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숙 의원님, 그리고 21대 국회 의원 여러분, 저는 서울 마포구에 사는 사람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7월 30일 표결된 주택임대차보호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임차인입니다. 집주인이 나가라고 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은 너무 오래돼 익숙할 지경입니다. 계약기간이 끝나갈 때면 집주인이 세를 올려달라고 할지 그냥 넘어갈지 걱정되지도 않습니다. 얼마나 올려달라고 할지 걱정될 뿐입니다. 월세보다 전세가 좋은 건 계산 안해도 압니다.
그런데 윤희숙 의원님의 발언을 보면서 제가 기분이 좋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본회의를 통과한 개정안에 마음이 놓였느냐, 그렇지도 않습니다. 저에게 든 생각은, 주거권은 아직 멀었구나, 31년 만에 겨우 개정된 법에서 세입자의 권리가 시작되는 게 아니라 끝날 수도 있겠구나. 그게 제 고민입니다. 제 개인만의 고민이 아닌 고민입니다.
집 구하러 다니면서 전세가 줄어드는 걸 체감한 지는 오래됐습니다. 저금리 시대가 되면서 전세가 소멸의 길에 들어선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미래통합당과 더불어민주당은 소멸의 속도를 놓고 공방할 뿐입니다. 이번 법 개정으로 더욱 빨리 사라질 것이냐, 이번 법 개정은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냐. 저는 묻고 싶습니다. 속도가 어찌됐든 소멸하는 중이라면, 당신들의 대책은 무엇입니까? 세입자의 권리는 어떻게 보장할 것입니까?
전월세 비중으로 논쟁이 옮겨간 통에, 전세보다 빨리 세입자의 권리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주거권은 거창한 게 아닙니다. 해 들고 바람 통하는 집, 너무 비좁지 않고 외지지 않은 집에서, 적당한 주거비를 부담하며, 갑작스럽게 쫓겨날 일 없이 사는 겁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처한 문제는 이걸 이룰 방법이 집을 사는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전세냐 월세냐에 따라서도 권리 수준이 달라집니다. 전세가 줄어드는 게 걱정되면 세입자의 주거비 부담을 줄일 정책을 내십시오.
남의 집에 세들어 사는 것이니 전세든 월세든 세입자는 임대료를 냅니다. 그런데 임차인에게 집값까지 부담할 의무는 없습니다. ‘갭 투자’라고 불리는 현상이 있습니다. 5억짜리 아파트를 사는데 1억을 낸 사람과 4억을 낸 사람이 있으면 누가 더 주인에 가까울까요? 더 부담한 사람이 더 많은 권리를 가지는 게 상식적입니다. 그런데 집값이 오르면 1억을 낸 사람이 수익을 갖고 집값이 떨어지면 4억을 낸 사람이 돈을 잃습니다. 이걸 투자라고 부르며 용인해도 되는 걸까요? 게다가 집값을 따라 전세보증금이 오르면서 월세가 따라 오릅니다. 전세를 월세로 전환할 때의 전환율이 시중 금리보다 훨씬 높으니 임차인으로서는 날벼락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변화하는 현실에서 가난한 사람들일수록 이미 월세를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전세든 월세든 임대료의 개념을 바꿔야 합니다. 집값에 연동해 집주인 마음대로 받을 수 있는 돈이 아니라, 사용가치에 준해 공적인 규제를 받는 돈으로 말입니다. 필수적인 의료서비스에 대해 의료수가를 정하듯, 표준임대료를 정하고 적정 수준으로 주거비 부담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의 도입이 시급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걱정하는 세입자이지만 여러분이 모시는 실수요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집 없이 못 삽니다. 모든 세입자들이 그렇습니다. 집 살 기회를 늘리는 일보다 집 안 사도 걱정 없게 하는 일에 힘 쓰십시오. 집 안 사도 살만한 사회라면 집값도 이 지경으로 오르지는 않습니다.
여당은 계약갱신청구권 1회 부여하고 전월세 상한율을 5%(씩이나)로 정한 것으로 생색 내며 손 털려고 하지 마십시오. 세입자가 2년을 더 살 수 있는 법이 될지 4년밖에 못 사는 법이 될지, 임대료 부담이 누그러지는 법이 될지 치솟는 법이 될지, 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멈추면 세입자의 권리는 고꾸라집니다.
윤희숙 의원님, 임대인 걱정하는 건 말리지 않겠지만 임차인 내세우며 그러지는 마십시다. 의원님 말씀은 임대인에게 인센티브 더 많이 주고 잘 달래야 임차인도 보호받는다는 말씀인 듯합니다. 지난 5월에야 임차인이 되셔서 잘 모르실 수 있는데, 임대인 달래고 싹싹 비는 건 임차인들이 이미 수십 년 넘게 해온 일입니다.
우리는 임대인의 보호 아래 잠들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법이 부여하는 권리 위에 서기를 요구합니다. 국회가 해야 할 일이 바로 그런 법을 만드는 일입니다.
전세냐 월세냐가 가리는 것
주간미류
2020/08/09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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