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_당시를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이제는 잊고 싶어하는 사람도 많다. 그것은 오카와 소학교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재난지역 전반이 그렇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소거될 때 재난지역은 두 번째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60_"오른쪽으로 가는 것이 좋았을까, 왼쪽으로 가는 것이 좋았을까,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좋았을까, 어떤 판단이 좋았을까,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지만 그 사람 자신은 어쩔 수 없이 한 선택입니다. (...) 그 선택이 어떤 결과가 되었어도 잘못된 선택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필사적으로 살고 싶었을 겁니다." (쓰나미의 밤에) 

 

106_일반적으로 경청이라는 행위는 다른 사람의 말에 정성을 다해 귀 기울이는 카운슬링에서 유래한다. 예를 들면 "돌아가신 할머니의 유령이 보였다"라는 상담이 들어오면 종교인은 "할머니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까?"라는 식으로 내담자의 말을 받아들이면서 그와 함께 유령을 본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할머니와 감정이 얼어붙은 할아버지. 재난지역에는 구체적인 슬픔뿐만 아니라 본인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막연한 슬픔에 사로잡힌 사람이 많다. / 또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사자에게 죄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마음속에 감정의 표출을 막는 어떤 괴로움이 있기 때문일까. 어쩌면 경청은 그 감정의 응어리를 몸속 깊은 곳에서 풀어내려는 시도인지도 모른다." 

 

114_의외라고 생각하겠지만, 약자로서의 피해자 이미지는 피해지역 바깥에서 만들어진다. 이번 대지진에서도 눈물짓게 만드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좋아한 사람이 많았다. 그런 이야기는 피해자가 가혹한 사건에 깊이 말려들수록 감동적이라는 역설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 쓰나미로 생사가 갈린 부부의 슬픔 아이의 생명을 지키지 못해 괴로워하는 부모. 그 결과 피해자는 무구한 약자로 완성된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들은 우리처럼 피가 흐르는 인간이다. 선하기만 한 사람도, 무구한 약자도 아니다. 누구도 일방적 약자로는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115_결국 재난지역에서 일방적인 약자를 찾으려는 사람들의 마음 한편에는 자신들도 약자라는 심리가 깔려있는 것은 아닐까. 약자가 약자의 마음을 안다고, 약자라는 이름으로 그들과 자신을 묶고  선한 사람이 되어 구원받는다. 하지만 정말 약자만이 약자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약자를 자칭하는 것과 자신의 무력함을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르다.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약함에 빠지지 않는 강함이 필요하다. 그리고 내 눈앞에서 괴로워하는 이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역설적이지만 스스로의 무력함을 자각할 때에야 다른 이의 고통에 다가설 가능성이 열린다.

 

149_확실히 '우리'라는 말은 일체감을 만들어내기에 편리하다. 그래서 '우리'나 '피해자'를 소리 높여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이득을 얻는 경우도 생긴다. 하지만 '피해자'를 '우리'라는 이름으로 부를 때 '우리'는 대체 누구인다. '피해자'는 원래 '우리'라는 존재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을 부르는 이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을 일괄적으로 '우리'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을까. / '우리'라는 주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누구든 배제된 희생자를 요한다. 나는 이것이 이번 대지진 뒤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에서 배울 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당신'이 아니기 때문에 '당신'에게 배울 수 있다. 그렇기에 '당신'이 지금 할 수 없는 것을 '내'가 대신할 여지도 생긴다.

 

268_"가사를 쓸 때 재난을 당한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고 생각하면 점점 부드러운 말로 바꾸게 됩니다. 그래도 '아프지만 잘 말해주었다'라는 가사가 남는다면 나는 구원받을 것 같아요." 

 

278_그러나 실제로 '불쌍한 피해자'나 '밝은 부흥' 같은 이미지는 현지의 바깥에 있는 '무관심한 선의'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재난지역의 건물 잔해 처리나 정치가의 '죽음의 마을' 발언처럼 그런 '선의'에 저촉되는 사태가 일어나면 사회 전체는 그 발언자를 집단적으로 공격한다. 이렇게 우리는 발언을 막는 것으로 우리 사회가 여전히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모두가 서로를 배려하고 있다는 환상을 유지하려고 한다. / 그런 친절한 사회라는 환상에 집착할수록 현실의 사회 격차나 대지진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작은 목소리는 지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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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2 18:36 2018/08/12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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