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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비 포켓]과 중력의 영

여성영화제에서 [여성 애니메이션의 새물결]을 봤다.

무려 14편의 단편 애니메이션이 한꺼번에 지나갔다.

하나하나를 천천히 다시 봐도 부족할 작품들을 한꺼번에 보느라고 끝나고 나왔을 때는 정신이 없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에 하나.  사라 콕스 감독의 '헤비 포켓 Heavy Pocket'

일단, 작품 소개는 여성영화제 홈페이지에서 인용.

 <헤비 포켓>은 중력을 잃어버린 한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 애니메이션이다. 처음에는 엄청난 능력에 당황하는 아웰 존스. 그녀는 학교에서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유일하게 아웰의 언니만이 그녀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능력을 알고 있다. 그러나 학교의 깡패들하고 대면했을 때, 그녀의 감추어진 비밀이 드러나게 되고 학급 친구들은 그녀가 공중에 뜬다는 사실에 대해 엄청나게 놀란다.

정확히 말하면, '중력을 잃어버렸다'라는 표현은 잘못된 표현이다.

힘은 물체와 물체 사이의 상호작용으로서 잃어버릴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질량을 가진 물체라면 지구로부터 무한한 거리만큼  벗어나지 않는 한, 지구와의 상호작용을 의미하는 중력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영화에서 아웰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으면 둥실 떠오른다. 그래서 항상 무거운 가방을 짊어짐으로써 바닥에 발을 붙인다. 단지 풍선처럼 떠오르는 것은 중력으로부터 벗어난 것이 아니다. 중력장 내에서 지구와 멀어지는 방향으로의 약간의 가속운동을 한 것에 불과하다. 물론 그 운동의 원인(풍선의 경우라면 공기에 의한 부력)은 중력과는 별로도 규명되어야 한다. 

 

만약 정말로 지구와 아무런 상호작용도 하지 않게 된다면, 그 순간 아웰은 지구의 엄청난 자전속도 그대로 우주공간으로 튀어나가야 한다. 따라서 현실적으로는 아웰이 '중력을 잃어버렸다'는 것보다는 아웰이 어떤 알 수 없는 원인에 의해서 풍선처럼 공기보다 작은 밀도를 갖게 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쓸데없는 딴지 걸기는 여기까지.

영화에서 아웰은 왕따다. 아웰은 다른 아이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아웰에게 걷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른 아이들처럼 걸어다니기 위해서 아웰은 크고 무거운 가방을 그것도 두개씩 들고 다닌다. 

무거운 가방으로 인해서 아웰의  발걸음은 무겁고, 행동은 둔하다.

그리고 그것이 왕따의 원인이 된다.

 

아웰이 가방 하나를 두고 교문을 나섰을 때, 아웰은 몸이 떠오르려 한다.

아이(깡패)들이 아웰을 돌을 던진다.

아웰은 돌을 맞고, 그 돌을 주머니에 채워 넣는다.

아이들을 피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돌을 채워 넣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돌을 채워넣으면 넣을수록 몸은 무거워지고, 무거워지다 못해 땅으로 꺼질 듯하다.

돌은 아웰을 향한 공격 무기였지만, 아웰은 그것을 맞고, 참아내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결국 돌은 아웰의 몸의 일부가 되어 버린 듯 하다.

 

 

쫓기고 쫓긴 아웰은 벼랑 앞에 섰다.

더이상 피할 곳은 없다.

아웰은 돌아선다. 반격이다.

자신의 무거운 주머니에서 돌을 다시 꺼낸다.

그리고 그 돌을 그것을 던졌던 그들을 향해 반대로 내던지기 시작한다.

던지고 또 던지기를 계속...

어느새 아웰의 몸은 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아웰은 가방마저도 벗어버린다.

그리고는 아주 높게, 스스로도 놀랄 만큼 높이 높이 떠올른다. 그리고 크게 웃는다.

모두들 환호성을 지른다.

 

중력은 보편적인 법칙이고, 피할 수 없는 운명이며, 획일성에의 강요이고, 지구에의 구속이다.

무거운 가방과 돌은 지구와 작용하며 중력을 생성하고, 중력을 강요한다.

애초에 중력과는 어울리지 않는 아웰은, 억압을 어께에 짊어지고, 폭력과 자학을 주머니 채워넣은 나머지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그렇다고 동일화에 성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아이들을 닮아가려고 할 수록 아웰을 더욱 기괴한 모습으로 변해갈 뿐이다.

 

잘 살펴보자.

자신에게 자신도 모르는 능력이 숨어 있지는 않은지. 그 능력은 어쩌면 자신이 부끄러워하는 것,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것에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던져 버리자.

자신을 무겁게 만들고 있는 것들을. 그것들은 지금은 자신의 일부인 것처럼 익숙할지 몰라도, 애초에는 자신을 상처입힌 바로 그것들이었다. 그것들을 자신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면, 질식해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하늘을 날아갈 준비를 하고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나의 천성이 이러한데 어찌 그것이 새의 천성이 아니겠는가. 무엇보다도 나는 중력의 영에 적의를 품고 있는데, 그것만 보아도 새의 천성이 분명하다. 나는 진정 중력의 영에 대해 불구대천의 적의와 으뜸가는 적의, 그리고 뿌리깊은 적의를 품고 있다.('중력의 영에 대하여')

나는 춤출 줄 아는 신만을 믿으리라. 그리고 내가 나의 악마를 보았을 때 나는 그 악마가 엄숙하며, 심오하며, 장중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중력의 영'이다. 그로 인해 모든 사물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사람들은 분노가 아닌 웃음으로 죽인다. 자, '중력의 영'을 죽이지 않겠는가?('읽기와 쓰기에 대하여')

 

-니체, [차라투스트라] 중, 고병권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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