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춘천

기차는 강을 따라가기도 하다가 터널을 지나기도 하면서 조용히 달렸다. 기온을 느낄 수 없는 창 안에서 본 하늘은 그저 파랗기만 했다. 눈이 조금 부셨을 뿐. 무겁게 익어가는 나무들 사이에서 간간이, 아직도 새잎인 양 파릇거리는 잎들이 보였지만 시간은 금새 어린 이파리들을 무안하게 만들겠지.



역 앞을 갑갑하게 막고 있는 담은 역시나 미군기지. Camp Page. 아이러니하게도 넓은 미군기지 덕분에 춘천 시내가 여유로워보였다. 번잡하게 자리잡은 상점이나 술집 하나 없이 한적했다. 그래도 미군기지가 곱게 보일 리는 없다. 춘천시내로 들어가는 길은 미군기지로 길게 가로막혀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 담을 따라 한참을 에둘러야 했다.

 

그렇게 걷던 길에 청소년 통행금지구역이라는 팻말이 보이고 '전통형' 업소들이 주욱 늘어서있다. 거울벽 안쪽에서 밤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없게 정갈한 거리였다. 커튼이 쳐져있거나 그렇지 않거나 한 집들 중 한 곳에서 아주머니가 청소하는 모습이 보였다. 돌아오는 길에는 강아지와 놀고 있는, '언니' 한 명이 보였다. 담배를 물고 있었다.

 

낯선 도시를 걷는 일은 꽤나 매력있다. 일단,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시간에 쫓겨 지하철을 타거나 버스를 기다리지 않아도,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돌아서기도 하다가 그냥 헤맬 수 있다는 것이 흡족스럽다. 정해진 시간까지 목적지에 가야 하는 날이었지만 몇 시간 일찍 나왔다. 바람이 조금 쌀쌀하기는 했지만 하늘은 맑았고 서울과 다르다는 것 정도는 분명히 확인되는 도시의 공기는 -약간 어거지를 쓰면- 유쾌했다.

 

정류장 앞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아저씨, 아주머니들의 억양에는 강원도의 냄새가 별로 묻어있지 않았고 그마저 지나고 나니 거리는 한적했다. 도로를 따라 걷다가 문득 눈에 들어오는 오르막이 있어 걸어보고 싶었지만 마구 헤맬 만큼의 여유가 있는 상황은 아니라 도로표지판이 시키는 대로 걸었다. 알고보니 가야할 곳으로 바로 갈 수 있는 길이었다. 조금 아득한 오르막이기는 했지만 도로를 따라 걷는 것보다 훨씬 마음에 들 법한 길이었다. 차가 별로 다니지 않았고 쭈뼛쭈뼛 서있는 건물들도 없는 아담한 길이었다.

 

시가지로 들어서니 나름 도청소재지다운 풍경들이 이어졌고 사람들 모습에서도 '도시스러운' 기운이 느껴졌다. 목적지에 가까운 곳에 여고가 있었고 수업이 끝났을 만한 시간이 아니었는데도 학생들이 쏟아져나왔다. 나도 저런 얼굴로 친구들과 까르르 웃던 때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스치는 걸 보니 시간이 흐르기는 하는구나 싶었다. 근처에서 간단하게 끼니나 할 요령으로 돌아다니다가 찾아낸 이삭토스트 가게에는 할아버지 한 분이 어색한 손놀림으로 토스트를 굽고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 그냥 발길을 돌렸다.

 

기다리던 형이 내준 샌드위치는 딱 적당하게 배를 채워주었고 일을 마친 후 다시 기차를 타고 돌아왔다. 지하철에서 나와 집에 닿을 즈음엔 날이 어두워져있었고 그만큼 더 쌀쌀해진 날씨에 흠친 놀랐다.

 

오늘은 날도 흐리고 쌀쌀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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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11 16:37 2005/05/11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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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anjang_gongjang 2005/05/13 15:47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글을 읽으면서 비둘기호 타고 경춘선 철도를 달려 춘천 중도로 과 동기들과 M.T를 갔던 16년전이 생각이 나네요.^^
    처음 가본 춘천이었고, 두번째 춘천을 방문한 것은 이전 같은 단위에 있던 동지가 춘천교도소에 있어서 면회를 갔던 기억이 춘천에 갔던 기억의 전부이네요.
    정작 춘천막국수와 닭갈비는 못먹고 온 것이 못내 후회되지만....

  2. 미류 2005/05/13 16:0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막국수와 닭갈비 ㅎㅎ 춘천보다 춘천 아닌 데서 더 많이 보이지요. ㅡ.ㅡ
    간장 이야기 들으니 저도 비둘기호 생각이 오랜만에 나네요. 노래에서나 나오는, 덜컹이는 기차... ^^

  3. sanori 2005/05/13 18:4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춘천역앞 미군기지는 여전히 그대로? 삼악산 갔다 내려와서는 춘천역앞에서 올라올 차비 없어서 구걸하던 생각이...ㅎㅎ

  4. 미류 2005/05/15 20:27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혹시 지난 블로그 오프 산행 모임 때? ^^;;

  5. rivermi 2005/05/15 23:43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요즘의 일교차는 봄날 일교차가 아니라 초가을날씨예여ㅠ_ㅠ;;
    나이들어 더 추위를 느끼는건지.ㅋㅋ
    나두 춘천 함 가보고 싶당~~

  6. sanori 2005/05/16 10:4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아뇨, 아주 오래전, 학생때쯤이겠죠..

  7. 미류 2005/05/17 11:3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미갱, 저도 추워서 ㅠ.ㅠ 이러다가 갑자기 더워지면 정말 끔찍할 것 같아요.

    산오리, ㅎㅎ 학생때의 산오리를 상상하기가 쉽지는 않네요. ^^;;

  8. azrael 2005/05/18 10:5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10년쯤 전에 춘천에 놀러간적이 있었는데...오리배 타고서 고생한 기억만..ㅠ.ㅠ

  9. 미류 2005/05/18 21:0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오리배? 와, 그런 게 있군요? ㅎㅎ 저는 놀러간 건 아니라서 사실, 길을 걷는 것 말고는 못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