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업 비정규직의 정규화 그만해주십시오”라는 국민청원을 올린 분께 드립니다. 당신에게는 아니더라도 청원에 동의한 27만 명 중 누군가에게는 닿겠지요.
당신의 글에 비치는 어떤 억울함을 처음 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유난히 맴도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 곳을 들어가려고 스펙을 쌓고 공부하는 취준생들은 물론 현직자들은 무슨 죄입니까?”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냐고, 내가 왜 벌을 받느냐고 따져묻고 싶은 마음을 짐작해봅니다. 그렇게 따져물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짚어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정규직과 비정규직만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하지만 정규직도 공기업, 대기업, 중소기업이 다르고 같은 기업에서도 어떤 부서인지가 미래를 보증하는 ‘신분’이 된 지 오랩니다. 당신은 그 중에서 목표를 정해야 했겠지요. ‘학생’이라는 신분을 떠난 긴 항해 끝에 당신이 정박하고 싶은 자리를 정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을 듯합니다. 취업 컨설팅업체가 돈을 버는 이유가 있겠죠. 항로를 정하고 항해 준비를 하는 모든 과정이 되돌리기 어려운 선택의 연속이니까요. 가장 곤란한 건 항해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점이겠지요. 그 시간을 버틸 식량은 충분한지, 스펙은 충분히 챙겼는지, 늘 불안한 시간이겠습니다.
4년제 대학 졸업자의 구직 기간이 평균 5년이 넘는다더라고요. 구직에 실패하는 경험이 5년 이상 반복된다는 말이기도 하니, 어떤 시간일지 차마 짐작해보기도 두렵습니다. 어딘가에 넣을 지원서류를 준비하면서도 이게 정말 내가 원하는 직장이 맞는지 되묻게 되고, 그러면서도 손은 자기소개서를 쓰고 있고, 그런데 자기소개서에 담긴 내가 과연 내가 맞는지도 알 수 없게 되는 시간은 아닐지. 그렇게 보낸 서류에 회신이 없으면 무엇이 부족했는지 찾아내는 몫까지 스스로 떠안아야 하는 시간, 그러다가 면접을 보게 됐는데 모욕감만 남는 시간은 아니었을지. 서로 실패의 이유를 찾아주는 것이 우정의 한 방식이기도 하겠습니다. 무엇이 부족했는지, 무엇을 더 하면 좋을지, 혹시 목표를 바꿔야 하는지, 서로 정보를 나누고 조언을 해주면서요. 공공기관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은 그런 시간을 견딘 당신이 닿은/닿을 땅을 흔들어버리는 사건이었겠지요. 내가 있어야 할 자리인데, 아무나 있을 자리가 아닌데…
당신과 같은 마음들 덕분일까요? 정규직 전환은 이미 충분히 망가져왔습니다. 정부는 시작부터 기간제교사 등을 정규직 전환 대상에서 배제했고, 자회사 설립 형식으로 또다른 신분의 차이를 만들어냈고, 공사 정규직으로 전환할 때에도 경쟁채용을 남발했습니다. 전환 대상인 노동자들조차 자신이 동등한 대우를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별로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묻고 싶습니다. 미래도 권리도 층층이 나뉜 땅, 누군가는 닿지 못해서 실패, 어딘가에는 닿아도 실패인 세상이 당신이 바라는 곳 맞나요? ‘알바’이거나 ‘토익 만점도 아닌' 것은 실패의 이유가 되어야 하는 듯 당신이 말할 때처럼요. 이미 많은 청년들이, 여성이라서, 출신학교가 지방에 있어서, 외모 때문에, 부모 소득이 부족해 계단에서 떨어져온 것이 세상의 공정한 결과로 설명되는 것은 괜찮은가요? 당신은 공기업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 “역차별이고 청년들에게 더 큰 불행”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모든 실패의 이유를 비껴나는 그 ‘청년’의 자리에 누구도 들어서기 어렵게 만드는 사람도 당신입니다.
구직의 실패는 구직자의 실패가 아니라 사회의 실패입니다. 인권운동을 하는 저는 당신이 직장을 구하거나 지키는 걸 직접 도울 수도 없고 당신의 억울함을 풀어줄 힘도 없습니다. 하지만 어디에 닿든 실패가 아닌 세상을 만들고 싶고 자신의 실패를 청년에게 돌리는 세상은 바꾸고 싶습니다.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을 알기에 무작정 함께 하자고는 못합니다. 다만 당신의 우정은 조금 달랐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이 누군가에게 실패의 이유를 돌리는 걸 거들지 마세요. 그럴수록 누군가 성공한들 노력보다 운이나 배경을 질시할 뿐인 세상이 될 텐데요. 누군가의 실패 이유를 만드는 것은 멈춰주세요. 그게 무시로 자신에게 돌아오는 걸, 당신도 잘 알지 않습니까.
실패의 이유를 만들지 마세요
주간미류
2020/07/05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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