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된다> 참 좋다

* 이 글은 미갱님의 [<계속된다>를 보다] 에 관련된 글입니다.

용산 역에 내려서 상영관까지, 길을 알았더라면 기어서도 도착했을 시간에 헉헉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몇 번 볼 기회가 있었으나 번번이 놓치고 말았던 영화라,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달렸다. 이미 방글라데시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고 숨을 가다듬고 다큐로 조금씩 들어가는 동안 방글라데시에서의 촬영분은 거의 끝나있었다.

 

하지만 이 다큐의 미덕이라고 사람들이 칭찬하는 부분을 모두 챙겨나오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가'라는 말을 두고 이주노동자들이 겪었던 경험을 나누며 웃는 장면이 그랬다. '먹어'라는 뜻을 가진 단어라, 한국인들이 '가, 저리가, 이제 가' 이런 말들을 할 때, 아직 한국말에 익숙치 않은 사람들은 '먹어라'는 말로 듣는다고 했다. 그래서 좌판에 놓인 오렌지를 집어들었다가 썩은 오렌지로 얼굴을 맞고, 사장이 먹으려던 치킨을 통째로 쓱싹 해치웠던 이야기들을 하면서 그/녀들은 웃.는.다.



그/녀들은 언제나 폭력의 희생자 혹은 피해자가 된다. 단지 단절되는 것이 아니다. 그/녀들은 샤말이 말하듯, 분명히 사회적 관계를 구성하고 있는 한 명 한 명의 주체다. 그/녀들은 이 사회의 외부에 있지 않다. 소통불능을 핑계로 그/녀들을 외부인으로 만드는 것은 탐욕스러운 이윤의 물질성일 뿐이다.

그런데 그/녀들은 이제 소통불능의 상황에 짓눌리지만은 않는다. 가볍게 웃어준다. 그/녀들이 웃으면서 기억해낼 수 있는 것은 싸움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선량한 얼굴의 비두가 출입국 관리소 직원의 멱살을 잡을 때 너무 기뻤다는 이야기를 하듯이, 더이상 '외부'로 밀려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만들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이상 말을 못하거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비존재가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재수없는 인간들과는 말을 하지 않는, 진정한 소통의 가능성을 찾았기 때문은 아닐까. 비정규직 투쟁에 함께 하면서, 우리는 노동자니까, 라고 말하던 그/녀들. 그리고 경찰들에게 끌려가면서 "난 말할 수 있어요. 난 권리 있어요"라고 외치던 그/녀들. 

그리고 마지막에 흔들리던 버스 장면까지. 감독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알게 되었지만 이주노동자들은 직접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기록은 집단적 기억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한 명 한 명의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이, 이제 더이상 한 명 한 명의 투쟁에 머무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당당한 확신을 보여준다.(그래서 나는 자막을 넣어주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똑같이 흔들리는 삶이더라도 누가 찍는가는 흔들림의 의미를 전혀 새롭게 만드는 듯하다.) 그것이 비록 단속에 쫓겨 밀고 당기는 아수라를 보여주는 것이라도, 그리고 아마 그런 현실이 앞으로도 쉽게 바뀌지는 않겠지만, 이주노동자운동이 자리를 얻은 것이다. 이주노동자, 라는 존재에 깊숙이.

 

감독의 말처럼, 명동성당 농성단이 농성을 접고 나서 보는 이 다큐는 촬영할 당시나, 편집할 즈음이나, 앞으로 또 몇 년간 다르게 보일 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그냥 다큐만 보려고 노력했다. 몇 번 가본 적도 없는 명동성당 기억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눈물이 나면 다큐에 실망하게 될 것 같아 그것도 참았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에게서 죄스런 눈물 뽑아내는 영화는 싫다. 그래서 잘 봤다. 그냥 이런 글 쓸 수 있어서 좋다. 오렌지로 얼굴을 맞는 상황을 이해할 수도 없는데 이해하려고 노력하라고 강요하지 않아서 좋았다. 추모제와 장례식으로 이어졌던 작년의 투쟁들, 비정규직 열사들의 분신과 이주노동자들의 자살과..., 에 비하면 그래도 올해는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래도 올해는 점거투쟁이라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욱 깊어진 처절함을 묻어버릴까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는데 다큐를 핑계로 내 얄팍한 생각들 말할 수 있어서... 그래서 <계속된다> 참 좋다.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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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15 14:29 2004/12/15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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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슈아 2004/12/15 15:0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미류님/어제 오셔서 넘 좋았어요. 시간이 늦어서 이야기 많이 못한게 넘 아쉬워요. 그래도 이렇게 포스트까정 만드시고...^^ 감동감동. 제가 어제 넘 정신 없었죠. 감기 때문에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헤헤...우리 담에 만나면 재미나게 이야기해요~~

  2. 미류 2004/12/15 15:2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흠, 저 사실 디게 뻘쭘했어요. 영화 잘 봤냐구 물어봐서 막 대답할라 그러는데 안녕히 가세요, 그래서. ㅡ.ㅡ 영화보러 간 거 아니고 슈아님 보러간 거였으면 혼자 꿍해서 돌아왔을 지도 몰라요. 근데 다큐 너무너무 좋았어요. 그리고 다큐를 만든다는 거, 참 멋진 일이라는 거,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느꼈어요. 그래서 삐진 척 할라다가 도저히 못 그러구, 앙, 난 너무 솔직해서 탈이야, 삐진 척 하고 술이라도 얻어먹어야 하는 건데~ ^^;;

  3. kanjang_gongjang 2004/12/15 20:2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계속됩니다.
    계속된다라는 설정은 맞지 않습니다.
    얼마전 수도권이주노동자들이 모여 노동조합 건설을 위한 논의를 지켜보면서 계속된다가 아니다. 계속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타자가 보는 시각에서 계속된다는 것은 이제 떨쳐버려도 될 것 같습니다.
    진지한 그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4. 슈아 2004/12/15 20:37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당시 만들때는 확 불을 지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주체가 있으니 한국노동자들이 함께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뭐 그런 거였죠. ^^ 이주노동자의 진지한 모습을 보셨다니 넘 좋네요.

  5. 미류 2004/12/16 00:2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오타맨, 전 오히려 '계속되고 있다'는 표현이 더욱 타자가 보는 시각인 듯한 느낌이 ^^;; 그리고 '계속된다'가 정말 진행형인 느낌이... 하지만 오타맨이 이주노동자들을 직접 만나면서 받은 느낌이라면 그럴 지도... ^^
    슈아, 조금 일찍 상영되었다 해도 '확 불을 지르'는 다큐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 제가 느낀 '계속된다'의 매력은 '확' 불을 지르지 않으면서도 뜨겁게 만드는 점이었던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