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위의 포뇨 또는 엄마가 된 사츠키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는 될 수 있는 대로 극장에서 보려고 하는데

<벼랑 위의 포뇨>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쉬운 대로 어둠의 경로를 통해 캠 버전(중간에 누가 일어나 밖에 나간다)을 보았다가

이번에 제대로 된 <포뇨>를 보았다.

 

저번에도 잠깐 그랬는데,

소스케의 엄마 리사를 보며 <이웃집의 토토로>에 나오는 사츠키

가 이제 저 나이쯤 되지 않았을까,

더 정확히 말하자면, <토토로>가 개봉할 때 사츠키 또래였던 아이들이

이제 리사 나이가 되었겠다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토토로>가 개봉된 1988년에 사츠키의 극중 나이가 11살이었으니

(물론 이 작품의 배경 자체는 1955년이다)

<포뇨>가 나온 2008년, 사츠키(의 또래)는 31살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영화 중간쯤, 남편에게 토라져 있던 리사는 소스케를 보고 힘을 얻는데

그 때 리사가 부르는 노래가 바로 <토토로> 주제곡의 한 대목이다.)

 

다들 지적하듯 <포뇨>는 정말이지 대책 없이 낙관적이다.

아주 어린 아이들을 겨냥해서 만든 영화이긴 하지만

어디서 그런 낙관이 나올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데

난 감독이 그렇게 말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만일 다들 리사 같은 엄마아빠가 되어

포뇨의 도착 같은, 말의 강한 의미에서 '사건'을 겁내지 않고 껴안을 수 있다면

세상은 아마 훨씬 좋아질 거라고.

 

하야오의 영화에는 언제나 지혜로운 인물들이 나오지만

그/녀들은 대개 극이 시작되기 이전 그런 상태에 도달해 있었다는 느낌,

즉 하야오의 개입과 상관없이 지혜를 얻었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리사는 하야오가 개입한 바로 그 결과(즉 <토토로>를 보고 커서!)

그렇게 되었다는 느낌을 준다.

 

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야오가 그의 영화를 통해 말을 건네고 희망을 건 사람들이

항상 아이들이었던 반면에, <포뇨>에서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하야오의 영화와 함께 나이를 먹고 이제 아이들을 키우는 젊은 부모들이 추가되었다고.

너희는 이제 나이를 먹었고, 포뇨도, 소스케도 될 수 없지만,

그래도 실망하지 마라, 너희들이 리사 같은 부모가 된다면, 또는 그래야만

포뇨와 소스케가, 그/녀들의 마주침이 가능할 것이고, '바다의 여신'과의 교섭이 가능할 것이며,

그리하여 그 아이들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니까,

라고 하야오가 속삭이는 것이 영화 내내 느껴지는 듯 했다.

 

내가 그렇게 느낀 건

나 역시 (<미래소년 코난>이나 <엄마 찾아 삼만리>, 그러나 무엇보다 <플란다스의 개> 등)

하야오의 애니와 함께 사츠키의 나이에서 리사의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저 노대가의 아이들 중 한 명인 나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또는

나의 후배들과 아이들의 성장과 작업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약간 엉뚱할 수도 있지만, <포뇨>가 내게 가장 강하게 남긴 것은 이 질문이었다.

어쩌면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지금의 내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따뜻한 난로 곁에서

어린 손주들의 다듬어지지 않고 시행착오 투성이인 이야기를 따뜻한 시선으로 들어주는

후덕한 할아버지할머니를 원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래서 나는 하야오가 좋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Posted by 아포리아

2009/08/23 15:19 2009/08/23 15:19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blog.jinbo.net/aporia/rss/response/84

진은영, <바람의 노래> 중

    그래 나는 하늘의 말랑한 반죽, 흰구름이 딱딱해져

가는 것을 보았다.

    검게 탄 빵이 사람들의 머리 위로 부서져 내렸다

 

----------------

 

오늘 내린 비를 보니 이 시가 떠올랐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Posted by 아포리아

2009/07/02 21:47 2009/07/02 21:47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blog.jinbo.net/aporia/rss/response/66

진은영, <멜랑콜리아>

그는 나를 달콤하게 그려놓았다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나는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

누구의 부드러운 혀끝에도 닿지 못했다

 

그는 늘 나 때문에 슬퍼한다

모래사막에 나를 그려놓고 나서

자신이 그린 것이 물고기였음을 기억한다

사막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

그는 나를 지워준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

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

 

----------------------

 

이 시를 보고, 알튀세르가 다시 취한 말브랑슈의 비에 관한 질문이 떠올랐다.

"왜 바다에 비가 내리는가?"

또는, <보헤미안>에서 리채는 "사막에는 물이 없고 바다에선 물 뿐이"라고 노래했다.

그런데 왜 사막에 비가 내리는가?

 

왜 아이스크림은 아스팔트에 떨어졌는가?

왜 물고기는 모래사막에 그려졌는가?

 

이유는 없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을 뿐이다.

그러니 멜랑콜리할밖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Posted by 아포리아

2009/06/26 16:02 2009/06/26 16:02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blog.jinbo.net/aporia/rss/response/62

깨진 거울

   "From Sade to Celine, literature seems to have devoted itself to the exposition of all that should not be said. The images it sends back to us from the historical world in which we live are distorted and deformed, completely indecent and corrupt. It is as though the images had taken shape in a broken mirror in which the world is reborn lager than life in the pitilessly cruel and cynical light projected on it by the truth of a style. For the world would not be as true as it is if it did not also speak its name through books."(강조는 나)

 - Pierre Macherey, The object of literatu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p. 237

 

마슈레의 책을 최근 다시 읽고 있다.

'깨진 거울'이라는 은유, 전에도 봤던 표현이지만

이제서야 그 의미를 조금 알 것 같다.

 

현실을 비추는 거울,

그렇지만 스타일이라는 균열을 통하기에

현실을 비뚤고 굽게 비추는 거울.

'왜곡'이라는 수단으로써 진실을 말하는 거울.

 

우리가 문학이라고, 예술이라고 부르는

그 깨진 거울.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Posted by 아포리아

2008/10/18 21:08 2008/10/18 21:08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blog.jinbo.net/aporia/rss/response/6

정확한 거리두기가 성취한 영화미학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는 1988년 일본에서 발생했던 ‘나시 스가모의 버림받은 4남매 사건’을 실화적 모태로 하는 영화이다. 한 엄마와 각기 다른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4명의 아이들, 출생신고가 되어 있지 않아 공식적으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 그나마 어렵게 마련한 전셋집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큰아이를 제외한 나머지 세 아이는 말 그대로 그곳에 없는 아이들이 되어야 한다. 어느 날 엄마는 새로운 사랑을 위해 그 아이들을 떠나버리고, 아이들은 끝내 비극적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 6개월 동안 아무도 모르는 그들만의 삶을 살아낸다. 그곳에 있지만 그곳에 없었던 아이들의 유령 같은 삶. 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는, 한동안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 떠들썩함 속에는, 버려진 아이들에 대한 연민, 아이를 버린 무책임한 어미에 대한 분노, 결국 그 어미와 함께 아이들을 방치한 공범이 되어버린 사회-어른들 자신의 부채의식, 이 모든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대도시의 익명적 삶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 또는 반성이 있었을 법도 하다.

그러나 그 사건 이후 15년 만에 세상에 나온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이 모든 소란에서 한 걸음 비켜서 있다. <아무도 모른다>는 그 아이들의 삶이 생각만큼 온기없는 유령 같은 삶은 아니었음을 보여줄 만큼 충분히 사실적이지만, 또한 아이들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 그 어미에 대한 섣부른 도덕적 분노와 단죄로 변질되게 하지 않을 만큼은 충분히 허구적이기도 하다.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결코 이 영화가 ‘재현 드라마’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 사건을 모태로 하고는 있지만, 세부적인 디테일은 1년간 배우인 아이들과 함께 발견하고 창조해낸 것임을 힘주어 말한다. 사실, 그 단호함은 현실과 영화에 대한 감독 자신의 조심스럽고 근본적인 윤리적 질문의 다른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대상에 대한 연민은, 특히 그것이 폭발적이고 집단적인 것일 때, 쉽사리 그 대상을 영원히 타자화시킬 위험에 빠진다. 터무니없는 일로 인한 충격과 분노는, 특히 그것이 폭발적이고 집단적인 것일 때, 도덕적 단죄라는 폭력이 되어 자신이 담지하고 있는 윤리적 힘을 소진시켜버린다. 문제는 연민과 분노라는 감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쉽사리 출구를 찾아 스스로를 해소하려고 하는 그 완강한 관성 또는 자동운동 속에 있다. 그것을 막는 또는 그 힘에 저항하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끊임없는 삶에 대한 탐색과 윤리적 질문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실제로 수행하는 일은 생각만큼 쉬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외줄타기와도 같이, 고도의 균형감각과 끊임없는 긴장을 요구하는 일이다. 영화 <아무도 모른다>가 많은 ‘버려진 아이들’에 대한 영화와 구별된다면, 그래서 우리에게 새로운 감동을 준다면, 그것은 이 영화가 바로 그 쉽지 않은 일을 해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큐와 픽션, 선과 악 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잡기

영화 <아무도 모른다>에는 시종일관 미묘한 긴장이 흐른다. 그것은 카메라와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팽팽한 공간적인 거리 감각이 낳는 긴장이기도 하고, 촬영과 편집 사이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시간적 리듬의 공존에서 비롯되는 긴장이기도 하다. 카메라는 대상을 향해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지만, 끝내 그 인력에 함몰되지 않는다. 카메라는 무한한 인내심으로 대상의 진실이 드러나기를 기다리지만, 일단 포착된 대상의 진실은 과잉에 이르기 이전에 냉정하게 편집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카메라와 편집 리듬에는, 대상을 향한 자연스러운 인력과 대상으로부터의 의식적인 척력 사이에 존재하는 팽팽한 물리적 긴장이 실려 있다. 그 물리적 긴장은 감독 자신의 윤리적 질문의 필연적인 결과일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는 두 가지 의미에서 다수화된 ‘이분법’에 질문하고 도전하는 영화이고, 그 이분법의 경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영화이다. 영화는 순수한 아이들과 오염된 어른들이라는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하고, 그것을 위해서 사실과 허구, 다큐와 픽션 사이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고 있다.

아무도 모르는 아이들이 만든 유사 가족 생활담

<아무도 모른다>는 아이들의 그 6개월을 고난과 참상으로 재현하려 하기보다는, 그 6개월을 살아낼 수 있었던 아이들의 삶의 의지와 생의 감각을 포착하고 그것과 하나가 되려고 한다. 아이들을 트렁크에 넣어 옮겨야만 하는 삶의 절박함은, 유키(시미지 모모코)의 천진난만한 질문(“여기는 몇층이야?”)과 시게루(기무라 히헤이)의 천진난만한 미소로 스릴 넘치는 비밀 작전, 즉 유희가 된다. 비밀 작전의 무사한 성공을 자축하는 저녁식사 자리에서 아이들보다 더 아이 같은 철없는 엄마가 제시하는 터무니없는 의무의 법칙은, 아이들의 웃음과 함께 게임의 규칙이 된다. 무엇보다 아이들은 엄마가 사라진 뒤에도 막연한 기다림 속에서 삶을 낭비하지 않는다. 엄마보다 더 어른스러운 아이였던 장남 아키라(야기라 유야)는 이미 아빠이고, 이사한 집에서 제일 먼저 세탁기가 놓인 곳을 확인하는 장녀 교코(기타우라 아유)는 이미 엄마이며, 시게루와 유키는 아빠 엄마의 사정을 충분히 헤아려 보채거나 칭얼대지 않는 착한 아이들이다. 이 자발적인 유사 가족은, 위기의 순간을 삶의 영역을 확장하는 계기로 만드는 놀라운 생명력을 보여준다.

생활비(식비)의 고갈을 새로운 연대(먹을 것을 챙겨주는 편의점 직원)의 기회로 삼고, 단수로 인한 고통을 공원으로의 진출 기회로 삼는다. 엄마와 함께 금지의 규칙은 사라졌다. 공원과 거리로 자신들의 삶의 영역을 확장한 아이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친구(사키-간 하나에)를 사귀고, 그곳에서 발견한 새로운 생명의 싹에 감응하며, 그것을 데려다가 소중하게 키운다. 시게루는 자판기와 공중전화에서 동전을 모으는 생활의 지혜를 터득한다. 그리고 그 6개월 동안 아이들은, 자신들이 키우는 화분 속의 식물처럼, 실제로 자라난다. 13살이 된 아키라는 변성기가 시작되고, 5살이 된 유키는 이제 예전의 작은 트렁크에는 들어가지 않을 만큼 그렇게 자랐다. 물론 그 생명력과 성장력은 축복이라기보다는 비극이다.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아키라의 고집(아키라는 이미 성을 바꾸어버린 엄마에게 더이상 도움을 호소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들을 뿔뿔이 흩어놓을 것이 분명한 사회에도 도움을 청할 생각이 없다)은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너무나 빨리 자라버린 유키의 싸늘해진 몸은 한순간 우리의 머리를 텅 비게 만드는 충격이 된다. 유키의 죽음을 확인한 뒤 거리로 나간 아키라의 눈에 세상은 더이상 현실감을 갖지 않는 공허가 되고, 그 초현실적 공허감은 우리의 오감을 얼어붙게 한다. 아키라의 발걸음은 자동반사적으로 그를 경찰서 앞으로 이끌지만, 그는 끝내 돌아선다. 유키에게 모노레일을 타고 가서 비행기를 보여주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그 순간 아키라는 아이와 어른의 경계를 훌쩍 넘어서 있으며, 그리하여 세상의 상식을 향하여 무기력하지만 끈질긴 질문을 던진다.

아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에 대한 탐색

어쩌면 이 영화가 그 제목을 통해 말하려 했던 것은, 아이들의 존재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아무도 몰랐던’ 어른-사회의 무책임에 대한 반성의 촉구 같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정작 아무도 몰랐던 것 그리고 지금까지도 아무도 잘 모르고 있는 것은, 그 아이들이 보여준 놀라운 삶에의 의지와 삶의 감각(감독은 그것을 “삶의 리얼리티를 느낄 수 있는 육체적인 기억”이라고 표현한다)일 것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영화는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느꼈었는가를 질문하고 탐색한다. 마치 <말아톤>이 초원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도덕적 다그침이 아니라, 초원이가 바라보는 세상과 삶의 감각이 무엇인가를 포착함으로써 새로워질 수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아무도 모른다>는 새로운 영화가 된다. 그것은 영화가 영화를 넘어서는 놀라운 기적의 순간들이다.

그때 영화는 사실과 허구, 다큐와 픽션의 경계를 넘어선 화법으로, 쉽게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재단해낼 수 없는 삶의 진실에 이야기한다. 도덕적 폭력이 되지 않아야 할, 그저 끊임없는 새로운 윤리적 질문의 출발점이기만 해야 할 연민과 분노만을 낮고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환기시킨다. 고레에다 감독의 전작 <원더풀 라이프>(1999)에는, 또 하나의 아이-소녀가 등장한다. 기억하고 싶은 삶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습관적으로 디즈니랜드를 떠올렸던 소녀는, 그것이 이미 많은 아이들의 것이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것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일 수 없음을 느낀다. 그 소녀가 대신 찾아낸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무릎에 누이고 귀를 파주던 엄마의 살냄새”였다. 상식적이고 자동화된 우리의 반응에 대한 새로운 윤리적 질문은 이렇듯 늘 새로운 삶의 감각과 함께 비로소 작동한다. <아무도 모른다>는 그 새로운 윤리적 질문, 새로운 삶의 감각으로 충만해 있는, 아름답고 새로운 영화이다. 다음과 같은 고레에다 감독의 진심어린 연출의 변은, 그 새로움을 찾는 모든 감독들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자 다짐일 것이다. “소년의 옆에서 어깨를 다독여주고자 했다. 안아주는 건 안 된다… 나도 카메라도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글: 변성찬 영화평론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Posted by 아포리아

2008/10/14 16:14 2008/10/14 16:14
Response
No Trackback , a comment
RSS :
http://blog.jinbo.net/aporia/rss/response/5

2005년쯤, '난.쏘.공.'을 읽고 쓴 글

어쩌다 '난.쏘.공.'을 꼼꼼히 읽게 되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 책을 이렇게까지 꼼꼼히 읽은 건 처음이다.

몇년 전까지 난 '고전'을 거부 또는 회피해 왔다.

이유는 정확치 않다. 아마 무의식적이다.

 

내가 옛날에 이 책을 읽었다 해도

진가를 얼마나 알아볼 수 있었을까 는 회의적이다.

물론 이 책은 '고전'이다. 고전이란

초심자가 읽어도 30%는 알고

전문가가 읽어도 30%는 모르는 책이므로

읽어야 했을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너무 늦게 읽었기 때문에 이 책을 섯불리 '지양'한다는 따위의

건방진 얘기는 하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다.

 

'소설이 끝났다'는 선언에 대해 쿤데라는

'백년의 고독'이 있으므로 그런 얘기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다른 어떤 분야보다 소설에선 일반적 진술을 하기 어려운 것 같다.

문제는 개별 '작품'이다. '난.쏘.공.'을 읽으면서

난 어떤 다른 기록형태도 이 책의 표현을 대체할 수 없다고 느꼈다.

속단일 순 있다. 다른 기록형태에 유례없는 난제를 제기했다

고 표현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 작품을 앞에 두고 '소설이 끝났다'고 말할 만큼

뻔뻔한 사람은 존재할 수 없게 됐다는 점이다.

조세희 선생은 작품의 '독특성'을 통해 소설의 '보편성'을

구원했다. '구원'이란 단어를 쓰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경외스러운 방식으로.

 

많은 이들은 자신들이 '난.쏘.공.'의 세계를 떠났다고 생각한다.

저 '산업화' 시대, 그 시절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한다.

조세희 선생이 아직 살아 그런 뻔뻔한 자들에게

침을 뱉아줄 수 있다는 점이 감사할 뿐이다.

선생은 오래 사셔야 한다. 소설도 빨리 출간하셔야 한다.

 

'난.쏘.공.'은 비극이다.

마지막 장면에서의 재판은 공론장에서의 발언의 환유라는 점에서

'오이디푸스왕'과 '안티고네'를 계승하며

비속류적인 헤겔적 '인정투쟁'을 상연한다.

'적대'와 '불화'를 전면화하고

'위반'과 '폭력'으로밖에는 자신의 존엄성을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상황을 묘사한다. 여기서 직접적으로 나오는 질문은

따라서 '반폭력'이다. 어설픈 '지양'과 '화해'를 얘기하지 않으므로

속류들에게는 역설적으로 보이겠지만 그는 진정으로

폭력의 문제를 정확히 다루고 해결할 길을 개방한다.

자본주의 및 우리 사회에 대한 통찰과 함께

이 모든 질문, 무엇보다 그것이 제기되고 상연되는 방식 때문에

나는 읽는 내내 눈이 부셨다.

 

내가 볼 때 이 소설 이전과 이후의 대부분의 대당은

이 소설의 존재 자체로 해체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87년 재판에 실린, 뤼시엥 골드만을 원용한 김병익의 비평도

마찬가지다. 내 생각에 이 비평은 이 소설을 인내할 수 없다.

이런 위대한 작가가 의도적으로 과작을 하는 게 안타깝다.

하지만 그 과작 자체가 메세지이므로.

나는 그의 동료나 후배들이 이 메세지를 이해했으면 좋겠다.

한 사람이 열 편씩의 쓰레기를 쓰는 것보다

열 사람이 한 편씩의 위대한 저작을 쓰는 편이 훨씬 낫다는 것.

모두 이 입장을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이런 입장을 곰곰히 인내하면서 글을 쓰라는 뜻에서.

 

그렇다면 조세희 선생은

비부르주아적인 다원주의의 전망을

과작이라는 뼈아픈 선택을 통해 몸소 실현한 셈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이 담긴 까닭에

쉽게 스스로를 타협/양보할 수 없는 강렬성/진정성들의

작가 수 만큼의 출현. 한편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작가는

'직업'이 아니라(평생 한 편을 쓰는 직업이 어디 있는가?)

모든 대중들에게 부과된 일생 (최소한) 한 번의 과제다.

 

이 얼마나 위대하고 황홀한 빛의 세계인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Posted by 아포리아

2008/10/14 16:07 2008/10/14 16:07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blog.jinbo.net/aporia/rss/response/4

다시 읽어도 감동적인 글

얼마전 좋아하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이스트우드 영화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스트우드의 영화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세계관에는 공감하지 않는 편이다.

내 앞의 친구는 내게
'이스트우드를 싫어하면서
어떻게 차이밍량과 잉게마르 베리만을
좋아할 수 있는 것인가'고 물었다.
그의 질문은 논쟁적이라기 보다는
상대방의 영화 보기에 대한 궁금함 혹은 공유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의표를 찌르는 질문에 나는 움찔했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중언부언했으며
스스로 느끼지 못한 것을 느낀양 장황하게 설명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내 이야기가 끝날 무렵 옆에 앉은 친구는
'애정만세'에서 감동받은 점을 진솔하게 말했다.
공간에 대한 이야기,
(첫번째 섹스 장면에서 이강생은 문 밖에 있었으나
두번째 섹스에서 이강생은 침대 아래 들어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시퀀스에 대한 이야기다.

섹스를 끝낸 새벽에 양귀매는 그 집을 나선다.
그러나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그녀에게는
아이러니 하게도 돌아갈 집이 없다.
그녀는 황량한 타이빼이의 새벽거리를
무감한 표정으로 가로지르며 걷고
그 걸음은 재개발 택지 근방의 공원에서 끝난다.
그녀는 밴취에 앉아 흐느끼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통곡을 한다.

나는 그 장면에서
타이빼이의 오늘을 생각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그 친구가 본 것은
놀랍게도 감독의 마음이다.

그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기나긴 롱테이크 장면에서
차이밍량은 그녀와 타이빼이의 거리를 함께 걷고
공원에서 밴취에 앉아 그녀의 울음을 지켜봐주는 것이다.

(강조는 나)

그 친구의 이야기는 진정으로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나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다.

알게된 것 하나.
사람 사이의 대화는 기본적으로
자기가 아는 세계를 상대와 나누는 것이다.
알게된 것 둘.
자기가 알고 있는 것, 느낀 것을 솔직히 말하는
진솔한 이야기는 언제나 감동적이다.
그 밖에..
베리만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감독 중 한명이다(뭐야 이건).

여하튼.. 새벽 다섯시 무렵, 다른 사람들 잠든 모습 바라보면서
비몽사몽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음..
필시.. 이건 성숙의 징조인 거시야..

 

----------

 

정성일 팬카페에 한 회원이 쓴 글이다.

강조표시해 둔 저 부분을 읽고, 나 역시 잠시 멍해졌다.

카메라에 관해 아주아주 조금씩 생각하기 시작했지만

얼마나 멋진 장면을 잡는지, 그 장면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하는 정도였을 뿐, 카메라로 누군가를 찍는 행위가

동반이자 치유 그 자체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그런 관념 자체가 서지 않았다는 게 정확하리라.

 

슬픈 사람을 따라 촬영하는 카메라는 지금껏 많았으리라.

('쾌걸춘향' 같은 통속극에도 나온다)

그러나 저런 마음을 담은 카메라가 있었을까?

아니 그런 건 커녕, 대상의 슬픔을 더욱 크게 작위하여 만든

'감정상품'의 소비, 이를 목표로 하는 외설적 잔혹함을 경계하는

카메라라도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아마 있었을 것이다. 내가 보지 못했을 뿐. 하지만 내 생각에

주위에서 '흔히' 볼 순 없었을 것 같다)

반영도, 연출도 아닌, 실재와의 다른 교섭으로서 카메라.

(물론 이것이 반영과 연출을 배제하진 않는다.

오히려 반영과 연출을 통과한 후에만 이런 카메라가 가능하리라)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자면, '정서'로서 카메라.

 

아직까지는 관념의 유희일 뿐이지만 더 고민해 보고 싶은 문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Posted by 아포리아

2008/10/14 16:01 2008/10/14 16:01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blog.jinbo.net/aporia/rss/response/3


블로그 이미지

당연하잖아 비가 오면 바다 정도는 생긴다구

- 아포리아

Tag Cloud

Notices

Archives

Calendar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Site Stats

Total hits:
274786
Today:
9
Yesterday:
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