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음님의 [노동할 권리와 노동시간단축] 에 관련된 글.

역시 글로 주고받으려니 힘드네요.

저는 모여서 그림 그리면서 얘기하는 거 좋아하는데~ ㅎㅎ

 

노동과 소득의 분리에 대해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노동'과 '소득'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비슷한 얘기가 되기도 하고 다른 얘기가 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자본주의 사회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사용하도록 허락한(강요된) 대가로 임금을 받고 그 소득으로 자신의 삶을 유지해야 하는 사회입니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비슷한 입장일 것 같네요.



지음은 일정한 사회적 기여로서의 노동에 대한 대가로 소득이 주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이를 위해 현재 임금노동의 범주에 포괄되지 못하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노동을 '소득이 주어질 만한 노동'으로 만들자고 주장하는 것 같구요.

가사노동이나 보살핌노동과 같은 것들이 이 경계에 놓여있는 대표적인 노동인 것 같습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가족임금이라는 형태로 기여가 인정되기도 하지만 이것이 여성의 노동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제도인지, 오히려 여성에게 억압적인 제도는 아닌지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음이 말하는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혜택'이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데에 동의해요. 시혜는 박탈이기도 하다는 지적은 명쾌합니다. 그래서 시다바리님이(아, 난 '님'자는 잘 안 붙이는데 시다바리가, 라고 쓰려니 너무 어색해서... ^^;;) 말했듯 권리 개념의 도입이 필요합니다. 이때 무엇에 대한 권리를 요구할 것인가가 문제겠죠.

 

인권은 인간다운 삶을 실현해가기 위한 권리입니다. 인간다운 삶은 누구에게나 다를 수 있겠죠. 하지만 인간다운 삶을 실현해가기 위한 기회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구조에서는 인간다운 삶을 실현하기 위한 기회가 개인의 소득에 따라 좌우됩니다. 그래서 소득이 적은 사람들에게는 '복지'가 작용하고 특히 신자유주의 시대로 들어오면서 '노동연계복지'가 강조되는데 사실 '복지'의 패러다임은 출발부터 임금노동의 절대화를 지향했습니다.

복지제도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구빈법은 일하지 않는 사람들을 범죄자로 취급하는 것이었고 일하는 사람들보다 많은 급부를 제공받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열등처우의 원칙이라고도 하더군요. 그 후로도 이 패러다임은 크게 바뀌지 않습니다. 복지가 사회를 관리하기 위한 시도라는 말은 다만 가난한 사람들의 저항을 유예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를 지탱하기 위한 저임금노동을 유지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노동연계복지입니다.

 

그러나 인간다운 삶을 실현하기 위한 기회가 반드시 소득으로, 임금으로 보장되어야 할까요. 그것은 오로지 개인의 몫일까요. 우리는 이미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현실이 쉽게 바뀌지 않을 뿐, 우리 모두의 인간다운 삶은 사회적 관계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한 기회는 당연히 사회가, 공동체 성원들이 함께 보장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삶의 기회를 소득으로 환원하는 경향을 우려합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생존권을 주장하며 임금투쟁을 하고 최저생계비를 높이기 위한 투쟁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방식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사회공공성'이라는 화두를 쥐고 그 고민을 하고 있어요. 이를테면, 전기를 사용하는 만큼 전기세를 내는 방식이 아니라 전기가 필요한 만큼(쓰고 싶은 대로 아무렇게나 쓰자는 게 아니라) 사용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을 공동체가 부담하는(능력에 따라... 이것두 어디서 많이 들어보던 거네~ ^^;) 방식으로의 전환 같은 것요. 전기뿐만 아니라 주거와 교육, 노동, 의료서비스와 문화활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우리의 삶을 즐겁게 만들어가기 위한 기회들이 보장되는 구조를 만들어가자는 거죠. 노동할 권리와 의무의 바탕에서 노동시간을 줄여가자는 지음의 주장과 만나는 부분이기도 한 것 같네요. (그리고 저는 '결과의 형평성'에 대한 고민도 사회공공성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건 나중에 기회가 되면...)

소득의 재분배로 비슷한 기회를 보장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산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을 건드리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인간다운 삶의 기회를 보장하기 위한 구조로의 전환, 소득의 형태로든 급여의 형태로든, 근본적으로는 생산의 영역에서, 중요한 가치는 '노동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이것은 임금노동과 자본이라는 틀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장애/비장애 등 노동력의 '차이'들을 어떻게 녹여내야 할 지 어렵게 만드는 지점이기도 하죠)이기보다는 '인간다운 삶을 실현하기 위한 기회의 보장'이라는 식의 전환을 만들어가자는...

이를테면 블로거들에게 무조건 소득을 인정해야 하느냐, 포스팅의 양과 질에 비례해 소득을 인정해야 하느냐가 아니라 포스팅을 하고 싶은 사람이 포스팅을 할 수 있도록 누구나 소득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방향으로 가자...는 의미에서 노동과 소득의 분리가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헤헤. 우리는 지금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 걸까요? 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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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15 11:30 2006/03/15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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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음 2006/03/15 13:51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비슷한 얘기인 것 같아요. ^^ 생각을 더 해보고 답글을 달아야 하겠지만, 일단 큰 오해 하나를 막기 위해서...
    저는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오해가 있을 것 같아서,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노동을 '소득이 주어질 만한 노동'으로 만들자는 표현을 제 두 번째 글 마지막에서 폐기한 거구요.
    하튼,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더... 언젠가는 꼭 만나서 얘기를 해 봐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블로그에서 어디까지 가능한가를 한 번 보고 싶기도 하네요. ㅋㅋㅋ

  2. 미류 2006/03/15 14:1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아, 왠지 오해할 것도 같아서 따로 적을까 하다가 말았는데...
    저도 지음의 주장이 그렇다고 이해한 것은 아니예요.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노동으로 인정받는 것이 보통은 임금이 주어지는 것으로 인식되기 쉽다는 점, 그래서 다른 방식의 인정 혹은 이해를 만들기가 어렵다는, 그런 얘기였어요. ^^;
    하튼, 그 말... 차마 꺼내지 못한 말. ㅋ

  3. 조커 2006/03/16 06:5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소득을 해법으로 제시하는 것에는 반대하지만, 그것의 반대항이 공공성이라는 것은 좀 취약할 부분이 많을 것 같아요. 어디까지를 공공재로 결정하고 어디까지를 공동체로 결정하는가가 어렵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기존에 제시된 꼬뮌들이 가지는 한계로 보고 있죠. 어딘가에선 선물 등의 개념을 내밀기도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탐탁치 않구요.

    "필요한 만큼"이란 개념이 너무 어렵지 않을까요. 얼마만큼이 진정으로 필요한가는 진보주의자와 생태주의자 둘만 봐도 첨예하게 대립할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게다가 필요라는 것 자체는 자칫 질이 아닌 양의 문제로 환원될 위험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기회의 보장"은 상당히 어려운 개념인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그것이 어떠한 기회인가는 쓰여질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죠. 개인적으로는 기회보다는 "생존"에 주안점을 둬요. 좀 거칠게 말하면 어떠한 기회든 그것이 생존을 보장하지는 않죠. 제가 보기엔 기회보다는 생존이 다양한 활동들을 끌어내구요. 즉, 다양성은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체가 생존술이라고 보는 거죠.

    어쨌든 기회보다 생존에 주안점을 둔다고 단순히 말을 교체해서 "생존의 보장"이라고 하면 웃기게 되겠죠. 생존은 외부에 의해 보장되는게 아니니까요.

    (사실은 분배와 마찬가지로 기회란 말 자체에 저는 강한 의구심을 표하고 있죠. 속이기 위한 형이상학의 언어이라고 보니까요.)

  4. 미류 2006/03/16 20:1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조커, 오랜만이예요. 다른 블로그에서 간간히 봤어요. ^^;;
    공공성이 취약한 부분이 많은 건 사실이예요. 아직 애매한 부분이 많죠. 다만 생산수단의 사적소유 폐지라는 명제를 좀더 발전시킬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그렇게 시작하고 있어요. 조커가 얘기하는 것들이 많이 공감되네요.

    "필요한 만큼"이란 개념을 놓고 '진보주의자'와 '생태주의자'의 대립을 극복하는 것이 지금 운동의 과제 중 하나일 것 같아요.

    "기회의 보장"은 조금 생각이 다른 것 같아요. 저는 생존이 인간다운 삶을 실현하기 위한 기회 중 하나라고 생각하거든요. 기회라는 말을 어떤 가능성의 형태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조건으로 보는 거죠. 굳이 '생존'이라는 말을 피하는 이유는 그 개념은 '최소한'이라는 개념을 벗어나기 힘든 것 같아서-최저임금, 최저생계비 등- 이고 다소 획일적인 느낌이 들거든요. 기회는 각자가 어떤 삶을 원하는지에 따라 다르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까지 고민하게 하지 않나 싶어서요. 그래서 조커가 말하는 '다양한 활동을 끌어내는 생존'은 제가 말하는 '기회'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구요. 근데 인터넷의 사용이나 영화관람과 같은 것을 생존이라고 이름붙이기는 조금 뻘쭘한 것도 같구...^^;;

    그래도 기회라는 말이 자유주의자들에 의해서 더욱 많이 쓰이는 말 같아 저도 조심스럽기는 해요. 속이고 싶지는 않은데... ^^;;

  5. 슈아 2006/03/16 23:5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미류 말 처럼 기회라는 말이 자유주의자들이 더 많이 쓰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기회의 보장'이란 말은 한번쯤 생각해 봐야할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는 '존재의 평등'이랑 다아있는 것도 같고. ^^

  6. 조커 2006/03/17 11:0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허억, 미류님이 누굴 속이기 위해서 기회란 말을 사용한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ㅠ_ㅠ
    걍 경제학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언어에 강한 불신을 표하는 것 뿐이죠... (저는 그게 자유주의 경제학이건 맑스주의 경제학이던 동일하다고 보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생산수단은 갈수록 애매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최근 화자되고 있는 웹 2.0 등에서는 집단지성(개인적으로는 오역인 듯 싶기도 하지만요) 등이 거론되고 있는데, 이건 좀 격하게 말하면 집단지성을 착취해서(개인적으로는 착취라는 말에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가치를 창출한다는 내용이거든요. 여기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생산하는 것이며 어디까지가 생산수단이며 그것을 어떻게 사적소유가 불가능하게 할 것인지가 애매해지죠. (플랫폼을 베이스로 볼 수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오픈 플랫폼으로 가는 추세죠. 이것을 자본의 탈근대적 변형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도 있지만요.) 그런 고민을 극도로 단순하게 변환하면 국가에 의한 독점소유 및 분배 형태가 될 꺼구요.

    개인적으로는 생산/소비의 범위가 애매하다고 보구요. 게다가 저는 생산과 소비의 경계가 지워지는 경향이 있다고 보거든요. (그 애매한 범위들이 섞이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죠.) 자율주의자들은 사회공장을 이야기하는데 정확히 비슷한지는 잘 모르겠어요. 개인적으로는 단순히 상품의 생산/소비라는 모양새보다는 가치의 생산/소비, 또는 누구처럼 기호의 생산/소비로 보는게 타당할 것 같아요.

    다양성을 바라보는게 약간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 저는 다양성은 지향되어야 할 것(즉 선택의 문제)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구현되는 것으로 보거든요. 즉, "다양하자!"가 아니라 역으로 생존하는 것들은 "이미 다양하다"라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생존의 조건이 되는 다양성을 제거하는 통합에 대해서 반대하는 거죠.

  7. 미류 2006/03/18 13:5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슈아, '존재의 평등'에서 함 만나요~ ^^;;

    조커, 저도 그렇게 들은 건 아니었는데~ ^^;;
    정보산업(?) 쪽 이야기들이 조커 말처럼 생산수단과 가치, 소유 등에 대해 새로운 고민꺼리들을 던져주기는 하는데 저는 들으면 무슨 말인지 너무 모르겠어서... ㅜ.ㅜ 플랫폼이 뭐예요? ㅠ,ㅠ 그쪽에서는 조커 말처럼 상품과 가치와 기호의 경계가 애매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생산'이 무엇인지에 대한 좀더 풍부한 혹은 명확한 정의가 필요한 것두 같구... 쨌든 어렵네요.
    다양성을 지향으로서가 아니라 구현으로서 혹은 조건으로서 보자는 조커의 말은 귀가 솔깃해집니다. 좀더 생각해볼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