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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비우자.

더 비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조금더 고독해질 필요가 있다.

단순히 자산이나 권력 또는 권한을 내려 놓는 것이 비우는 행위는 아니다.

그것의 성격을 바꾸어 관계의 조정을 동반해야만 진정 비우는 행위가 된다.

그렇지 않으면 겉으로 보기에 비우는 행위이지만, 오히려 더 채우는 행위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불필요한 겸양은 삼가해야 한다.

그러나 긴 호흡을 위한 최소한의 자기 보호는 여전히 필요하다.

그 기준은 최종적으로 나 스스로 정한다.

옳고 그름은 역사에 맡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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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30

마르크스가 이른바 <자본론>의 구상을 미완으로 남긴 것은 아마 역사적 시대적 한계로서의 시좌의 제한 때문이었던 측면에 큰 원인이 있을 것이다. 당연히도 마르크스의 사상 또한 그 시대를 넘어설 수도 없었고, 그 지리적 한계를 넘어설 수도 없었다. 그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일정하게 이론적으로 비판적 계승이 가능하다면 당연히 후대에 가능할 것이고, 또한 유럽이 아닌 '제3세계'에서 가능할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추론이다. 더 나아가아서 마르크스 사상 자체가 상대화되면서 자기 자리를 찾는데도 이러한 작업이 불가결하다.

 

물론 지금 상황이 이미 진행되고 있는 과정에 대한 이론적 인식의 부재일 수도 있기 때문에, 실제로 그것이 좌절되었다고 판단하기는 이르다. (반)식민지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은 앞선 역사적 지리적 한계를 넘어서는 시도였기 때문이다. 그것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가장 중요한 자원은 중국에게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이론적 추상화는 꼭 중국에서만 이루어지지도 않고, 오히려 중국이 아닌 곳에서 이루어질 가능성도 높다. 나아가 중국을 넘어선 그것의 내재적 발전의 장소는 중국이 아닐 수도 있다. 특히 내가 보기엔 조선의 의미와 역할이 중요할 수 있다.

 

그 자원은 어떤 것일까? 아마도 어쩌면 '사회주의 자본론', 또는 '사회주의 경영학(관리학)' 등과 같은 것이 아닐까? 사실 '자본' 또는 '경영학'에 대한 좌파 이론진영의 알레르기 반응은 매우 '유럽'적이다. 다시 말해 '즉자'적이고, '자폐'적이다. 한마디로 무책임하다.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이 스스로 단일한 논리체계를 의도하지 않으면서 현상적인 관계 이상까지 나아가지 않았던 개방성이 훗날 민족경제론의 발전으로 되었다면, 아마도 위와 같은 방향에서 이론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이미 민족경제론에는 여러 단초들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자본주의 경영학과 달리 (반)식민지 경험을 가진 나라의 사회주의 경영학은 기본적으로 사회조직원리의 창신을 시도해왔고, 그 역사적 바탕에 다원적 전통을 기반으로 한 반제국주의적 민족주의운동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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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을 마무리하며...

이제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내용과 구성에서 앞뒤가 조정되지 않았던 문제들이 대강 해결되면서 결론 부분의 내용이 명확해졌다. 초고는 번역되지 않은 부분을 번역하면 곧 마무리되어 나올 것이고, 이번 학기 중에 심사를 받으면 기나긴 박사 학위 과정은 끝난다. 

 

7년이라는 시간에 비추어 보면 참 부족한 논문이겠지만, 나를 둘러싼 여러 요구들과 내 나름의 기준에 맞춰 내용을 충실하게 만들고자 노력하면서 얻은 성과이기 때문에 아쉬움은 크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추후의 작업들의 필요성과 의미가 더욱 명료해진 점이 이 작업을 아쉬움 속에서 끝내면서도 더 큰 기대를 갖게 만드는 것 같다.

 

7년이라는 시간 동안 여러 계기들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진광흥 선생님의 자극이 가장 컸던 것 같다. 진광흥 선생님은 내게 공부의 문제를 삶의 문제로 인식하게 해 준 큰 스승이었다. 그래서 논문도 사실상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답으로 제시되었다고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큰 다짐으로 논문을 내놓는 것이다.

 

논문도 그렇고, 내가 할 수 있는 역할도 매우 미미하겠지만, 그 답을 찾는 과정 속에서 나 스스로 조금은 성숙했다는 자부심을 갖는다. 그러나 진실로 이제부터 시작인 셈이다. 

 

갑자기 두 번째 자격고사를 치르던 2014년 이른 여름, 도서관에서 답안지를 적던 나를 한참 울게 만들었던 진영진의 소설 <구름>의 여주인공의 다음과 같은 일기 속 문구가 떠오른다.

 

지금 나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마음 속에 누군가에게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내가 진지하게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과 일들에게, 나는 말하고 싶어. “감사해요.”

회사와 공장의 사람들과 생활이 더욱 따뜻해지고, 더욱 우애가 있도록 만들기 위해, 사심이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나는 말하고 싶어. “감사해요.”

노동자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지지해주고, 그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일어나 말할 수 있도록 도와준 회사에 대해, 나는 말하고 싶어. “감사해요.”

이렇게 좋은 회사, 이렇게 좋은 노동자가 함께 생활하고 일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의 국가와 사회에 대해, 그리고 다른 국가와 외국의 사람들에 대해, 나는 말하고 싶어. “감사해요.”

타인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게,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1]   

 


[1] 陳映真, 「雲」, 『陳映真小說集4: 萬商帝君』(台北: 洪範, 2001), 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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