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를 다닐 때 살풀이춤을 배워 공연한 적이 있다. 그때 시장에서 떼 와 양끝을 홈질로 마감하고 들고나갔던 명주수건을 서울로 챙겨왔다. 쓰임새는 별로 없어, 스카프처럼 둘러볼까 했으나 영 어색하고, 얼마 전까지 창의 블라인드 위로 장식처럼 걸쳐두었다가 -동생한테 궁상이라고 핀잔들었다나- 최근에는 뭘 덮어놓는 용도로 써서 먼지가 뽀얗게 앉았다.
아침에 그 명주수건을 울샴푸 써서 살살 주물럭거리며 빨았다. 서울로 가져온 이래 처음으로 빨아봤다. 명주수건을 빨다가 문득 이런 게 어른이 되는 거구나 싶었다. 명주라 세탁은 드라이클리닝밖에 안되는데 쓰임새도 별로 없는 명주수건을 세탁소 가져가기가 뭣했던 것인데, 사실은 울이나 견직물을 울샴푸로 손빨래할 생각을 못했던 것이기도 하다. 서울로 올라온 첫 몇 년은 아예 면으로 된 옷만 입었더랬고 동생과 같이 살면서부터는 슬슬 동생의 울 니트를 빌려입기도 했는데 그 빨래들은 모두 동생이 했더란 거다. 세탁기 돌리는 거야 나도 할 줄 알고, 굳이 따지면 손빨래하는 법을 몰랐던 것은 아닌데, 그저 손빨래를 하지 않았을 뿐인 게다. 내가 입은 옷도 온전히 간수하지 못했더란 얘기.
동생이 잠시 집을 떠나있는 동안 집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하다보니 동생 덕을 많이 봤다는 새삼스런 깨달음도 얻었지만, 어른이 되고 있다는 걸 은근히 느낀다, 서른이 넘어서.
명주수건을 번거로이 챙겨온 것도 그 기억이 내가 '자란' 기억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밤늦게 연습실에서 혼자 춤을 익혔던 것이나, 살을 푼다는 말에 담긴 삶의 무게, 그것을 수건으로 흩뿌리는 비움의 매혹을 맛봤던 것이나, 어른이 되는 느낌이었던 것. 그 명주수건이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나를 자라게 했네. 자취의 노하우를 넘어서 내 삶이 작동하게 하는 것들을 꾸준히 들여다봐야겠다.
+ 응당 했어야 할 일들을 평소에 워낙 안하다가 몇 번 하게 된 얘기 치고는 꽤나 거창해보여 꽤나 민망하군. 으.
+ 그나저나 젊은 사람들더러 철이 없다고 걱정하시는 어르신들에게는 혼자 살 수 있게 집 좀 달라고 해야겠다. 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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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아 2008/01/03 10:1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이래서 미류가 이뻐. 히히
일상이 일상일 수 있게 하는 많은 노동이 참 무섭기도 혀. 흨.
미류 2008/01/03 17:3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ㅋㅋ 이뻐? ^^;;; 너무 많은 노동을 다른 사람에게 빚지고 있어서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