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류님의 [어쩌다가 <난민 문제에 대하여>를 보게 됐다] 에 관련된 글.
6.30.
한겨레에 실린 글 "백인 남성들이었어도 '경보'는 울렸을 것이다"는 조금 당혹스러운 글이었다. 여성의 두려움이 평가절하당하는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는 중요하고 타당했으나, 인종차별이 아니라는 걸 밝히기 위해 '백인 남성'과 비교하는 방식을 택한 것도, 여성의 공포가 난민 혐오에 동원되고 있는 현실의 맥락에 대한 고려가 삭제된 것도, 아슬아슬했다.
두려움은 실존하는 것이다. 두려워하는 여성들을 '유난 떤다'고 하거나 '비합리적'이라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난민 인권 보장을 주장하는 목소리와 섞여있다면 그것 역시 부당하다. "그 남자들 너희 안 꼬셔" 같은 말이 실제로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으나 충분히 그런 식으로 말했을, 진보를 자처하는 남성들이 있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여성의 두려움을 남성은 이해하지 못한다. 강남역 여성혐오살인사건에서도 확인되었듯, 차별이 구조화될수록 정체성의 차이는 서로 다른 현실을 경험하게 한다. 그래서 두려움이나 불안을 저평가하는 목소리는 '남성'의 것으로 들리기 쉽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이슬람이나 난민의 삶을 이해 못하는 데에도 마찬가지로 작용한다. 언제나 타자로 그려진 사람들의 삶은 짐작할 수 있을지언정 겪어볼 수는 없다. 특히나 한국사회처럼 이슬람 신자가 소수이고, 이슬람에 적대적인 보수기독교세력에 의해 이슬람이 악마화된 사회에서 그 삶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이해의 어려움은 권력에 의해 무기가 된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발생할 때 가부장제는 그것을 사이코패스의 문제, 조현병의 문제, 외국인의 문제, 이슬람의 문제 등으로 지목한다. 그래야 '남성'이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이슬람 혐오를 주도하는 세력이 동성애혐오를 앞장서 선동하는 세력과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동성애혐오는 남성답지 못한 남성을 배제함으로써 '남성'을 획득 또는 재건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그들에게 여성주의를 갖다바치는 여성학자가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조심하는 일은 늘 여성의 몫이었다. 여성은 위험을 지목할 기회도, 권한도 가져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성권력은 언제나 자신의 뜻대로 위험을 지목하고 대안을 가장한다. 각종 여성폭력 사건에서 반복되는 대책들이 늘 헛발질인 것도 이유가 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여성의 권리를 제한하려는 대표적인 전략 중 하나가 공포의 선동이라는 점이다. 위험을 직시하도록 하는 것과 공포를 선동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전자는 두려움에 맞서 대처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두려움에 갇혀 꼼짝달싹 못하게 하는 것이다. 두려움을 기각하는 것도, 두려움을 부추기는 것도 여성을 위한 것일 수 없다. 여성의 목소리로 난민 인권에 대해 말하는이야기들이 더 많아져야겠다.
(덧붙여) 최근에는 '난민'이 아니라 '이슬람'이 문제라며, '이슬람은 여성과 아이를 무시하고 억압한다'는 것이 난민을 반대하는 주요 이유가 되고 있다고도 한다. 그러면서 '힌두교도 500명이 들어와도 괜찮지만' 이슬람은 안된다고 하는 이야기들도 있었다. 세계에서 여성폭력이 가장 극심한 나라인 힌두교 국가 인도의 현실을 굳이 무시하면서까지 이슬람혐오가 부추겨지고 있다. '백인 남성이 들어와도'라는 가정은 인종차별이 아니라는 주장에 효용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힌두교도가 들어와도'와 같은 가정들이 이슬람혐오를 정당화하고 있는 현실에서는 무용하다. 가부장제 질서에서 인종/민족/문화 등은 여성억압의 양상을 다르게 만들지언정 여성억압 구조 자체가 다르지 않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 남성이 들어와도'라는 가정은 여성억압의 문제를 인종의 문제로 전치시켜버린다는 점에서 여성주의의 언어가 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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