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년은 걸릴 줄 알았어요."
카운터스 결성 3년 4개월 만에 혐오표현금지법이 제정되자 모두들 환호했다. 이 법은 혐오표현을 처벌하는 법은 아니지만 혐오표현이 '나쁘다'는 점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다양한 방식의 규제(예를 들어 혐오시위에는 도로 사용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거나)로 이어질 수 있는 기본법 역할을 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역할이 있다.
다큐의 초입에는 혐한시위를 목격한 학생(어머니는 재일조선인, 아버지는 일본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머니가 말리는데도 시위가 있는 곳으로 갔던 그는 "함께 살아요"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무서웠어요." 목이 메어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던 그는 무서웠다고 했다. 그런데 법이 제정된 후 참석한 집회에서 그는 더이상 울지 않는다. 표정도 편안해졌다. 그리고 그와 어머니는 그 현장에서 말하기 시작했다. 법의 힘은 법 바깥에 있다.
10년이라는 말에서 어쩔 수 없이 차별금지법을 떠올렸다. 10년은 걸릴 줄 알았는데 3년만에 만들어진 법. 3년도 안 걸릴 줄 알았는데 10년이 지나도 안 만들어지는 법.
다큐에는 혐오표현금지법 제정에 헌신한 의원이 한 명 나온다. 약간 벗겨진 머리와 누구에게나 겸손한 모습은, 어쩔 수 없이 노회찬 의원을 떠올리게 했다. 2008년 반차별공동행동과 함께 차별금지법을 발의했던 그.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올해 하반기 국회 발의를 목표로 하고 있는데 그는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함께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 그의 자리를 대체할 수는 없지만 차별금지법안을 발의할 수는 있다. 국회에는 차별금지법 제정이 유예된 상태가 매우 불합리하며 반인권적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의원들이, 많지는 않지만, 있다. 그런데 왜 아무도 안 나설까? 부끄러움은 당신들 몫일 테니, 너무 부끄러워지기 전에 차별금지법 제정에 나서기를 바란다.
# "모두가 조금씩 화내면 될 일이예요"
카운터스의 주인공, 오토코구미의 대장 다카하시는 단순하다. 재일조선인을 향해 혐오를 쏟아내는 재특회의 행동은 잘못됐고, 자신은 그들이 행동을 지속하는 것이 화가 나고, 그것을 용서할 수도 없다는 것. 자신을 우익으로 정체화하며, 재일조선인이라고는 단골술집 할머니 한 분을 아는 게 전부인 그가, 인간에 대한 혐오에 가장 단호한 입장을 가진다. 그의 말마따나 쉬운 일이다. 모두가 조금씩 화내면 될 일.
한국에서는 모두가 조금씩 피했다. 2008년은 '일베'를 중심으로 번져가는 혐오표현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해였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무산되는 과정에서 누군가 공공연히 모욕당하고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한 이들은 광주민중항쟁의 희생자나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모욕하고 민주화를 부정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개혁정치세력은 혐오표현 규제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때에도 쟁점은 '표현'으로 한정되었고, 여성혐오와 동성애혐오 등 차별의 구조에 대한 인식에 이르지 못했다. 동성애혐오를 내장한 보수기독교단체들이 반공주의세력과 교차하면서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지지세력이자 동원대상이 되는 걸 보면서도 차별금지법과 민주화를 구분하려고 했다. 여성혐오와 민주주의를 구분하려고 했다.
지금의 정부여당도 다르지 않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부정하는 페미니스트 대통령? 젠더폭력은 근절하는데 차별은 금지하지 않겠다? 성평등은 이룰 것이나 평등은 모르겠다? 이런 모순의 결과가 지금 정부여당이 보여주는 한계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동성애'만 피하고 보자며 혐오선동세력에 내준 텃밭에서 자라기 시작한 혐오가 지금 한국사회를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 보라. 무슬림 혐오에 기대 난민 반대를 외치는 집단이 인도주의나 관용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생각하나? 아니다. 그들은 지금 민주주의와 정치의 토대를 허무는 '나의 투쟁'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다큐에는 재특회 대표의 인터뷰가 많이 나온다. "외국인이 살기 편한 사회는 그 나라 국민이 살기 힘든 사회입니다." 개연성 없을 뿐더러 틀린 말이지만 이런 말들로 사람들이 움직인다. 전지구적인 혐오의 정치가 이런 말들로 번성하고 있다. 차별당해본 경험이 있냐는 질문에 재특회 대표는 "그럼요! 당연하죠. 어릴 때 아버지가 안 계셔서 차별 많이 당했어요."라고 대답한다. "차별 없는 사회는 불가능해요. 차별이 있어서 인간 사회가 진보하는 거예요." 혐오의 정치에서 중요한 건 혐오가 아니다. 그들은 정치와 민주주의와 인권을 부정하고 있다. 차별금지법과 민주주의, 여성혐오와 민주주의를 구분하려던 개혁정치세력이 만든 결과.
외국인이 살기 편한 사회는 그 나라 국민도 살기 편한 사회이고, 여성이 살기 편한 사회는 남성도 살기 편한 사회이고, 동성애자가 살기 편한 사회는 이성애자도 살기 편한 사회라는 건 차별철폐운동의 역사가 확인시켜준 바다. 그러나 지금 한국사회는 더 나은 내일을 말하며 함께 가자고 손 내밀 여유가 없는 듯하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우회하고서는 민주주의는 한 발도 전진할 수 없으며, '사회적 합의' 따위의 변명을 들어줄 이유가 없다.
# 카운터스의 많은 사람들은 오토코구미를 껄끄러워한다고 한다. 혐한시위대를 향해 돌진하거나 고압적인 태도로 입을 막아버리거나 필요하다면 폭행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를 승인할 수는 없으므로. 오토코구미가 카운터스 운동에 함께 할 때 찬반양론도 거셌다고 한다.
한국에서 메갈리아나 워마드를 대했던 방식과도 닿아있는 점이 있다. 관객석에서 누군가 "맞는 말이라도 강하게 하면 싫어하는" 분위기를 말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둔 것도 워마드는 아니었을까. 물론 '적'도 다르고 '아'도 다르므로 쟁점은 동일하지 않다.
혐한에 맞서는 그룹에는 '온나구미'라는 여성 조직도 있다고 했다. 감독은 영화를 편집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 빼야 했는데 노출이 돼서 신상이 털리면 매우 위협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 투쟁하는 여성의 위치.
카운터스는 혐한시위대의 특성에 더해 일본이라 가능한 운동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곱씹어보니 인종혐오에 맞선 운동이라 가능한 방식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 인간애? 평등과 연대의식? 관객의 질문에 감독은 인간애라고 답했다. "용서를 못하겠다"는 선. 그런데 인간애와 평등연대의식은 어떻게 구분되는 것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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