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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때, 내가 '외모'로 차별했어!(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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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아버지? 표현과 관계 맺기 - 유진

아빠/아버지? 표현과 관계 맺기

 

유진

 

 너는 나이가 몇 갠데 아직도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냐?”

 아버지가 니 친구야? 반말을 쓰게? 부끄러운 줄 알아.”

 

 평소에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남성인 어버이아빠라고 부르며, 편하게 반말을 쓰던 나인데 저런 꾸중을 듣고 난 후로는 남들 앞에 있을 때는 꼬박꼬박 아버지라 부르며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다. 매우 부자연스러웠지만, 아빠라고 부르며 반말로 하늘 같은 아버지를 대하는 것이 혼날 만할 일이고, 부끄러워야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왜 어색하게 갑자기 존댓말을 쓰고 아버지라 부르냐고 물으며, 편하게 대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 이후로 나는 아빠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반말을 쓰고 있다. 서로가 일종의 합의 하에 호칭을 정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순간 나의 남성인 어버이를 부르기 전에 잠시 동안 망설여 진다. 아빠라고 했다가 나를 어린애로 보면 어쩌지, 반말을 썼다가 아빠를 막 대하는 애로 보이면 어쩌지.

아빠는 사전적으로도 어린아이 말로 분류되며, 대체로 10대 후반 즈음부터는 아빠라는 호칭 대신에 아버지라는 호칭을 쓰는 것을 사회적으로 요구한다. 하지만 그런 관습을 이유로 오히려 서로가 불편해지고, 동등한 관계 맺기를 할 수 없다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 저어해야 할 일이 아닐까. 현재 사회에서 아버지라는 표현은 단순히 어른의 말 이상으로 사회적 함의를 갖고 있다. 권위적이며 집안의 가장이자, 떠 받들어져야 하는 존재라는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이 들면 아버지로 호칭을 고치고 그를 통해 아버지의 노고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한국사회 풍조다. 한편,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시하지 않고 있다. 어머니는 자녀와 가깝고 편한 관계이며, 가족 내에서 지위도 남성보다 낮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예의나 예절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사회적 표현의 정형화된 형태다. 그것은 관계 맺기에 있어서 일종의 예시를 제공한다. 하지만 그러한 예의나 예절을 무조건적으로 주장하고, 원칙적으로 지키기를 요구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기도 하는 것 같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형태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을 수 있고, 그것은 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떤 관계냐에 따라 서로 사용하는 호칭이나 표현에는 차이가 존재할 수 있다. 아빠라 부를 때, 관계가 더 편해질 수 있고 그러면서 동시에 상대방을 존중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에 대해 서로 합의했다면 그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요즘에는 아빠라고 부르는 것을 부모에게 경제적/심정적 의존을 떨치지 못한 이들이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그에 대해 문제제기가 나오고 있기도 하다. 나도 내가 정말로 어리기 때문에 아빠라는 호칭에 대해 서로 편하게 여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나는 지금 유아적인 글쓰기를 하고 있는 걸까…). 게다가 예의나 예절이 가지고 있는 힘을 완전히 무시하기엔, 그것이 갖고 있는 힘도 너무 크다. 더 나이가 들고 나면 아버지냐 아빠냐를 두고 한참을 고민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지금은 아빠를 아빠라 부르는 것이 옳은지는 모르겠으나,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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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플 유혹에 대한 기억, 그리고 고백 - 돌진

악플 유혹에 대한 기억, 그리고 고백

짧고 강렬하게 제압하고 싶은 어떤 욕망




친하게 지내던 후배 녀석과의 인터뷰 기사를 쓴 적 있다. 그는 ‘조선족’(? ‘중국동포’? 헷갈린다...)인데, ‘조선족’으로서 중국과 한국에서 당한 차별의 기억을 이야기해주었다. 차별의 기억을 새롭게 끄집어 내어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한다는 게 힘든 일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흥분하지 않고 담담하게 자신의 기억을 꺼내놓았다. 아니, 오히려 “지금은 그 사람들의 행동도 이해한다”며 평온하게 이야기했다. 오히려 듣는 내가 안타깝고 속상했다. ‘아니, 어쩜 이럴 수가…4가지 없는 ××들’하고 생각하며 혼자 삼켰다. 그런데 그 기사가 나가고 며칠 후 댓글이 달렸다. 그 댓글은 인터뷰한 내 후배뿐만 아니라 한국에 있는 모든 ‘조선족’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사돈에 팔촌”까지 들먹이며 “돈에 눈이 멀어 한국에 온 사람들”로 매도했다. 가관이었다.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너무 화가 났다. 하지만 나보다 훨씬 더 큰 상처를 받았을 후배를 생각하며 댓글을 달아 차분히 설득하려고 애썼다. 나까지 흥분하면 후배가 더 힘들어질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불행히도(!) 내가 단 댓글 밑에 먼저 댓글을 쓴 사람이 다시 쓴 악플은 더 가관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댓글들을 후배가 봐버렸고, 후배는 분노를 넘어 공황 상태에 빠져버렸다.





나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자기 말만 내뱉으면 듣는 사람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건가? 자기가 하는 말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차별하고 어떻게 상처를 주는지 안중에도 없는 건가?
이런 *&%$#@!!! 마치 내가 모욕당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내가 느낀 이런 인간적인 모멸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다. 반사! 너도 한번 당해봐. 눈 앞에 있었으면 당장 멱살이라도 잡았을지도 모른다. 너 내 눈 앞에 없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 화가 나더라도 다시 한번 그 악플러를 설득하려고 애쓸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설명하는 건 그의 ‘쿨함’에 비해 너무 구질구질하게 느껴졌다. 차별한 인간은 다른 어떠한 설명도 필요 없이 저리도 쿨하게 내질러버리는데, 왜 차별 당한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차별당하고 상처받았는지 설명해야 하는 건데? 그것도 상대방이 알아들을지 못 알아먹을지 확신도 들지 않는데. 아니, 못 알아들을 가능성이 크지. 지금 내가 너의 댓글은 나에게 차별적이었고 너의 차별로 인해 난 이렇게 상처받고 고통받았다고 주절주절 늘어놓는다고 해서 공감을 받아낼 수 있을까? 어림 없는 소리!

그렇다면 저 인간이 저렇게 행동했겠어! ‘차별’이라는 게 그렇게 만만해보이지도 않았다. 그때 내가 원했던 건, 구질구질하게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짧고 강렬하게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이었다. 평소라면, ‘난 너의 악플로 전혀 상처받거나 주눅들지 않아. 쳇! 그따위 악플,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진부하고 상투적인 악플. 그래, 니 한계는 거기까지야. 차라리 귀엽게 봐줄게’ 정도로 생각하며 그냥 넘어가겠지만, 유독 마인드컨트롤이 잘 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날도 ‘아휴, 이걸 그냥 콱!’하는 생각으로 어떻게 상대방을 쿨하게 제압할까 고심하며 자판 위에서 손가락을 달달 떨고 있었다.



뭐라고 댓글을 달지
?
“이런 병쉰 새키. 너 완전 병맛. 꺼져.”라고 할까? 아냐 아냐. ‘병신’은 장애인을 비하하는 말이니까 차마 내가 쓸 수는 없지. 아님 “걸레같은 년. 더러워. 너 사실 초딩이지? 가서 메이플이나 해라”고 해버릴까? 근데 상대방이 여성인지 남성인지 알 수가 없잖아. 그리고 왠지 ‘걸레’는 ‘년’이라는 말에만 따라다니는 것 같아 그것도 찜찜하고…초등학생들을 싸잡아 무시한 것 같기도 하고……. 흐음...끙...그럼 “너 사실 오덕후지? 왠지 니가 말하는 게 꼭 오덕하게 말하더라”라고 해버릴까? 아...이것도 쫌...ㅠㅠ


결국 ‘짧고 강렬하게’ 상대를 제압할 만하다고 여겨지는 말들은 대부분 저런 류였다. 물론 나의 ‘쎈스’가 부족해서일 가능성이 훠얼씬 높지만. 이것저것 따지다 보니 저마저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차라리 아무 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했어야 하는 건가! 그런 건가!!! 짧고 강렬한 말로 상대를 제압하려면, 뭔가 사회적으로 합의된 상징적인 의미의 말에 기댈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그런 것들은 결 국 사회적 소수자들을 비하하는 말인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제압하고자 하는 상대방을 쉽고 간단하게 열등한 존재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소수자’로 낙인찍으면서 ‘소수자’에게 붙어 있는 온갖 종류의 부정적인 사회적 의미와 편견들을 고스란히 상대방에게 옮겨다 붙이는 것.

사소한 듯 보이는 사적인 관계에서도 그런 ‘힘’(사회적 효과)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신기했고 그땐 심지어 부럽기까지 했다!(-_-;; 근데 차별하는 주체에 대해 짧고 강렬하게 제압할 수 있는 말은 없을까? ‘나찌’? ‘호모포비아’? 역시 그런 언어와 사회적 합의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결국 난 악플을 달지 못함으로써 ‘짧고 강렬하게’ 그를 제압하지 못했다. 그때 난 무엇을 어떻게 했어야 할까? 아직까지도 물음표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난 후 고 최진실 씨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녀도 죽기 전에 악플에 시달렸다지? 다시 한번 상처받았을 후배가 생각났다. 그리고 채 아물지 못한 나의 상처도. 그러다가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자신이 누군지 ‘당당히’ 밝히며 자신이 쓴 모든 댓글과 자신의 댓글에 달린 모든 다른 댓글들까지 지워달라고 요구하는 그 사람. 후배의 인터뷰 기사에 기가 막힌 악플을 단 바로 그 사람이었다! 첫 번째로는 그 당당함에 놀랐고, 그 다음으로는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요구를 마음껏 하는 그 뻔뻔함에 놀랐다. 그 사람은 고 최진실 씨의 자살과 그에 따른 ‘악플 관련 수사’가 신경 쓰였는지, 자신이 단 댓글을 모두 지워달라고 했다. 자기가 단 댓글의 비밀번호를 잊어버렸다며. 그리고 자신의 댓글 내용이 언급된 다른 댓글들까지 모두 지워달라고 요구했다. 엥? 이건 뭐야. 그의 요청에 따라 그 자신의 댓글은 지워줄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쓴 댓글은 안된다고 했더니, 생떼를 쓴다. 이젠 아예 기사 자체를 지워달란다. 너의 무모함에 박수를, 젠장. 그럼 애시당초 왜 그런 댓글을 달았냐고, 당사자가 받았을 상처를 한번쯤은 생각해본 적 없냐고 물어봤지만 막무가내였다. “그러니까 지워주세요. 기사까지 다 지우면 될 거 아니에욧!”이라는 그의 당당함에 다시 한번 헐-, 이런 진상.




* 인터넷 악플에 많이 쓰이는 차별적인 용어들(아 래 용어들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따이루 활동가가 정리해주었습니다. 아래 단어들은 [국어대사전]에 등록된 단어들이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여기서는 일단 ‘따이루식’ 해석임을 미리 밝힙니다. 다른 가능한 해석은 댓글로 좀 달아주세요-)

□ 오글거린다 / 오그라든다 / 오글오글 - ‘헐...오글오글 오그라든다’

: 손과 발이 근질근질거리는 느낌처럼 글이 느끼하거나, 닭살스럽거나, 유치할때 쓰는 말.

* 정확하지는 않지만 지체장애인의 모습을 비하하는 표현이라는 ‘소문’이 있음. 속이 느글느글하다라는 느낌하고 비슷하게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임.

□ 병쉰 / 병진 - ‘병쉰새키’

: 장애인을 비하하는 말인 ‘병신’이라는 욕설의 발전(?)한 형태.


□ 병맛 / 병tothe맛 - ‘병맛만화ㅉㅉㅉㅉ’

: ‘병신같은 맛’을 줄여 쓰는 건데 ‘병쉰’ 이런 거와 비슷하지만 이 표현은 보통 만화/동영상/글/사진 뭐 이런 부분에서 주로 쓰임. 말도 안 되거나, 내용이 특이하거나, 재미가 없는 만화를 가리킨다는.


□ 거지같은 년 / 걸레 - ‘더러워, 걸레’

: 위에 거와 비슷하지만 여성들에게 주로 달리는 악플. 창녀같다, 더럽다 뭐 이런 의미로 쓰임.


□ 오덕오덕 / 오덕후 - ‘ㅋㅋㅋㅋㅋ오덕하게 생겼어’

: 원래는 일본만화/애니에 푹 빠져 계신 분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제는 ‘중독자’를 가리키는 말이 됨. 그러다가 요즘에는 ‘여드름 많고 뚱뚱하고 패션 감각 없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비꼬아서 쓰기도 함.

□ 초딩 - ‘초딩 시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메이플이나 해라’

: ‘초등학생’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었는데, 요즘은 생각/개념 없이 말하거나 글 쓰는 사람들을 비꼬는 표현으로 많이 쓰임. 또한 요즘 패션트랜드를 못 따라가는 사람의 패션을 ‘초딩패션’이라고 놀리는 데도 쓰임.




* 참고로, 난 악플을 막는답시고 내놓은 대안이라는 ‘인터넷실명제’도 완전 반대한다. 입을 막는다고 차별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입을 막을 게 아니라 차별을 없애도록 노력해야할 일이다.

** 이 글은 반차별공동행동 웹진 <차.차.차>에도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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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내가 '외모'로 차별했어!

 

처음 시도해 본 "그 때, 내가 차별했어" 에 대한 뜨거운(?!) 반응에 감사하며,

이번에도 그러한 열렬함을 기대해보며...

이쯤해서 두번 쨰 주제로 넘어가보려 합니다~

 

이번 주제는 "외모 차별" 입니다!

외모와 차별. 언뜻 보면 수긍이 '잘' 가고 자연스러운 조합이죠?

그런데

언젠가 내가 그 사람에게 했던 행동이 정말 차별로서의 행동인지, 혹은 그건 그저 나의 개인적인 취향인지, 미모와 안미모의 구분이 과연 있을 수 있는건지,  기준은 어떤건지.. 등등!

이렇게 따져보다보면 정말 애매모호한 게 또 이 주제인 것 같아요.

그래서 많은 고민이 되는 주제이기도 하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외모를 이유로 차별을 하게 되거나, 받는 경우가 많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어쩌면 그런 많은 애매모호한 지점 때문에?) 이 주제에 대해 같이 생각을 나눠봤으면 좋겠어요.

 

그 때, 내가 외모로 차별했어! 

라고 말 할 수 있는 '그 때', 여러분에겐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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