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다만 선유도

#1.

새벽같이 길을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떠나기 전날밤에는 적당히 일어나는 대로 가야겠다며 알람도 맞추지 않고 잠을 청했다. 아침은 스물스물 찾아왔고 어제와 다르지 않게 어영부영 일어나 짐을 마저 챙겼다. 일주일 치라 만만치가 않다. 이번에는 밥도 제대로 해먹고 다니자며 쌀이랑 김치랑 밑반찬들까지 꼼꼼히 챙겼다. 뒹굴거리다가 생각나면 읽으려고 책을 몇 권 넣었더니 가방이 어깨를 묵직하게 누른다. 고속터미널에 닿을 즈음에는 벌써 어깨가 화끈거렸다.



연휴 마지막날 내려가는 길은 걱정만큼 막히지 않았다. 예상했던 시간에 군산에 닿았고 여객선터미널까지 가는 버스를 한 시간쯤 기다렸을 뿐이다. 버스정류장에 있던 한 아저씨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마다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다고, 어디 살지 않냐고, 누구 알지 않냐고 물어보며 말을 건넨다. 딱 봐서 외지인처럼 보이는, 커다란 등산배낭에 등산화를 신은 나에게까지 말을 건네지는 않는다. 내가 올 버스를 기다리는 것인지, 오지도 않을 버스를 엉뚱한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것인지 물어보려는데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기다린 한 시간은 길기도 했다.

 

#3.

가장 늦은 배를 예약해뒀더니 이래저래 시간을 잡아먹었는데도 두 시간 전에 출발하는 배가 기다리고 있다. 지금 타고 가시겠냐고 묻는데 잠시 망설였다. 민박이 되냐고 물어보려고 메모해둔 전화번호가 계속 자동응답기만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든 잘 곳이 없지는 않을 꺼라는 뻔한 생각을 하면서도 불편하게 배에 올랐다.

 

#4.

한 아줌마가 이불보따리를 앞에 두고 다른 아줌마와 끝도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배는 뭍을 떠났고 바다를 보기는 아직 이른 데도 이야기를 듣는 것이 피곤해 잠을 청했다. 잠시 눈을 떴더니 그새 아줌마는 배에서 일하는 아저씨들과 다시 끝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다시 잠을 청했고 선유도에 닿을 때쯤 눈을 떴다. 그새를 놓치지 않고 아줌마가 말을 걸었다. 궁지에 몰렸다는 느낌. 혼자서 놀러왔다고 하니 자기가 하는 민박집에 가잔다. 장자도 지나 대장도까지 들어가서 민박을 하려고 했는데 막상 권유를 받으니 민박집이 있을 지 없을 지도 모르는 곳까지 3~40분을 걸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값이나 흥정하자며 일단 따라나섰다.

 

#5.

민박집은 아직도 마무리가 끝나지 않은 곳이었다. 주인 내외도 군산에서 살다가 선유도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고등학교를 다니는 딸이 있다는 아줌마는 나이도 어려보였을 뿐더러 쉬지 않고 말하는 모습이 어찌나 '어려보이'기만 한지 난감했다. 아저씨가 이틀 후면 뭍으로 나가야 해서 혼자 있으면 무서우니 주말까지 함께 있자고 하신다. 하루 묵고 대장도로 들어갈까 싶었는데 대충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짐을 부리고 며칠 살 준비를 했다. 싸들고 간 음식들도 칸칸이 정리해놓고 옷은 옷대로, 책은 책대로 대강 구역을 나누어 쌓아두었다. 비수기라 넓은 방을 내어주셔서 대강 흐트러놓아도 뒹굴기에 충분한 공간이 남았다.

 

#6.

눈먼 자들의 도시, 를 다 읽었다. 사람들은 보이지만 보지 않으려 할 뿐이라는 소설이다. 정신없이 읽어내리다보니 눈이 멀다는 것의 이미지가 혼란스럽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혼자 있는 나는 눈이 먼 것과 무엇이 다를까. 세상 모든 사람이 눈이 멀게 된 때 오직 한 사람만 눈이 멀지 않을 수 있다면 나는 눈먼 사람이 되고 싶을까, 눈이 멀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을까.

 

#7.

아침부터 비가 오락가락 한다. 새벽에 일어나 책장을 뒤적거리다가 개켜놓은 이불을 끄집어내 다시 잠을 청한다. 바득바득 깨어있을 필요가 없었으니 잠을 청했다기보다는 그저 누워있다가 잠이 들었던 거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슬 나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제 해놓은 밥과 김치찌개로 요기를 했다. 나가야 하는데, 나가볼 때가 됐는데 하면서도 몸이 잘 움직이지를 않는다. 막상 길을 나서려니 외롭다는 느낌이 언뜻 스친다. 외롭다는 건 그냥 방문에서 현관까지 나가는 길이 쓸쓸했다는 거다. 발을 떼고 나니 조금씩 설레기 시작한다. 비는 계속 오락가락하며 흩날리는데 그냥 나서기로 한다.

 

#8.

섬으로 들어왔던 선착장 근처에 잘생긴 지도가 있다. 대략 파악이 된다. 인터넷을 뒤져 인쇄해간 지도를 보며 상상했던 게 얼추 들어맞는다. 선유도는 선유1,2구를 중심으로 세 팔을 뻗고 있는 모양이다. 동쪽으로 선유 3구, 북쪽으로 장자도, 대장도, 남쪽으로 무녀도. 오늘은 일단 장자도 거쳐 대장도로 간다. 내가 메모해둔 민박집이 문을 열었을까 그게 여전히 궁금했다. 섬은 작다. 아줌마는 대장도까지 한참이라고, 걸어서 못 갈 곳처럼 말했지만 걷다보면 금새 나온다. 장자대교를 지나 다소곳이 앉은 섬이 장자도다. 초입에 다섯 가구쯤, 섬 안쪽 선착장 근처로 열에서 열다섯 가구쯤 살고 있는 듯했다. 장자도를 지나 작은 다리 하나를 건너면 대장도다. 그 곳도 열 가구가 채 안되는 집들이 모여있다.

 

#9.

다리 건너 백미터도 못 되는, 방파제 끝까지 걸어갔다 돌아오자 싶었는데 작은 봉우리로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대장도는 바다 위로 올라앉은 대장봉이 섬 전부인 셈이다. 그 자락에 집이 몇 채 들어앉아 있는 것이다. 초입을 찾지 못해 마침 보이는 할머니에게 길을 물었더니 그리로 가다보면 계단이 보인다신다. 보이겠지 하면서 걷는데 할머니가 거기라고 뒤에서 큰소리로 알려주신다. 길을 일러주고 내내 보고 계셨나보다. 세상의 모든 할머니들은 그렇다고 이야기해도 잠시 고개 끄덕일 수 있다.

 

#10.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산에서 가장 무서운 건 거미줄이다. 잘 살피면서 다녀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미줄이 있다. 얼굴에 뭔가가 턱 달라붙으면서 오그라드는 느낌이 들면 나는 손을 훼훼 내저으며 다짜고짜 뭔가를 잡아 뜯어낸다. 잘 떨어지지 않는 게 당연하다. 그냥 놀란 손이 제멋대로 움직일 뿐이다. 거미줄에서 쉬고 있던 거미가 깜짝 놀라 내 몸을 마구 기어다닐까봐, 그게 제일 무섭다. 거미줄을 뜯어내다가 덩어리같은 게 만져지기만 해도 그게 거미일까봐 온몸을 다 흔들며 털어낸다. 거미도 눈이 있다는 게 이럴 때 도움이 되는 정보인지는 모르겠다.

 

#11.

거미줄에 익숙해지면서 나뭇가지에 붙어있는 한쪽 끝을 슬쩍 떼어내 거미줄을 한쪽으로 치운다. 길은 봄에 나물캐러 동네 사람들이나 가끔 다녔을 법한 길이다. 그래도 사람이 다녔던 길은 자욱이 분명하다. 중턱쯤 오래된 집, 들보와 골격만 남은 한칸짜리 집이 있었고 여기서 끝나나보다 하며 담배를 한 대 물고나니 다시 길이 보인다. 부르는 걸 어떡하나. 조금만 더 가보자며 가던 길이 어느새 봉우리까지 닿는다. 시원하다. 장자도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집들이 멀찍이 보이고 내가 묵고 있는 곳을 가리고 있는 봉우리가 마주보고 있다. 선유 3구의 망주봉도 반대쪽에서 보이고 무엇보다 바다가 보인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바다가 사방을 두르고 있다. '그 섬에 가고 싶'은 이유.

 

#12.

내려오는 길에 장자도도 한 바퀴 돈다. 들어가야지, 이제. 지도에는 어딘가 가로지르는 길이 있었는데 초입이 눈에 띄질 않는다. 선유봉 사이로 길이 있을 듯하기는 한데 선뜻 발을 들여놓지는 못했다. 조금 더 가다보니 초등학교 너머로 작은 길이 엿보인다. 혹시나 하고 들어서며 물어봤더니-역시 할머니였다- 맞았다. 넘어가면 선유1구다. 몇몇 교실은 수업 중인 듯했고 교정의 맨 뒷쪽의 연습실에서는 풍물 연습이 한창이었다. 나중에 동네 아이들이 말해준 대로라면 중학생이 모두 8명, 초등학생이 13명, 그 중 1학년이 한 명, 이 정도다.

 

#13.

별로 걷지도 않은 듯한데 다리가 후들거린다. 씻고 잠시 누우려는데 전화가 온다. 전화를 두세 통 하고 나서 그리 좋지 않은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 후로 전화를 대여섯 통 하고 제주도로 갈 준비를 마쳤다. 모처럼 시도한 선유도에서 뒹굴거리기 프로젝트는 반쪽짜리도 못되고 끝나게 생겼는데 그다지 아쉽지도 않았고 하루가 지나서야 섬을 나가 제주도로 갈 수 있는데 그다지 조바심이 나지도 않았다. 멍하니 남은 시간 동안 뒹굴거리기.

 

#14.

날이 어두워지니 소주라도 한 잔해야지 싶어 민박집을 나섰는데 횟집이나 슈퍼나 불을 켜놓은 곳이 없다. 해수욕장에 나갔더니 자갈들을 쓸어내리는 파도 소리가 편안해 좋았는데 뒤에서 자꾸 말 붙이는 아저씨가 있어 일어나버렸다. 민박집으로 들어가려는 나를 동네 아이들이 붙잡아 이야기하며 놀자길래 같이 앉아 이야기나누다가 들어왔다. 팩소주 챙겨오지 못한 걸 후회하다가 잠이 들었다.

 

#15.

바람은 사이렌 소리 스무 개를 합쳐놓은 것처럼 울어댔고 반쯤 열어놓은 창문으로 빗줄기가 쏟아져들어오고 있었다. 새벽 몇 시쯤인지. 고기잡이 나갔던 배가 허겁지겁 들어와 배를 대고 있었다. 잠이 쉽게 들지는 않았다. 다시 깨었을 때도 새벽 몇 시쯤. 이번에는 아줌마가 "빠치선"이라고 불렀던 큰 배-갑판만 있는 배-가 들어와있었다. 중장비들을 싣고 나갈 채비를 하는 중이었다. 뒤척이다가 다시 깨었을 때 비는 멎어있었다. 바람소리만 허공에 대고 꺼이꺼이. 초등학교 다닐 적 3년을 바닷가 마을에 살았다. 그때는 태풍이 정말 무서운 것이었는데 비바람 소리가 마을을 그렇게 쓸고 가면 늘 장례를 치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5학년 때 친했던 친구 한 명이 오랜만에 생각나네.

 

#16.

물이 빠지면 앞바다에 떠있는 작은 섬들은 검은 밑둥을 드러낸다.

바다는 하얗게 시비를 건다.

보기싫다. 보기싫다.

하지만 음부를 드러내고 나앉은 섬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도 결국 바다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 맨살을 핥으며 덮어주는 것도 결국 바다.

 

#17.

날씨가 이런데 배가 뜨나요? 딱히 어떤 대답을 기대하고 여객선터미널에 전화를 해본 것은 아니다. 뜨면 뜨는 대로, 안 뜨면 안 뜨는 대로. 비가 뚝 그치면 무녀도라도 다녀올까 싶었는데 그치는 듯 그치는 듯하면서 계속 나린다. 짐을 싸야할 시간.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5/09/22 01:26 2005/09/22 01:26
태그 :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aumilieu/trackback/317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감비 2005/09/22 01:5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1. 슬며시 졸면서도 '일주일치'의 짐을 부러워하며 읽기 시작했다가 '아빠가 간암'이라는 데서 화들짝 잠이 깨버렸어요. 뭐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 미류가 알아서 잘 하겠지요?
    2. 거미줄을 무서워하는구나...하하

  2. 미류 2005/09/22 19:0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잠을 깨웠다니... 지워야겠네요. ^^;;
    거미줄 무서워요. 하하. 혼자서 온갖 요란을 떨며 한 시간 거리도 안되는 산을 올라갔다왔어요.

  3. 일어나!! 2005/09/25 16:3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선유도서 쉬시면서 힘 받고 오셔야할텐데... 힘내시길^^

  4. 미류 2005/09/26 21:2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넵~ ^^
    선유도는 언젠가 다시 가보고 싶어요. 미완의 프로젝트가 되어버렸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