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의 변화

9일 북토크에서 박래군에게 예정에 없던 질문을 하나 건넸다. 가족들도 변했겠지만 곁에서 함께 한 조력자로서의 당신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질문에 이어진 이야기는 좋았으나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못하고 넘어갔다. 이틀 후 한 언론에서 인터뷰 요청이 와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기자가 물었다. 5년의 시간 동안 미류 님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아... 이 질문은 패쓰할게요. 전화를 끊었다. 모르겠더라. 

영화 <생일>은 시간이 흘러도 고통은 그대로 남는다는 걸 잘 보여준다. 그게 이 영화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장점인 것은, 시간이 흐른들 슬픔도 분노도 억울함도 아쉬움도 그리움도 옅어질 수 없다는 걸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영화 후 GV에서, 더 오래 전 재난참사를 겪은 분들이 자신들의 얘기처럼 영화를 봤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더욱 분명해졌다. 그러나 단점이기도 한 것은, 시간이 흐르며 무엇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며 가족들은 달라졌다. 첫 해 농성장에서 함께 지내며 만난 가족들은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했다. 외부의 시선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이 생각이 나 펑펑 울다가도 싸워도 부족한 때 울고만 있다며 자신을 나무라고,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웃음이라도 터지면 여기서 이러는 게 뭐가 좋다고 웃고 있냐며 자신을 다그쳤다. 그러나 가족들은 점점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 같다. 배가 고프면, 밥 먹고 열심히 싸우라고 신호를 보내는구나, 눈물이 나면, 잠시 멈춰서 슬퍼하라고 붙잡는구나, 웃음이 나면, 다른 사람들과 재미난 시간 보내라고 응원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되어가는 모습들. 고통은 희미해지지 않지만 고통의 수많은 빛깔에 훨씬 너그럽게 응답할 수 있게 됐다. 고통의 빛깔들이 과거에 머물지 않고 미래를 향해 연결될 수 있다면 이런 변화 덕분일 게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416가족'이라고 서로를 부르게 된 사람들이 함께 싸우지 않았다면 만들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쯤 생각하고 보니 내게도 변화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첫 해 농성장에서 함께 지낼 때 나는 늘 스스로에게 왜 나는 더 슬프지 않은 것인지 물었다. 나의 슬픔은 언제나 부족한 것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함께 싸울 자격이 충분한 것인지를 되묻곤 했다. 그러다가도 알 수 없는 눈물이 흐를 때면 지금 울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라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며 눈물을 삼켰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제는 내게도 너그러움이 생겼다. 나는 내 방식으로 내 사건으로서 '세월호참사'를 겪는다는 걸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가족들의 이야기도 더 있는 그대로 듣게 되는 것 같다. 어쩔 줄 몰라 할 때는 들을 줄도 몰랐던 것. 또 어떤 사건을 마주할 때 어쩔 줄 모르겠는 시간이 조금은 더 짧아지고 조금은 더 능숙해진다면 나의 변화 역시 '416가족'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덕분이겠다. 이렇게 또 4월 16일이 가까워지는구나.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9/04/13 13:22 2019/04/13 13:22
태그 :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aumilieu/trackback/1026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