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신문을 구독하면서 마음 먹었던 일 중 하나는 경제면 기사 읽기였다. 마음씩이나 먹지 않으면 안 읽혔기 때문이다. 행간을 읽을 만한 지식이 부족하니 지금도 별반 다르지는 않다. 하지만 내 문제만은 아닌 듯하다.
사람들 먹고사는 일이 경제인데 정작 먹고사는 이야기는 사회면에 있다. 모두가 주시하는 경제성장률 전망은 경제면에 나오지만 당장 일자리를 잃거나 빚더미에 오르게 된 자영업자 이야기는 사회면에 나온다. 금리 조정 회의 소식은 경제면이 전하지만 대출이자를 갚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사회면에 실린다. 경제면의 수치들은 사회면에 배어나오는데 사회면의 사연은 경제면으로 스며들지 않는다. 경제지표나 정책이 개개인의 살림살이와 영향을 주고받는 데에는 다양한 요인이 작용하니 당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뿐일까.
코로나19로 경제 전망이 어두운 와중에도 실적을 올리는 기업들이 있다. 에스케이하이닉스와 삼성전자는 올해 1분기 매출액과 영업이익이 모두 증가했다. 코로나19 덕분이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하느라 온라인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 많아지다보니 서버용 반도체 수요가 늘어난 것이다. 온라인 쇼핑 매출이 늘면서 네이버도 영업이익을 올렸다고 한다. 그런데 ‘비대면’으로도 세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애쓰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온라인 쇼핑으로 주문한 물건을 배송하려고 뛰어다니는 사람들, 온라인으로 수업 준비하느라 모르는 기기와 프로그램 붙들고 낑낑대는 사람들, 발달장애인과 청각장애인들의 사정을 살피며 모두 온라인 수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들, 학교 가지 못하는 아이들 돌보느라 매일 두 개의 하루를 사는 사람들… 그래서 이 세계가 굴러가는데 모든 노고의 결과는 몇몇 기업의 실적으로만 측정된다.
경제성장률은 경제를 진단하는 대표적인 지표다. 얼마나 만들어내고 쓰는지를 보여주는 국민총생산의 증감률이다. 하지만 먹고사는 일과는 거리가 있다. 대학이 벌어들인 등록금은 국민총생산에 잡히지만 아이를 돌보는 엄마의 노동은 경제에서 값이 없다. 그간 경제가 값을 매기던 것과 우리를 살리는 데 값 있는 것 사이의 괴리는 코로나19 이후 더 확연해졌다. 값을 매기던 일조차 값을 한 사람들에게 돌아가지 않는 것도 더 선명하게 보인다. 경제면 기사가 어려운 건 경제가 잘못 짜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경제가 성장한다고 살림살이가 같이 피지 않는다. 경제의 성장을 기업의 성장이 대체하고, 기업의 투자가 사회의 형편을 이끌던 오랜 체제는 거꾸로였다. 살림을 오히려 망쳐왔다. 수많은 노동자들의 목숨과 건강을 위태롭게 하면서, 거리낌없이 기후위기를 가속화하고, 결국 코로나19와 같은 재난을 초래하면서 세계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지금은 인류를 위한 일인 듯 앞다투어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지만 효능이 승인되는 순간 한 제약회사의 돈벌이가 되어 인류가 휘둘리는 결과만 낳을 것이라는, 이미 겪은 일을 다시 겪어야 할까? 경제는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의 삶과 세계를 재생산하는 자리로.
경제성장이 마이너스로 내려갈 것이라는 전망은 두려움을 일으킨다. 경제가 침체될 때 가난한 사람들이 먼저 쓰러지는 건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나 문제는 위기 자체가 아니었다. 부담이 누구에게 전가되는가였다. 서로 먹여살리지 않으면 누구도 먹고살 수 없다. 서로 먹여살릴 수 있는 이 세계 자체를 살아있게 하는 것이 경제라면 경제의 축소는 두려워할 것만은 아니다. 더 적극적으로 도전해야 할 것일 수 있다. 이미 모두가 먹고살기에 넘치는 만큼을 지구에 뱉어내고 있었고, 특히나 한국은 인구감소 추세도 확인되고 있다. 서로의 노동이 연결되고 흘러 우리의 삶과 세계를 떠받치는 일에는 규모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비상경제 중대본이 ‘경제활력 제고’를 위해 원격의료를 포함한 비대면 산업을 육성하자는 논의를 시작했다. 육성하겠다는 산업과 각종 규제 완화 방안 자체도 문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여전히 경제에 대한, 한번도 진실인 적 없던 환상을 반복한다는 데 있다. 지금 필요한 논의는 마이너스를 돌려세우는 것보다, 축소될 수 없는 삶과 줄어도 되는 지표를 구분하는 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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