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승을 허하라

지하철역을 종종걸음으로 빠져나왔다. 빨리 사무실로 가서 고구마와 감자를 챙겨 다시 길을 나서야 한다. 여기저기서 보내주신 고구마와 감자들을 한아름 안고 더불어사는집에 가려다가 기어이 터지고만 울음 때문에 발길을 돌린 것이 벌써 일주일 전. 오늘은 꼭 들러야겠다 생각하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주섬주섬 상자에 담고 끈으로 묶어 들고 나왔다. 버스를 탔더니 "환승입니다" 한다. 오우, 예상치도 못했던 환승할인에 빙긋 기분이 좋아지던 찰나, 곱씹다가 삼키지못한 한 아저씨 생각이 기어이 나고야 만다.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상영한다는 영화를 보러 버스를 타고가는 길이었다. 버스가 꽉찬 것을 보니 조금 늦게 온 버스인가 했다. 종로4가쯤이었나. 한 아저씨가 버스에 오르자마자 대뜸 기사에게 "너 몇 분만에 왔어?" 하며 고함을 지른다. 기사가 조용한 목소리로 24분만에 왔다고 말하는 걸 듣는지 마는지 계속 욕설을 퍼부었다. 갖가지 욕설이 다 나왔다. 버스가 늦게 온 것이 기사의 잘못은 아닐텐데 참 험하게도 말한다 생각하며 앉아있는데 이 아저씨 욕설이 끊이지 않는다. 듣고 있기 꽤나 불편한 말들이었다. 이미 "쟤 뭐냐?"는 비아냥과 "아저씨 혼자 버스 탔냐"는 짜증들이 웅성거리는 버스 안에서 간간히 터져나오고 있었다.

 

뭐라고 한마디라도 해야겠다 생각하다 말았다. 정류장을 두어 개 지나치는 동안 이어지는 욕설들 속에서 추려낸 상황들을 추스리다보니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 아저씨는 무슨 배달일을 하는 중이었고 환승을 하려고 기다리다가 버스가 30분이 지나서 오니 환승할인을 받지 못하고 800원을 고스란히 내야 하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이쯤에서 천원짜리를 꺼내 앞으로 전달하라는 분도 한 분 나섰다.

 

800원. 나는 아직 800원에 그렇게 속상해본 적은 없다. 쟤 뭐냐는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을 정도로, 세상에 있는 욕이란 욕은 다 내뱉으면서 화를 풀고 싶을 정도로 800원에 아쉬워해본 적은 없다. 그렇다고 800원 가지고 저러냐며 더욱 몰아부칠 만큼 순진하지도 못하고 천원을 기꺼이 내미는 것이 내 역할이어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우아하지도 못하다. 그저 빈곤층이 천만명을 넘어섰고 이 세상은 끝없이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나락으로 빠뜨리고 있다며 분노하면서도 800원에 대한 분노는 상상해보지 못한 어설픈 활동가. 가난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직접행동에 나설 때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며 이런저런 계획들을 머리 속으로 그려보지만 세상을 비집고 들어서야만 하루하루를 이어갈 수 있는 그/녀들의 삶 앞에서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는, 그런 설익은 활동가일 뿐이다.

 

그래도, 가진 게 아직 입뿐인 나는 오늘도, 말한다. 환승을 허하라. 매일같이 신경을 곤두세우며 운전을 하는 것으로도 부족하다고 수익을 높일 것을 요구받는 버스기사에게 악다구니를 부려야 하는 세상을 내리고 싶다. 토요일 저녁까지 배달일을 하면서 버스를 타야하는 사람이 스스로 무안해하면서도 환승이 안 되는 걸 책임지라고 소리질러야 하는 세상을 내리고 싶다. 창밖으로는 하루가 다르게 들어서는 빌딩들과 노력하는 자는 누구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광고만 반복해서 보여주는 이런 버스는 필요없다. 우리가 원하지 않은 속력으로, 우리가 원하지 않은 방식으로 모두를 몰아부치며 발길질해대는, 쫓아오지 못하는 이들은 달리는 차에서 밀어내버려 더이상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로 만들어버리는, 이런 세상은 멈춰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세상에 올라탈 것이다. 환승을 허하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5/11/18 23:39 2005/11/18 23:39
태그 :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aumilieu/trackback/339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돕헤드 2005/11/20 13:37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그래요. 다른 세상으로 가는 버스가 있다면 지금 우리가 탄 버스에서 내려서 그 버스에 올라타는 것이 진정한 환승이겠네요. 그런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라면 몇 시간이라도, 몇 년이라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아요.

  2. 행인 2005/11/20 15:3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저도 저런 경우 꽤 있었는데, 정말 속상하죠. 800원이 적으면 적은 돈이지만 돈 몇푼 보다는 '신뢰'라는 것이 깨질 때 느껴지는 허망함 같은 거...

    세상이라는 큰 이야기는 접어두고라도,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수단, 이거 탈 때마다 느끼는 건데, 이런 탈 것들은 무료로 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많이 합니다. 재원이 문제가 되겠지만 당장 버스공영만 제대로 되도 거의 무상에 가깝게 편의를 제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나라 버스노선은 개인의 사유재산이거든요. 그것도 대대손손 상속되는... 뭐 이런...

  3. 현현 2005/11/20 21:3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우리가 원하지 않는 속력으로 가는 세상...
    그래요, 다른 세상에 올라타고 싶어요

  4. 미류 2005/11/21 09:3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돕헤드, 그러게요. 지루하지 않게, 오히려 즐겁게 지금 타고 있는 버스를 멈추고 다른 버스로... ^^;;

    행인, 저도 그래요. 100원씩 올릴 때는 그냥 오르나보다 하지만 벌써 800원이잖아요. 대중교통수단은 공공이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 무상교통! ^^;; 근데 서울시 버스노선 개편하고 나서 다 서울시 꺼 된 건 아닌가요?

    현현, 같이 가요~ ^^

  5. 머프 2005/11/23 16:3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다른세상에 올라 타고 싶다...우리 모두 다 같이
    다른 세상을 '만들어서'..

  6. 미류 2005/11/24 09:3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네, 만들어요! 우리 모두 다같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