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창작된 작품은 과거의 음악에 동화해야 한다. 말하자면 현재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시험도 이겨내야 한다." 하필 이 문장에서 '여성의당'이 떠올라버렸다. 지휘자로 유명한 푸르트벵글러가 책 <음과 말>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고 과거와의 대결을 회피할 목적"의 창작자와 신봉자들을 비판할 때, 음악이 아니라 운동이 나를 허우적거리게 하고말았다.
"한국 최초의 여성의제 정당"을 표방한 '여성의당'의 발기취지문에서 유독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들은 '최초의 여성인권선언서'로 알려진 1898년의 '여권통문'을 불러내면서 자신들이 "122년의 시간이 지난 오늘" 다시 모였다고 했다. 122년이나 건너뛰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122년은 그들에게 긴 공백일 뿐인가? "새로운 정치를 향해 전진한다"고 선포했지만 새로운 전망을 보여주지 못하는 탓에 그저 '과거와의 대결을 회피'한 것은 아닐까.
운동에는 언제나 새로운 물결이 등장한다. 1987년 "한국 여성운동이 나가야 할 바를 밝히"며 구성된 한국여성단체연합도 새로운 흐름이었다. 90년대 중후반을 거치며 2000년대에도 '영페미니스트'라 불리는, '여성주의 운동'이라는 말을 조금더 익숙하게 만든 새로운 흐름이 있었다. '새로움'은 과거와 대결하며 선언되었다. 물론 대결 자체가 목표는 아니었다. '새로움'은 현재를 다시 읽자는 제안이었고 함께 미래를 만들자는 도전이었다. '여성'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찾아가는 여성주의자에게 내려놓을 수 없는 질문이었고, 그래서 '새로움'을 낳는 질문 중 하나였다. 여성운동은 '여성'을 구성하며 스스로, 서로 갱신되어왔다.
최근 '여성의당'이 기업에 후원금을 요구하는 광고가 논란이 됐다. 모욕감과 분노를 가라앉히고 나니 언어의 빈곤에 대한 안쓰러움이 남았다. 그간 여성노동자들을 비가시화하고 착취한 대가를, 성별임금격차만큼 덜 준 돈을, 여성을 거래하며 쌓아올린 권력을 사죄하며 돈이라도 내놓으라고 했다면, (정치자금법 등은 논외로 하고) 기업이 돈을 내놓아야 할 이유는 넘친다. 내 지갑에서 나간 돈만큼 돌려달라는 발상의 즉자성과 '여성'을 '생물학적 성별'로밖에 설명하지 못하는 앙상함이 포개졌다. 여기에는 어떤 사회 관계나 구조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그러니 '새로움'이 가능할 리 없다.
'여성의당'이 말하는 '여성 의제의 전면화'와 '남녀 동수의 정치', 실로 새롭지 않다. 여성의 정치적 대표성은 여성운동의 오랜 과제다. '새로움'을 표방하려면 기존의 운동이 어디에서 어떻게 실패했는지 평가하며 단절을 선언해야 한다. 그러나 여성 의원이 여전히 적다거나, 여성의제가 기성 정당들에서 우선순위에 밀렸다거나 하는 현상의 기술 외에 듣기 어렵다. 기성 정당이 의제로 삼도록 압박하려던 전략, 여성 의원을 늘리기 위해 공천을 활용했던 전략에 대한 평가는 없고 '독자정당'만 창작품으로 내놓았다. '새로운 정치'를 기대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그러나 정작 나를 허우적거리게 만든 질문은 이것이었다. 이들을 시험에 들게 할 과거는 있는가, 어디에. '새로움'은 오래 전부터 요청되고 있었다. 박근혜가 '여성'의 정치적 대표성을 교란시킬 때, 탄핵 국면에서 박근혜 정권 비판을 여성혐오로 대체하려는 정치의 한계가 분명해졌을 때, 촛불 이후 문재인이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자처하며 차별금지법은 나중으로 미룰 때, 새로운 정치는 시작됐어야 했다. 최소한 미투운동이 번져갈 때는. '여성의당'은 기존 운동(여성운동만이 아니라 모두)의 지체와 무기력이 낳은 공백에서 자리를 찾은 건 아닐까.
'여성의당'이 '여권통문'을 끌어온 의도는 여전히 모르겠다. "병신처럼 사나이가 벌어 주는 것만 앉아서 먹고 평생을 깊은 집에 있으면서 남의 제어만 받"는 여성 계몽이 지금 필요하다는 건가? 122년 동안 갱신된 여성운동을 건너뛴다면 혐오를 (종교가 아닌) 이념으로 조직하는 첫차가 될 수도 있겠다. 과거 없는 첫차가 될지, 과거와 대결하는 현재가 될지는 '여성의당'이 선택할 몫이다. 나는 한숨 대신 다음 문장을 입안에 채웠다. "과거와 대결할 때는 철저히 끝까지 싸워서 결론을 내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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