류 차원을 지적하는 것을 넘어선다. 그런데 더욱 큰 문제는 그러한 문제가 전문가주의적 '객관성'에 의해 위장되어 적절히 논의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중극 전문가는 다소 '순진함'을 가장하며 '인용의 오류'만을 지적했을 뿐이라고 강조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현실에서 그러한 '상식'의 재확인이 갖는 기존 담론 질서의 재생산 효과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JTBC가 살짝 열어 놓았던 가능성은 오히려 전문가에 의해 닫히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모종의 재확인 절차를 거치는 것 같다. 그 핵심은 '비주체성'과 '타자화'다. '권위'와 '비이성' 비판이라는 또는 '자유'와 '이성'이라는 빈껍데기 '자유주의의 가치'만 남았다는 점에서 '비주체성'을 확인한 것이고, 나아가 이러한 빈껍데기로 '중국'을 다시 한번 타자화했던 것이다. 특히 문혁에 대해서 다시 한번 '권위'와 '비이성'이라는 범주로 가두는 '포퓰리즘'적 전문가주의였다.

 

사실 余華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아니 오히려 그렇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JTBC가 그렇게 말했어"라고 역변주한 것은 그것을 JTBC가 의도했던 안했던 간에 오히려 余華의 이념적 보수성과 魯迅(및 毛 주석)의 역사적 정치성 사이의 모순을 논의하고 나아가 우리 내부의 '중국 인식'을 교정할 수 있는 시야를 발견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문혁에 대해서 '비이성', '권위', '비민주' 등으로 개괄하려는 중국에 대한 이른바 식민주의적 자유주의의 시각은 이미 '전문가'주의의 외피를 쓰고 우리 지식 담론 안에 깊이 침투되어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이들 전문가적 지식(인)은 '정답'에 따라 기존의 구도를 안정적으로 재생산하려고 노력 중이다. 그것이 정치와 관련되는 한 이러한 노력은 사활을 건 싸움인 셈이다. 

 

첨언)

 

1) 전문가주의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원전주의'다. "余華가 이렇게 말했어"라고 해석의 가능성을 막는 전문가가 내세우는 하나의 원전. 그리고 노신을 문학으로 유폐시키고자 했던 여화의 또다른 원전주의. 이 두 가지 원전주의는 식민주의와 현대주의의 실천적 표현인 듯 싶다.

 

2) 문혁 인식을 포함해서 종국적으로 '중국' 자체에 대한 인식의 개방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지금과 같은 시대적 전환기에는 더욱 긴급한 요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치현실 뿐만 아니라, 지식담론의 현실도 매우 척박한 상황임을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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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요구

없는 길을 억지로 만드는 것은 주변에 민폐가 되기 쉽고, 만들어지더라도 사적 소유의 논리에 구속되기 쉽다. 그래서 논문을 써 놓고도 나는 길이 막혔음을 인정하고 다른 길(생활인으로서의 길)을 찾고자 했다. 그것이 주어진 정세 속에서 오히려 주체적인 선택이 됨을 그동안의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를 쌓이는 만큼 내려 놓는 행위라고 생각해 왔다. 사실 지난 10여년 동안 그렇게 내려 놓는 만큼 새로운 길이 열렸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길이 막혔는지의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게다가 길이 막혔다는 인식은 정세적인 것일 뿐, 고정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미래의 길을 열기 위한 우회로로서 다른 길을 찾았던 것이다. 물론 우회로는 머나먼 길이 될 수 있고, 짧은 내 삶에서 우회의 의미가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유치했던 일정 기간을 거치고 나서 나는 이에 대해 아쉬움을 크게 갖지 않아 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늘 언제든지 다 내려놓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다소 추상적 수준에서 또는 원리적 수준에서 막힌 길을 여는 노력을 권역적 국제주의에 근거해서 진행할 수 도 있다는 인식을 가진지는 좀 되었다. 내부의 자발적인 민간 동력이 역사가 중지되기 전까지는 하나의 전제처럼 존재한다는 의미를 관계성의 맥락으로 확장하면 민간 동력의 상호확인 또한 민간간의 권역적 국제주의의 맥락에서 가능해진다는 의미다. 특히 이 맥락에서 지식(인)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정세적인 차원이라고 하더라도 이번에 길이 닫혔다고 판단했던 것은 나의 오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판단할 수 밖에 없는 조건에 처해 있었다. 지금은 다시 길이 열리고 있다. 그동안의 경험과는 다소 상반된다. 늘 닫힌 상황을 인정하면서 목표를 수정하고 사적 소유화의 유혹을 뿌리쳤을 때 얻어졌던 새로운 길의 열림과는 상반되는 경험을 하고 있다. 지금은 오히려 길이 막혔다는 비관적 인식을 수정할 것을 요구 받고, 이에 따라 역으로 자기 소유(사적 소유화의 가능성은 늘 남아 있다)를 가지고 확장하며 나아가 공적 나눔의 성과를 만들어내라는 요구에 직면해 있다.

 

이 상황은 원리적으로 나의 논리과 같은 것이지만, 현실에서 나는 거의 처음으로 수동적이게 되는 느낌을 갖는다. 최근 나의 진로와 관련된 초보적 결정에서 나는 발언권이 없었거나 원리적 차원의 수긍 이상을 표현하지 못했다. 하나의 전환점임이 분명하다. 과거에는 지식 차원의 사적 소유를 거부함을 통해서 처음부터 자신의 책임성을 최대한 제한하는 소극적 실천에 머물렀다면, 이제는 소유의 논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에 참여하며 직접 맞붙어 싸우면서 민족민중적 지식생산에 복무하는 적극적 실천의 요구를 부여 받고 있는 것 같다.

 

암튼 지금 나의 수동성은 문제적이다. 과거의 소극적 실천 방식에 익숙한 내가 필연적으로 경험할 수 밖에 없는 곤혹이다. 이 수동성이 지금 주어진 길 열림의 상황을 계기로 적극성으로 전환될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이는 다른 의미에서 길 열림을 주체적으로 다시 열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고 보니 이는 정말 거대한 요구가 아닌가. 이제는 정말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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