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어이없어 웃음도 안 나오는 소식을 들었다. 차별금지법안에서 '성적지향' 삭제하고 결국 '성소수자'를 삭제해버린 나라에서 벌어지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 이건 단편적인 것이 아니다. 이 기회에 차별금지법 제정 관련해 하고 싶던 말 하나 꺼낸다.
'사회적 논란이 되므로 나중에.' 이건 현재 정부여당의 기조다. 논란이 되는 건 회피하고 싶다는 비겁함일 뿐인 경우도 있지만 법 제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전략적 판단을 하는 경우도 있다. 논란에 발목 잡힐 것이 뻔한 상황에서 적절한 여건이 갖추어진 때를 기다리는 것이 낫다는 입장이다. 일부 국회의원들과 더불어 시민사회에도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의견이고, 국가인권위 역시 같은 입장이다.
국가인권위는 차별금지법 제정 추진 의지를 그나마 공식적으로 밝히는 유일한 국가기구이지만, 현재 법 제정을 추진하는 활동을 하지는 않고 있다. 혐오차별대응특별위원회를 만들어 혐오부터 해소하자고 하는데 그다지 동의되지 않는다. 혐오를 해소하기 위한 활동이야 그 자체로 필요하지만 그것이 차별금지법의 선결과제일까? 차별에 대한 이해 없이 혐오를 이해할 수 없다. 동성애혐오선동세력이 누누이 자신들의 활동을 '성소수자를 혐오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현실 아닌가. '동성애 반대하는 분들 있어서 차별금지법은 나중에 제정하겠다'고 말하는 나라에서 혐오에 대한 이해가 가능할까?
2007년 법무부는 차별금지법 추진 상의 문제점을 "향후 '성적 지향'과 관련,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계와 학부모단체를 중심으로 사회적 파장 및 논란이 확대"될 것으로 보았다. 그러다가 차별금지법 자체가 폐기될 수 있으니 해결방안으로 "차별금지사유를 합리적인 기준에 따라 조정함으로써 '성적 지향'이 특별히 부각되어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조정"하는 것을 제시했다. 그래서 논란은 사라졌는가? 아니다. '성소수자'가 사라져버렸다. 혐오세력은 사회를 차별로 잠식해갔고 차별금지법은 완전히 땅속에 파묻혀버렸다. 정부는 폐기를 우려하여 폐기를 자초했다.
촛불이 탄생시킨 정부라는 문재인 정부에서 발표한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은 그동안 포함되었던 '성소수자' 항목을 삭제했다. 어차피 공무원들이나 보는 문서일 뿐이지 않냐고? 한 단체가(성소수자단체 아님) 최근 사업을 하며 정부 부처 후원을 받기로 했는데 기념품 이미지에 무지개우산이 있다는 이유로 사업비를 못 주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것이라 안된다면서. 이게 논란을 회피해온 결과다. 때를 기다리자는 입장이 아무리 간절한 제정 바람에서 출발한 것이라 해도 결과적으로 이 모든 상황에 일조하게 되는 것이 지금의 현실.
논란이 없는 입법이 좋은 것일까? 소모적 논란은 피하는 것이 좋다, 당연히. 그러나 소모적 논란을 피하려고 논란 자체를 피하다 보면 논의를 시작할 수 없게 된다. 논란을 의미 있는 사회적 논의로 전환시켜야 한다. 여건이 무르익으면 법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차별금지법 제정의 의미와 필요성에 대해 더 많이 말해야 여건이 무르익는다. 하다못해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2013년에도 차별금지법 제정을 주문하는 칼럼이나 기획기사들이 나왔다. 지금은. 정부를 비판하면서도 사실상 침묵에 동조하는 이들이 더 많다.
물론. 누가 하겠나. 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해야 한다는 걸 안다. 그러나 이 침묵을 깨는 것이 차제연의 책임만은 아니라는 것도 안다. 준비할 시간은 필요하겠으나 대기하는 시간은 끝내야 한다. 차별금지법이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논란에 발목잡혀 있다는 현실을 직시하자. 그래서 평등이 발목잡혀있다는 걸. 논란을 회피하는 만큼 평등도 회피되고 있다는 걸.
사회적 논란이 되므로 나중에?
인간답게 (먹고)살 권리
2019/05/12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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