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사건에 대한 공분은, 언제나 그렇듯 먼저 분노한 여성들이 스스로를 다 태울 즈음에서야 뒤늦게 일었다. 그리고 대체로 껍데기만 태우고 알맹이는 그대로 남겨둔 채 사그라들었다. 나는 분노를 조금 내려놓고 싶다. 나보다 더 오래, 더 깊이 분노했던 이들도 잠시 숨 고를 시간을 얻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번에는 끝까지 다 태울 수 있기를 바란다.
이번 사건에 모이는 공분은 ‘박사’를 비롯한 범죄의 주도자들이 벌인 가혹행위 등 반인도적 범죄 양상이 계기가 된 듯하다. 범죄가 평범하지 않을수록 관심이 모이고 평범함을 벗어나는 정도가 심각성을 보여주는 것처럼 여긴다. 그렇게 평범하지 않은 범죄자를 도려내고 나면 그대로 남은 평범함에서 형식만 달리한 범죄가 자라난다. 나는 잔혹한 범죄 내용보다 그들이 범죄를 시작할 수 있었던 조건을 계속 곱씹게 된다.
시작은 협박이었고 수단은 사진/영상과 신상정보였다. ‘너의 사진/영상이 내게 있다. 지인이나 가족에 알릴 테니 내 요구에 따르라.’ 피해자 대부분이 이때 범죄를 신고하거나 타인의 도움을 구하지 못했다. 디지털 매체에 자신의 몸이 담겨 실려갈 때 ‘수치심’은 여성의 몫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벗은 몸’에 대해 인간이 가지게 되는 감정 이상의 문제다. 여성에게는 스스로 자신의 존엄을 지키지 못한 책임까지 떠넘겨지기 때문이다. 권리를 보호받을 자격은 부정당하고 사회적 관계망에서 밀려난다.
역설적으로, 사회가 여성의 수치심을 있는 그대로 듣지 않아온 탓이다. “사회경험이 풍부한 67세 여성”이라면 남성이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어도 성적 수치심이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이라거나, “손은 성적 수치심을 느끼는 신체 부위로 보기 어렵다”며 거부하는데도 손을 놓아주지 않은 것이 강제추행 무죄라고 했다. “레깅스는 운동복을 넘어 일상복으로 활용”되므로 여성의 하반신을 불법 촬영했더라도 무죄라고 했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그것이 어느 부위든, 나의 신체가 타인의 일방적 행위 대상이 될 때 누구나 모욕을 느낀다. 인간으로서 존엄이 훼손당할 때 수치심을 느낄 권리는 부정당하는 대신, 여성은 자신의 몸과 성적인 행위 자체에 수치심을 느끼도록 강요당했다.
왜 나는 나를 지키지 못했는가. 성폭력 피해자들이 끊임없이 스스로 되묻도록 강요당한 질문이다. 왜 너는 그런 옷을 입었는가, 왜 너는 그곳에 갔는가, 왜 너는 그런 사진을 찍었는가… 이번 사건을 두고 사진을 주거나 먼저 올린 여성을 훈계하는 댓글도 적지 않다. 그런 시선들이 협박을 성사시키고 회복을 지연시킨다. 이번 사건을 통해 질문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왜 너는 보았는가, 왜 너는 그곳에 가입했는가, 왜 너는 사진을 유포했는가… 사진이나 영상을 ‘보았을 뿐’이라고 항변하거나 ‘가입만 했을 뿐 보지 않았다’고 변명할 말들을 모두 태워버려야 한다. 그리고 부끄러움은 이들의 몫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성범죄자의 신상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상공개제도는 ‘알 권리’라는 명분과 다르게 ‘알아야 할 의무’를 여성에 부과하는 제도에 가까웠다. 그러나 나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에 가담한 자들의 신상 공개를 반대하지 않는다. 여성으로서 나의 존엄을, 그리고 모든 여성과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그들이 부끄러운 줄 알게 할 권리는 있으므로.
분노의 소용돌이가 잠든 후 남는 것이 여성이 더 조심하고 더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길 바란다. 자신이 본 것이, 간 곳이, 찍은 사진이, 내뱉은 말이 혹시라도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 것은 아닌지, 남성이 더 조심하고 더 두려워하게 되길 바란다. 조심하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여성을 ‘보는 물건’으로 만든 범죄단체의 구성원이 될 수 있음을 깨닫기 바란다. 그러니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궁금해하는 대신, 어떻게 누구라도 그런 짓을 할 수 있게 됐는지 물어보시라.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알 권리’가 있다면 바로 그것을 낱낱이 알 권리일 것이다. 여성이 자신의 몸과 성적인 행위를 통해 존엄을 느낄 수 있게 될 때까지, 오늘의 분노가 멈추지 않고 성착취의 구조 전부를 태우게 되길. 그래서 피해자가 숨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
부끄러운 줄 알게 할 권리는 있으므로
주간미류
2020/03/28 15:48
태그 :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aumilieu/trackback/1069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