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그리고 연대

지난 7일 <원주귀래사랑의집사건 인권침해 당사자 증언대회>가 있었다. 조금 늦게 들어갔을 때 앞에서는 임지훈 씨가 온몸으로 자신이 겪은 일을 증언하고 있었다. 그는 말을 하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 그래서 "사실을 말로 증명"하는 '증언'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증언'이 불가능하다는 점이야말로 증언의 힘이다.

원주귀래사랑의집은 스스로 장애인을 '목'숨바쳐 '사'랑하는 '목사'라 자처하는 한 사람이, 장애인들을 입양하여 함께 살던 집이다. 그가 장애인과 함께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손발을 묶어 때리고 말 끝마다 욕을 붙이고 밥을 굶기고 잡초를 베도록 하며 어린 장애인을 조금 덜 어린 장애인에게 돌보도록 하고 말을 듣지 않는다며 심지어 눈을 바늘로 찌르기도 하는 것이었다. 이것도 삶이라면, 이런 삶들이 사회에 알려진 것은 죽음 때문이었다. 너무 굶어 장이 다 꼬이고 붙어서 죽은 한 사람의 시신이 병원 영안실에 12년이 넘도록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 방송을 통해 알려진 것이다.

그 '집'에서 네 번 탈출을 시도했던 지훈 씨는 번번이 붙잡혀 왔다. 그의 팔에 선명하게 새겨진 이름과 전화번호 등등의 문신 때문이었다. 입양을 하면서 목사가 멋대로 바꿔버려 자신의 이름도 아니었던 이름과, 자신의 집도 될 수 없었던 집의 전화번호를 읽은 사람들이 그를 집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지훈 씨는 네 번의 탈출을 시도한 후 힘을 키웠다고 했다. 그는 앞에서 실제로 팔굽혀펴기를 하고, 자신의 위팔 근육을 만져보이며, 웃었다. 그 전까지는 때리면 맞을 수밖에 없었지만, 힘을 키운 후 목사의 부인이 자신을 때리려 했을 때 그 팔로 막았다며, 웃었다. 쇠몽둥이로 허벅지를 맞으면 다리가 얼마나 붓는지 아냐며 손으로 퉁퉁 부었을 때의 모습을 그리고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을 보여줬다. 그는 마치 무언극의 주인공과 같이 온몸으로 증언을 했다.

그것은 그저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었다. 원주귀래사랑의집에 몸이 갇혔을 때 그 자유로운 표정과 배우 같은 몸짓들 역시 갇혀있었을 것을 감히 짐작해보면, 그것은 사람이 갇힌다는 것, 삶이 갇힌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희미하게나마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래서 그가 온몸으로 겪었고 끝내 우리의 앞에서 증명하는 것은 사실 그 이상이다. 우리는 그를 통해서 '사람' 따위의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살아있는 힘을 만나게 된다.

지훈 씨는 탈출에 성공한 후 갈 곳을 몰랐고 또 다른, 조금 더 나은 복지시설에서 살게 된다. 원주귀래사랑의집 사건이 몇 차례 방송을 타던 중 방송에서 찾고 있는 한 생존자가 지훈 씨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시설 종사자를 통해 지훈 씨는 방송에 연락을 취하게 됐다. 그리고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어머니는 지훈 씨를 만나게 된 이야기를 아주 짧게 전했다. 말들은 짧게 끊어졌고 입술은 자주 굳게 닫혔고 목소리는 격정을 지우려 무던히 애를 쓰느라 말라버린 목소리였다. 그 다음 순서는 35년 만에 만나는 아들이 영안실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가놓고서도 차마 영안실에 가보지 못했던, 고 이광동 씨의 어머니였다. 그러나 그녀는 증언대회에 나오지 못했다. 그 다음 순서는 고 이광동 씨의 여동생이었다. 그녀는 지훈 씨의 증언이 이어지는 동안 내내 앞자리에 함께 앉아있었지만 지훈 씨의 어머니가 이야기하는 동안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그녀의 편지는 '원주귀래사랑의집 사건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 공동집행위원장이 대신 읽었다.

 

"오빠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부풀어 입 밖에 내지는 못했지만 나름 계획이 있었습니다. 작은 지하셋방이지만 가구를 이리저리 옮겨서 여긴 오빠 방 해주고..."

"엄마는 급기야 밖으로 뛰쳐나가셨고 병원 측에서 영안실에서 아들을 만나보지 않겠냐며, 오랜 시간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라는 설명에도 엄마는 영안실로 내려가지 않겠다며 흐느끼셨지요. (...) 엄마는 병원 밖 길에 앉아서 멍하게 있었는데 제가 오빠를 만나는 그 순간 즈음에 갑자기 심장이 쿵쾅쿵쾅 뛰더니 곧 맘이 편해지더랍니다. 엄마는 오빠가 우리가 온 것을 아는 것 같다며... 오열하셨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생각나지도 않았고 아무것도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방송을 본 파주어머님의 아들이 연락을 해왔습니다. 꿈만 같았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도 방송에 나왔던 다른 자녀의 이름과 같은 '장성대(본명 임지훈)'였습니다. 아, 파주 어머님은 얼마나 행복하실까. 진심 부러웠습니다. 이런 우리의 마음을 먼저 아는 지훈 씨는 저와 저희 엄마를 참 많이 위로해주었습니다. (...) 그러면서 나에게는 지금 세 명의 어머니가 생겼다고 햇습니다. 친어머니인 파주어머님, 해남어머님 그리고 우리 엄마!"

 

공동집행위원장은 편지를 읽는 내내 눈물을 참지 못해 낭독이 끊어지기가 몇 차례였다. 그리고 지훈 씨가 어머니를 만나게 된 이야기를 하는 대목에서는, 지훈 씨의 어머니가 끝내 참지 못한 눈물을 흘렸다. 입술을 꾹 다문 채로.

아무도, 말할 수 없었다. '사실'은 말해질 수 있지만, 그/녀들이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는 '사실' 그 이상이었으므로. 그리고 우리가 들어버린 이야기 역시 그/녀들의 말과 말 사이에 있다.

지훈 씨의 어머니는 왜 눈물을 흘리지 않을까, 아니 못할까.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 왜 내 아들은 없는지를 물을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가,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을 만났는데 그 반가움이 왜 아직 눈물이 되지 못하고 있을까. 눈물을 꽁꽁 가두어둔 그 가슴에 무엇이 맺혀 있을까. 인간이라는 생각이 안 들 정도의 그 목사가 여전히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사법부 역시 잘못을 꾸짖지 않는데 이 억울함들을 어디에 호소해야 할까. 설령 목사가 벌을 받더라도, 그게 우연히 그 놈을 만났기 때문이라면 서럽고 원통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을 텐데, 그 이상 무엇을 말해야 할까. "이런 일이 또 다시 일어나지 않길"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데 아무도 책임지려 들지 않을 때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까. 아무도 책임지지 않을 때, 아주 잠깐이라고 생각하며 맡겨두었던 아들을 이토록 오래동안 만나지 못하게 된 현실은 결국 어머니 혼자 감당하게 되는 것 아닐까. 지훈 씨를 맡길 수밖에 없었던 가난의 짐은 여전히 남아 있는데 서로 돌보며 함께 사는 것이, 여전히 막막한 것은 아닐까.

나는 누군가 우리 앞에서 눈물을 흘릴 때, 그/녀가 내 앞에서 울음을 감추지 않는다는 걸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눈물은, 아무에게나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말과 말 사이에서 흔들리면서, 눈물이 되거나 아직 흐를 수 없는 얼음이 되고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에 대한 '증언'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녀들은 지금 내게 세상을, 사람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도움을 주기보다는 선물을 준비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당신의 마음 앞에서 나의 마음은 어떤 행동이 되어야 할지. 선물은, 건네고 싶은 그 사람이 무엇을 받고 싶어할지 고민하는 순간 이미 건네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묻기 전에 각자 건네고 싶은 선물은 무엇인지 차분히 짚어보는 시간들이 필요하다. 그것이 연대의 시작이다.

같은 날 국회에서는 재벌, 대기업의 불공정-횡포 사례 발표회가 있었다. 인터넷에는 CJ 대한통운과 위수탁 계약을 맺었던 한 여성이 눈물을 흘리는 사진이 가장 많이 눈에 띈다. 눈물을 읽어내는 이 사회의 방식이다. 그러나 지훈 씨 어머니가 흘리지 않은 눈물과 그 여성이 흘린 눈물이 같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눈물을 대하는 자세여야 한다. 우리가 준비할 대답이 "많이 힘드셨겠어요."밖에 없다면 연대는 불가능하다. 동정과 연민과 위로와 격려를 거쳐 우리가 어떻게 함께 싸워야 할지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면.

어제는 <캄보디아, 용산을 만나다>라는 제목의 자리가 있었다. 프놈펜 벙깍 호수 주위에서 살던 주민들이 겪고 있는 강제퇴거의 현실과 용산참사 유족이 살아내고 있는 강제퇴거의 현실을 들었다. 그녀들 역시 '사실' 이상을 말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한 청중은 울먹이며 고백했다. "그동안 캄보디아 강제퇴거와 관련된 캠페인도 했고, 용산참사와 관련한 자료도 많이 봤고 서명도 열심히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사람'이 빠져있다는 걸 오늘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청중들이 물었다. "돕고 싶은데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그 질문을 '증언'한 그/녀들에게 돌리지 않고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 연대의 시작인데, 여전히 질문은 그/녀들에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히 청중들의 분위기는 그저 안쓰러운 사람을 마주하고 안타깝게 여기는 분위기 이상이었다. 어쩔 수 없는 걸까 싶다가 문득 저 질문의 의미를 새롭게 듣게 됐다.

원주귀래사랑의집 증언대회를 다녀온 나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증언대회에서 내 안에 스며든 질문들은 계속 붙들고 있기엔 너무나 무겁고 힘겨웠다. 그 질문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당사자'들과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나의 위치 또는 거리를 생각하지 않고 내 질문으로 만들겠다는 다짐은 성공할 수 없다. 그래서 그/녀들에게 함부로 질문을 돌려서는 안 되지만, 그/녀들과의 거리를 놓치지 않으려면 어떤 주문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원주귀래사랑의집 증언대회의 말미에 공동집행위원장은 이런 요지의 말을 했다. "솔직히 어디에 무엇을 요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무언가 해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사회적 책임을 묻는 것은 사회가 무엇을 했어야 했는지, 해야 할지를 묻는 것이다. 그걸 찾으려면 우리가 이 사회에서 그 사건과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지를 함께 물어야 한다. 서로에게 주문을 거는 것이 '도움'이 아닐까. '도움'의 정치는 언제나 경계해야 하겠지만, '도움'으로 연결되지 않는 연대도 어차피 없다는 것. 다시 질문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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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0 20:02 2013/05/10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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