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계획이 다 있었다. 음미체, 음악과 미술과 체육으로 안식년을 채울 계획이었다. 꼭 하고 싶은 무엇이 있다기보다 무언가 꼭 하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가까이 있는 평생학습교실 강좌부터 검색했다. 세상에나, 음악과 미술과 체육의 각종 수업이 있었다. 비용도 저렴했고 수업의 질도 어느 정도 믿음이 갔다. 강좌를 신청하고 나서는 인권운동이 국유화 투쟁을 해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너스레도 떨었다.
코로나19로 계획은 모두 중단됐다. 내게는 얼마건 간에 활동비라는 고정 수입이 있어 큰 타격이 없다. 하지만 평생학습교실 강사는 수업이 없으면 수입이 없다. 주위에 이러저러한 강의와 교육으로 소득을 얻는 친구들도 비슷하다. 달마다 해마다 강의나 교육을 어느 정도 해서 소득과 시간을 조절할지 고민하던 개개인의 계획이 코로나19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계획은 똑같이 무너졌지만 무너진 계획의 여파가 다르다.
재난기본소득 얘기가 여기저기서 나온다. 시장이 멈추고 경제가 위기에 처했다는 진단에서 우선 현금이라도 풀어야 한다는 점에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 같다. 일상을 지탱하려면 기본적인 소득이 필수적이다. 모두가 처한 재난이지만 똑같이 어려움을 겪지는 않는다. 현금이 지급된다면 더 시급한 사람에게 더 긴요하게 쓰일 듯하니 서두르면 좋겠다.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할까? 우리가 처한 재난은 감염병의 확산 앞에서 경제가 일시멈춤한 것에 그치는 것일까? 모두가 기본소득을 보유한 소비자로서 시장에 참여할 수 있게 되면 위기는 넘어설 수 있게 될까?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고 분배하는 데 경제활동의 본질이 있음을 상기한다면, 코로나19는 그동안 '경제'라 불리던 것과 경제활동이 얼마나 괴리되었는지 보여주는 듯하다. 가장 많이 벌어들이던 기업일수록 가장 덜 기능하고 가장 경제적이라 여기던 방식이 가장 무력하다. 기업들은 쌓아둔 돈으로 기부는 하지만 정작 그 돈을 만들어낸 노동자의 일상은 내팽개친다. 삼성전자는 230억 원을 기부했지만 영업이익과 비교한 기부율은 0.08%일 뿐이고, 부품 공급의 연쇄고리에 놓인 수많은 노동자들이 휴직을 강요당하는 것에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 국가로부터 현금을 지급받는 이유가 결국 다시 기업들의 영업이익을 위해 버티는 것이라면, 너무 서글프다.
마스크 5부제가 시작되었다. 마스크가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적당한 수량 지급되도록 하기 위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소비자 된 국민의 출생연도를 확인해 줄 세우는 것밖에 없는 현실은 괜찮지 않다. 만약 마스크의 생산과 유통을 사회가 얼마간 파악하고 관리할 수 있었다면, 마스크 한 장에 운명이 걸린 것처럼 온국민이 초긴장해야 하는 시간은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재난 속에서 우리의 일상을 지켜주는 건 마스크 5부제가 아니었다. 마스크를 양보하겠다고 캠페인을 벌이고 동참하는 사람들, 천으로 마스크를 만들어 이웃에게 나눠주는 사람들. 하찮은 일이거나 경제 외적인 영역으로 치부되며 여성에게 전가되던 돌봄노동도 그렇다. 코로나19 이전이라면 결코 노동으로 인정되지 못했을 일들이, 그 관계가 세계를 지키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안도감을 주는 것은, 의료를 선도한다며 추앙받던 삼성병원이나 아산병원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취급받지 못하던 공공병원들이라는 점도 지나칠 수 없다. (지자체들도 재난기본소득 야단만 떨지 말고 그간 주민들의 삶을 지키고 가꾸는 데 가담한 사람들의 소득을 어떻게 보장했는지 되짚어보시라.)
우리가 스스로, 그리고 서로 살리고 키우기 위해 해내는 일들을 제멋대로 줄 세우며 함께 쌓은 부(common wealth)를 사유화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경제'다. 개인들에게는 각자의 계획 속에서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삶만 허락되었고 우리가 살아갈 세계를 함께 계획하는 것은 거부당했다. 이대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목표일 수는 없다. 어떤 일들이 서로 돌보고 먹여살리는 세계를 함께 만들고 있는지, 자본이 아닌 '우리'의 관점에서 다시 봐야 할 때는 아닐까. 재난을 겪으며 어떤 이들이 가장 취약한 위치에 놓이는지 살피는 것만큼 어떤 일들이 가장 세계를 지키며 회복을 이끌고 있는지도 살펴야 한다.
'우리'가 계획이 다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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