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의 역사?

서울역 강제퇴거방침 철회 농성장 가는 길에 구 역사 앞을 지났다. 해가 지고도 한참 지난 시각에 고급스러운 철제 받침과 강화유리로 처마를 만드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무슨 일로 저렇게 꽃단장을 하나. 농성장에 갔더니 내일이 개관식이란다. 서울역 구역사를 '문화역 서울 284'라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들어 연다고 한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매우 대표적인 건축물이라 가능한 한 원형을 복원하는 데 신경을 많이 쓰는 듯하다. 그런 서울역에서 노숙인을 지우는 '복원'이 과연 역사적일 수 있을까.

사람이란 것은 서로 살게 해주어야 한다.
서울역에 온지 8년인데 이런 일이 없었다.
우리가 아무리 이렇게 살아도 잘하고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안다.
사람이 좋은 일도 다 못하는데 왜 나쁜 일을 하느냐.


농성장에 노숙인 분들이 남기고 간 편지글들을 읽었다. 하루 사이에 이만큼 모였다며 농성 담당 활동가가 건넨 비타500 박스에는 편지글들이 묵직하게 담겨 있었다. 글들은 짧고 간결하다.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날것으로 담은 편지글도 있고 지원이 필요하다고 호소하는 글도 있다. 그게 어떤 내용이든, 사람이란, 서로 살게 해주어야 하는 것이라는 말 안에 담긴다. 연대가 사람이다.

잘하고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들도 많고 좋은 일을 다 못해도 나쁜 일을 하고싶은 '것'들도 있는 세상이지만 우리의 요구는 단순하고 명확하다. 사람답게 살자는 것이다.  

오늘 개관식에는 국회의원과 장관들과, 코레일 허준영 사장이 온다고 한다. 서울역 구역사를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취지는 좋다. 다만, 서울역이, 노숙인들을 지우고 역사를 기억할 수는 없다. 시대와 나라를 불문하고 '역'은 노숙인들이 모여드는 공간이 된다. 서울역도 마찬가지다. IMF로 '노숙인'들이 사회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부터 서울역의 풍경에는 언제나 노숙인이 있었다. 물론 그때는 행려라고 불렸겠지. 사람들이 많이 오가고, 인력소개소가 포진해 있고, 잘 드러나지 않는 쪽방들이 모여 있는 곳에 노숙의 경계를 오가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무작정 상경'에서 시작하든, 삶의 자리에서 밀리고 밀려 서울역을 찾아오든, 서울역은 노숙인들에게 첫 장소이자 마지막 장소다.

그래서 코레일이 노숙인들의 새벽잠을 방해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새 노숙의 근거지가 되어 버린 서울역을 바꾸고 싶은 것이다. 구역사를 복합문화공간이라 선언하더라도 신역사에서부터 번져나오는 자본과 소비의 자장 안에 있다. 그 자본이 끊임없이 몰아내온 노숙인들은 끝내 서울역에 스스로를 드러냄으로써 '민자역사'의 포부를 방해해왔다. 그리고 역사의 '공공성'을 환기시키는 존재들이 되어왔다. 코레일은 아마 서울역의 성공을 바탕으로 주요 민자역사를 차츰차츰 정리해가고 싶을 것이다.

지금은 역사 안보다 역사 밖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무더운 날씨에는 밖이 더 낫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온이 내려가면 새벽은 결정적인 시간이다. 잠을 잘 수 없다면 노숙인들은 하나둘 떠날 수밖에 없다. 그건 생존의 기술이다. 그러나 누구나 알듯이, 노숙인들의 수는 줄어들지 않는다. 그/녀들이 모두 십년씩 노숙을 하기 때문이 아니다. 일을 하고 돈을 모아 방을 구해 거처를 옮기는 사람들만큼 새롭게 노숙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늘 생기기 때문이다.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새벽의 혹한을 견디며 생명력을 시험대에 올리고 떠나는 사람들은 새로운 생존의 기술을 찾을 때까지 아무의 도움도 없이 홀로 생명을 버텨야 한다. 이런 건 사회가 아니다.

마지막 장소가 왜 하필 서울역이어야 하는지 코레일은 억울할 수도 있겠다. 서울역을 이용해야 하는 수많은 승객들도 안타까울 수 있겠다. 하지만 그게 역의 역사, 서울역의 역사다. 노숙인을 지우고 서울역의 역사를 말할 수 없다. 건축물이 아니라 '장소'를 봐야 한다. 고객이 아니라 '사람'을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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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9 09:37 2011/08/09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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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침안개 2011/08/16 05:0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안녕하세요

    저는 이광흠이라는 사람입니다.

    혹여 이 글을 오마이뉴스 e노트에 소개를 해도 좋은지 문의를 드립니다.

    개인적으로 e노트는 링크라고 생각하는데 많은 분들이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아서 이렇게 문의를 드립니다.

    • 미류 2011/08/17 15:06 고유주소 고치기

      네, 소개해서 더 많은 분들이 봐주시면 좋지요. 8월 22일 저녁 7시부터 23일 첫차가 다니는 시간까지 서울역에서 노숙인과 함께 1박2일을 보내는 프로그램이 준비 중인데 홍보도 가능할지요?

  2. 아침안개 2011/08/17 15:51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e 노트에 올렸습니다. 홍보는 글쎄요... 올라오는 글을 계속 e노트에 올리고 관련 기사들을 찾아 올리는 쪽으로 해보겠습니다.

    제가 지금 2살 먹은 막내 딸의 시선을 피해가면서 이 글을 쓰고 있거든요...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