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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니폼

바로 직전 두산 베어스 유니폼이 변경된 걸 보고 나서인지 심각하게 실망스럽지는 않다.

그래도 보기에는 민망하다.(유니폼을 사야 할까 고민 중)

그리고 기아 프론트 진은 디자인 평을 떠나서 버튼 형을 요구했던 팬들의 목소리를 무시한 걸 책임져야 할 듯.

 

2. 엠블럼

보기에는 무난하다.

그런데 색상은 두산 베어스 로고타입, 글씨체는 한화 이글스를 연상 시킨다.

창조성이 떨어지는 듯.

 

3. 마스코트

지난 번 마스코트는 너무 가슴근육이 발달해 눈에 거슬린 게 사실이다.

가슴 근육 없어져서 보기는 좋은데 가슴근육이 배로 갔다.(너무 아저씨 같다.)

외모는 귀여워 졌으나 전래동화 책 속의 호랑이를 연상시킬 정도로 너무 갔다.

 

총평:★★☆☆☆

무난하나 성에 차지 않음.

그래도 팬심으로 유니폼이랑 모자 산다.

 

위의 사진은 모두 기아타이거즈 홈페이지에서 퍼왔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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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지인을 통해 KIA타이거즈의 불펜포수이던 변선웅 선수가 정식선수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KIA타이거즈는 송산, 허승민 선수가 군 입대를 하게 되면서 포수인원이 부족한 상황이다. 혹자는 어부지리로 얻은 기회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전에도 조범현 감독이 변선웅 선수의 정식선수 등록을 건의한 적이 있었다고 하니 그의 잠재력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거 같다. 아무쪼록 변선웅 선수가 이번 기회를 토대로 최초의 불펜포수 출신 1군 풀타임 주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변선웅 선수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한 가지 있다. 지극히 사적인 이유인데 고3때 같은 반이었기 때문이다.(내 나이와 출신고교가 공개되는구나.ㅠㅠ) 고등학교 졸업앨범에 ‘변성웅’이라고 오타가 난 걸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안 그래도 야구팬인 놈이 진학한 고등학교에 야구단이 있으니 얼마나 신났겠는가. 말로만 듣던 동대문야구장을 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입학 초기 들뜬 기분을 가진 기억이 있다.

 

하지만 3년 동안 동대문야구장을 가지 못했다. 우연찮게도 2001년은 광주진흥고가 2002년에는 광주일고가 광주고교야구를 지배했고 비로소 광주동성고가 지역예선에서 연승을 하며 전국대회로 진출 했을 때 고 3이었기 때문이다.

 

갈 기회는 있었다. 청룡기 야구대회에 광주동성고가 결승에 진출했었다. 준결승전 승리 후 교사 회의가 있었고 고 3 학생들도 가기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당일 오전 어떤 학부모가 교장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하며 그 결정은 취소가 되어 버렸다.(내가 이런 말 한다고 화 낼 분들은 『미디어스』에 들어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한 마디 하겠다. 아이를 위해 무조건 학생의 인권을 무시하는 결정을 내리는 강경파 학부모들이 꼭 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꼭 학부모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더라. “학생은 자기 욕심 채우는 로봇이 아니거든요.”) 

 

2001년 진흥고에는 김진우 선수(맘이 아프다.), 2002년 광주일고에는 김대우(롯데자이언츠), 고우석(KIA타이거즈)선수라는 에이스가 있었다. 그와 달리 2003년 동성고의 팀컬러는 타력이 강한 팀이었다. 1학년 때부터 주전이었던 김주형(상무) 선수를 필두로 명정주 선수, 2003년 당시 2학년이던 이원석 선수(두산 베어스) 등이 포진해 있는 타선은 그 당시 고교야구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들은 최고의 타력을 앞세워 제58회 청룡기 고교야구대회 결승에 진출한다. 광주고교야구삼분지계 중 하나를 차지한 동성고였지만 유독 청룡기 대회에는 우승 운이 없었다.

 

결승전 상대는 순천효천고. 팀의 에이스는 김수화 선수였다. 그 해 김주형 선수와 함께 KIA타이거즈 1차지명자로 오르내리던 선수였다. 예선에서 준결승까지 순천효천고가 3실점 이상을 한 게 배명고와의 경기밖에 없었고(13:5) 그 중심에는 김수화 선수가 있었다.

 

팀 대 팀, 학교 대 학교의 대결뿐만 아닌 김수화와 김주형의 대결에서 먼저 웃은 건 김수화였다. 2대2 동점 상황에서 순천효천고가 9대2로 멀찍이 달아난 것. 지난 해 한국시리즈 7차전 6회 초에 KIA타이거즈가 SK와이번스의 저력을 보고 절망에 빠졌듯이 학교에서 결승전 중계를 보고 있던 우리도 포기상태였다. 상대가 김수화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주하면 ‘배’처럼 고교야구 하면 반드시 따라오는 ‘혹사’로 인해 김수화 선수는 무너져 갔다. 8, 9회 그는 열일곱 타자를 연속 범타 처리하던 그 김수화가 아니었다. 8회말 7:9까지 허용하더니 9회말 투수였던 강창주 선수에게 동점 적시타를 허용하고 말았다.

 

10회 말 그는 또 다시 마운드에 섰지만 이미 방전된 백만 돌이가 된 후였다. 두 타자 연속 몸에 맞는 공 허용.(그 와중에 김주형 선수는 일부로 몸을 공에 갖다 대더라.) 결국 1사 주자만루에서 바뀐 투수 김선규 선수가 명정주 선수에게 끝내기 안타를 허용하며 순천효천고는 눈물을 흘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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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주형 선수가 2006년 6월 8일 롯데 자이언츠전 8회 말에 투런 홈런을 칩니다. 상대는 바로 김수화 선수였습니다. 이 소중한 정보를 알려주신 익명의 제보자(?) 분께 감사하단 인사를 전합니다. ⓒ KIA 타이거즈

 

이후 김주형 선수는 KIA 타이거즈 1차지명으로 입단하게 된다. 그리고 김수화 선수는 롯데자이언츠 최대 계약금을 받게 된다. 이후 둘 다 유망주 딱지를 떼지 못하고 상무에 입대했다. 공교롭게도 김주형 선수가 김수화 선수의 후임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둘이 군대에서 이 이야기를 했을 지 궁금하다.

 

이 경기에서 뛰었던 선수들 중에 이 둘 이외에 현역으로 뛰고 있는 선수가 임창민(경찰청), 이원석(두산베어스), 한기주(KIA타이거즈), 김선규(SK와이번스) 정도인 것으로 알고 있다.

 

고교야구 선수들이 졸업반 즈음이 되면 골프를 배운다고 한다. 프로 선수가 되지 않으면 골프 강사를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다소 빈약한 야구 인프라로 인해 어릴 적 꿈을 포기하는 것이다. 역사를 만들었고 희망을 만들었던 많은 고교야구 선수들이 정작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꿈을 포기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맘이 아프다. 아무쪼록 2003년 청룡기 결승전이란 역사를 만들었던 선수들 모두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비록 야구를 떠났다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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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르도 로드리게스라

2010/01/22 10:04

고등학교 졸업 이후 메이저리그 전문가를 꿈꾸며 Sporting News에서 발간한 2004년 스카우팅 리포트를 산 적이 있지요. 6년 후 취직 걱정을 해야 하는 찌질이로 변했지만 이 책에 있던 선수들이 한국에서 뛰는 걸 보며 신기해 하며 한 번씩 보고 있습니다.

 

어제 저녁 다시 이 책을 펴게 되었는데요. 바로 KIA타이거즈에서 리카르도 안토니오 로드리게스를 영입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보니 텍사스 레인저스 마이너리그 유망주 부분에 쓰여져 있군요. 2003년 7월 18일 라이언 루드윅(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과의 트레이드로 텍사스 레인저스에 입단하게 되었군요. 참고로 이 때 당시 박찬호 선수가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뛰고 있었죠.

 

리카르도 안토니오 로드리게스는 1996년 아마추어 FA로 로스엔젤레스 다저스에 입단합니다. 남미출신 선수들이 이런 방식으로 계약을 많이 하는데 이 때 나이를 한 두살 정도 낮춘다고 하죠. 기록에는 1978년생이라고 나와 있던데 정말인지 모르겠군요.(보충 실제로 두 살 어리다고 속인 게 밝혀졌다고 하네요.)

 

각설하고 2000년 루키리그를 시작으로 2001년 싱글A 그리고 2002년 더블A와 트리플 A를 차근차근  밟아 나가며 BaseballAmerica에서 선정한 팀 내 유망주 1위에 뽑히기 까지 합니다.(BA가 유망주 부분에 있어서 권위적인 곳이라는 걸 생각해 본다면 그 때 당시 가능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러다 2002년 LA 다저스가 우완 셋업맨 폴 슈이를 얻기 위해 테리 멀홀랜드,프란시스코 크루세타(맞습니다. 삼성라이온즈의 그 크루세타입니다.)와 함께 로드리게스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보내게 되죠. 그 해 메이저리그에 콜업되어 7경기 등판해서 2승 2패 5.66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2003년 메이저리그에 15경기 등판해서 3승 9패  5.73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실망을 안겨줍니다.(2년 모두 선발등판이었습니다.)

 

텍사스 레인저스로 팀을 옮긴 이후 큰 기회를 잡지 못합니다. 2004년 5경기(4경기 선발)에 등판해서 3승1패 2.02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합니다.(이 시기 자신의 유일한 메이저리그 완투승과 완봉승을 기록하죠.) 그리고 2005년 12경기(선발 10경기) 등판해서 2승 3패 5.53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고 그 해 12월 19일 트레이드를 통해 필라델피아 필립스로 옮기게 됩니다. 트레이드 당시에는 상대 선수가 정해지지 않았고 추후 지명하기로 되었었는데 빈센트 파비야를 지명하죠. 텍사스 레인저스로서는 괜찮은 트레이드였던 거 같습니다.  

 

2006년 3월 29일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방출되고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플로리다 말린스, 피츠버그 파일렛츠 등과 계약을 했지만 모두 방출되었습니다. BA에서 검색하니 2009년 멕시코 Saltillo에서 뛴 기록이 있군요. 7경기 선발등판해서 3승 6.75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였습니다.(멕시코 리그가 타고투저라는 얘기를 들어서 이 평균자책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모르겠네요.)

 

2004년 스카우팅 리포트를 보면' the Rangers think his groundball tendencies can make him a good fit for the Ballpark'(레인저스는 그의 그라운드볼 경향이 그 구장에서 적임자로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제 멋대로 해석한 겁니다) 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통산 땅볼/플라이볼 비율(GB/FB)이 1.01밖에 안됩니다. 낮은 비율은 아닙니다만 제이콥스 필드와 아메리퀘스트 필드가 투수에게 호의적인 곳이 아니란 걸 생각해 본다면 땅볼 유도를 못한 게 메이저리그 커리어를 망친 걸로 보입니다.

 

2009년 멕시코리그의 성적을 보니까 GB/FB 비율이 1.81이더군요. 직접 보지 못해 자세한 얘기는 못 드리겠습니다만 땅볼 유도 능력이 멕시코리그에서는 살아난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능력 뿐만 아니라 홈 구장의 인조잔디와 타이거즈의 내야 수비능력이란 변수가 이 선수를 '제 2의 구톰슨'이 될 지 먹튀로 될 지 결정할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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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차라리 승점제를 해라

2010/01/19 12:29

'크루그먼의 경제학’(시그마프레스 2008.) 초반 부분을 보면 ‘유인’(Intensive)이란 단어가 나온다. ‘행동을 변화 시킨 사람에게 보상을 제공하는 그 어떤 것이다.’라고 나와 있다.
 
만약 단골서점보다 책값이 10% 정도 싼 인터넷 서점을 알아 그 곳에서 책을 산다면 또는 옷이 선착순 50% 세일이라는 말에 아주머니들이 육탄전을 벌인다면 이건 새로운 유인을 가져 자신의 행동을 변화시킨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내가 책을 읽고 이해한 바로는 그렇다. 그런데 왜 갑자기 경제학도가 아닌 베이스볼 오타쿠가 경제 개념을 이야기 하냐고? 오늘 이야기 할 주제인 ‘무승부=패’의 존속에 유인 이야기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지난 12일 있었던 2010년 제 1차 이사회를 앞두고 많은 야구인 들이 주목했던 안건은 대회요강 제 2조(승률계산법)의 개정 여부였다. 작년 승률계산법이 승리경기수를 경기수로 나누는 걸로 개정되었다. 별 거 아닌 거 같았던 계산법의 개정이 나비효과처럼 시즌이 끝난 뒤 어마어마한 결과를 낳았다. 무승부를 0.5로 계산하는 ‘종합계산제’나 무승부를 제외한 경기에 승리수를 나눈 ‘단순 승률제’를 적용했을 경우 공동 1위를 차지했거나 우승을 차지했을 SK와이번스가 2위를 기록하는 일이 발생한 것.

 

이에 많은 이들이 승률계산법의 개정을 원했다. 하지만 이사회 결과는 ‘존속’이었다. KBO의 보도 자료에 따르면 이 결정에 대해 ‘승률 계산은 무승부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시행 된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점을 감안하여 현행대로 승리 경기수를 경기수로 나눈다’ 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과연 KBO의 대답이 납득할 만한 이야기일까?

 

야구는 시나리오로 이루어진 드라마가 아니다. 사람이 맘먹는다고 그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천하무적 야구단’이 조작논란에서 자유로운 이유도 시청자들이 이런 점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런 게임에 무승부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무승부=패’를 존속시켰다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논란거리에 문제점을 제기하는 제도를 1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개정하지 않았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이 제도를 고착화 시키려고? ‘끝장승부 제의 명분을 얻기 위해 존속했다’는 음모론까지 생각하게 한다.

 

2009 시즌 경기 중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린 6월 25일 SK 와이번스와 KIA 타이거즈의 경기를 봐 볼까? 많은 사람들이 당시 12회 말 김성근감독의 선수교체 자체만 기억하고 있지만 그 날의 속사정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거 같다.

 

그 날 SK 와이번스의 등판 기록을 보자. 선발이던 채병룡 선수가 3이닝 4자책점으로 이른 시기에 강판 당했고 올 시즌 선발로도 뛴 고효준 선수가 3이닝을 던진 채로 물러나게 되었다. 조웅천 선수가 7회 말, 정우람 선수가 8회 말 1이닝씩을 던지며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그런데 아뿔싸, 상대팀의 마무리인 한기주 선수가 9회 초 동점을 허용한 거 아닌가. 꺼져갔던 승리의 불씨를 다시 지피기 위해 9회 말 마무리 투수 정대현 선수를 등판 시켰고 불펜투수에게는 긴 이닝인 3이닝을 책임지게 했다. 운명의 12회 말. 김성근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정대현 선수는 11회 즈음에 허리통증을 호소했고 남아있던 윤길현, 이승호 선수도 등판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에 등판한 선수가 바로 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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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 없는 자는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라는 예수의 외침이 있었습니다. 이 해프닝도 죄 없는 자가 김성근 감독에게 돌을 던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KBO 이사회 멤버들은 김성근 감독에게 뭐라 할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 네이버 스포츠 캡처

 

이 날의 상황은 투수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긴 일이었다. 하지만 만약 선두권 싸움을 벌이고 있는 A팀이 최하위인 B팀과의 경기에서 이런 상황을 맞이하여 타자를 투수로 세운다면? 그것도 다음 날 또 다른 선두권의 팀인 C팀을 상대한다면 말이다. 과연 우리는 무작정 A팀을 향해 돌을 던져야 할까? 이 경기를 비겨서 얻는 유인이 없는 상태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강요도 일종의 폭력이다.

 

‘무승부=패’ 존속 결정에 제일 먼저 문제를 제기한 야구인은 김인식 KBO 기술위원장이었다. 이후 ‘야신’ 김성근 SK 와이번스 감독이 "KBO 이사회가 야구 현안을 두고 진지하게 고민하는지 의심스럽고 실망스럽다"라며 이번 결정에 우려를 표했으며 대부분의 감독들도 존속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리고 이에 맞서서 사장단의 최고령자인 김응룡 삼성 라이온즈 사장이 ‘감독이 할 일이 있고 이사회에서 할 일이 있다’ 라며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삼성라이온즈 팬 분들께는 죄송한 표현이지만 김응룡 사장의 발언은 궤변으로 들린다.(그래도 너무 뭐라 하지 마시라. 내가 좋아했던 첫 팀의 감독이셨다.) 감독에게도 사장에게도 현장은 ‘야구장’이기 때문이다. 김응룡 사장이 ‘야구팬을 위해’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진심으로 야구팬을 위해 다시 한 번 재고해 주기 바란다.

 

어쩔 수 없었던 상황도 ‘촌극’이란 단어가 붙는 데 전략적인 선택이라면 얼마나 큰 사단이 나겠는가? KBO 이사회는 촌극이 재발할 수 있는 구조를 바꾸지 않았다. 한 마디로 직무유기를 한 것이다. 이사회는 분명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새해의 탁상공론이 우승팀을 바꾼 것처럼 조그만 유인 제공 하나가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KBO가 보도 자료를 통해 밝힌 이유로 ‘무승부=패’를 버리고 싶지 않다면 차라리 제 3지대인 승점제를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싶다. 승을 3점 무승부는 1점 그리고 패배를 0점으로 한다면 승리와 무승부에 차등을 주면서도 무승부를 선택해도 얻을 수 있는 유인이 있기 때문이다. 구단 사장님 중 한 분이 이 글을 보신다면 한 번 고민해 보시라고 권해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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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바이, 랜디존슨(미디어스 베이스볼 오타쿠)

2010/01/14 13:33

한국시간으로 6일 오전 9시.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를 접속하니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Big Unit officially ends 22-years career'(빅 유닛이 공식적으로 22년의 경력을 마감한다.)

 

랜들 데이비드 존슨(Randall David Johnson) 우리에게 랜디 존슨 또는 빅 유닛으로 알려져 있는 이 괴물이 한국시간으로 1월 6일 은퇴를 선언하였다. 5,000천 탈삼진에 125개를 남겨둔 채로 말이다.

 

그는 통산 300승을 기록한 스물네 번째 투수였고 불혹에 최고령 퍼펙트게임을 기록하기도 했다. 양대 리그에 싸이 영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내셔널 리그의 경우 1999년부터 2002년까지 4년 연속으로 수상하는 진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2001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접했고 커트 실링(2008년 은퇴)과 함께 공동 MVP를 수상하기도 했다.

 

수능 준비생 시절 자율 학습시간에 하는 한국 프로야구 경기를 접하기 힘들었다. 대신 재방송으로나마 방과 후에 접할 수 있었던 메이저리그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시기 리그를 평정했고 김병현 선수 덕분에 집중적으로 중계했던 팀의 에이스로서 그의 강력했던 모습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다른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은퇴보다 더 많은 충격과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다.(더불어 격세지감까지.)

 

이에 이번 『베이스볼 오타쿠』에서는 랜디 존슨을 들으며 연상되는 장면들을 이야기하며 그에 대한 존경을 조금이나마 표현해 보고자 한다. 랜디 존슨의 이야기에 따르면 코치로 계속해서 활동할 것이며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접했던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서 일을 시작할 것이라 한다. 앞으로 그가 걷는 길에 행복이 가득하길 기원한다. Randy Johnson, I will miss you.

 

(공이) 사람을 향합니다

 

메이저리그 매니아들은 대부분 아는 사실이고 많은 야구팬들도 최근 기사들을 통해 접했겠지만 선수 초기 랜디 존슨의 제구력은 최악이었다. 풀타임 선발로 뛰기 시작한 1990년부터 1992년까지 내준 볼넷이 120-152-144개였으며 그가 몬트리올 엑스포스 유니폼을 입고 뛰는 자료화면은 공이 엉뚱한 곳으로 가는 장면이 대부분일 정도였다. 이후 랜디 존슨은 놀란 라이언이란 귀인을 만난다. 존슨은 그에게 기술과 심리에 대해 조언을 받았고 그 조언빨이 1993 시즌부터 적중했다는 것도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서울말을 잘해도 조금만 당황하면 나오는 사투리처럼 한번 씩 그의 강속구는  포수 미트가 아닌 타자를 향하였다. 1993년 올스타전에서는 존 크룩(당시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머리로 공이 가며 크룩의 얼을 쏙 빼먹은 적이 있었고 1997년 스프링캠프에서 J.T 스노우(당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눈을 맞추기도 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올스타전에서 래리 워커를 상대하다 던진 공이 워커의 등 뒤로 향하게 되었다. 당시 불곰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래리 워커는 생명의 위험을 느껴(?) 헬멧을 거꾸로 쓴 채 오른 쪽 타자의 타석으로 옮기며 체면을 구겼다.  

 

빛났던 2001년 포스트 시즌

 

랜디 존슨은 포스트 시즌에 다소 약한 모습을 보였다. 시애틀 매리너스 소속으로 뛰던 1997년 볼티모어 오리올스과 맞붙은 디비전 시리즈에서 마이크 무시나와의 에이스 대결에 두 번다 패배하며 자존심을 구겼다. 이듬 해 휴스턴 애스트로스는 우승의 필요조건인 에이스를 얻기 위해 팀 내 유망주였던 프레디 가르시아, 카를로스 기옌을 보내고 랜디 존슨을 영입하였다. 존슨은 정규 시즌 계속된 호투를 선보이며 팀을 포스트 시즌에 진출 시켰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와의 디비전 시리즈 1차전에서 케빈 브라운과의 에이스 대결에 또 다시 패배한 것. 이후 팀이 1승 3패로 디비전 시리즈에 탈락하는 걸 무력하게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3년 후. 2001년 월드시리즈 우승의 기회가 랜디 존슨을 찾아 왔다. 소속팀이었던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가 서부지구 1위에 오르며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 것. 조건도 이전보다 좋았다. 동료 커트 실링이 최고의 시즌을 보냈기에 에이스로서의 부담감도 줄일 수 있었다.

 

시작은 좋지 못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디비전 시리즈 2차전에 출전했지만 당시 신인이던 알버트 푸홀스에게 홈런을 맞는 등 8이닝 3실점으로 패전을 기록했다. 포스트 시즌 7연패였다. 디비전 시리즈는 투구 내용도 팀 기여도도 1,5차전 승리투수였던 커트 실링에게 밀리는 모습이었다. 

 

그의 활약은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와의 NLCS부터 시작 되었다. 1차전 그렉 매덕스와의 맞대결에서 3안타 11삼진 무실점으로 완봉승을 기록 했던 것.(그렉 매덕스는 7이닝 2실점) 포스트 시즌 연패기록을 깨는 경기였다. 봉인이 풀린 랜디 존슨은 5차전에서 7이닝 8삼진 2실점으로 또 다시 승리투수가 되었다.

 

뉴욕 양키즈와의 월드시리즈에서 커트 실링, 김병현(부정적으로) 과 함께 두고두고 회자될 플레이를 선보인다. 2차전에서 앤디 페티트와의 선발 맞대결에서 11삼진 완봉승을 거두웠다. 6차전 앤디 페티트와의 리턴매치에서 7이닝 2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되며 김병현 선수의 계속된 블론 세이브로 인해 내려앉았던 팀 분위기에 불을 지피기도 하였다. 그리고 7차전 2:1로 지고 있던 8회 초 구원 등판하여 무실점으로 막으며 팀 우승과 함께 최종전 승리투수와 이틀 연속 승리투수 그리고 월드시리즈 공동 MVP라는 영광을 얻는다.

 

구대성이 안겨준 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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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된 그 날의 장면. 사실 이 플레이는 구대성 선수에게 안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낳습니다. 이 때 얻은 부상으로 한 동안 부상자 명단에 있어야 했고 그가 팀에서 방출되는 데 일정정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    

이 이야기는 랜디 존슨이 주인공도 아니고 그에게 있어서는 굴욕적인 사건이다. 아무래도 상대방이 구대성이었기에 기억이 남는 장면인 거 같다.

 

2005년 5월 17일 신시네티 레즈와의 경기에서 구대성 선수가 메이저리그 첫 타석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런데 너무할 정도로 홈플레이트에 떨어져 있는 거 아닌가. 서서 삼진을 당하기까지 해 셰이 스타디움에 있었던 관중들에게 야유를 받기도 했다.

 

4일 후 구대성은 뉴욕 양키즈와 의  대결에서 또 다시 타석에 서게 되었다. 7회 말 2:0으로 뉴욕 메츠가 이기고 있는 상황. 상대 투수는 랜디 존슨. 첫 타석의 에피소드를 알고 있었는지 랜디 존슨은 1,2구 다 146~8Km의 직구만 던졌다. 그리고 운명의 세 번째 공. 146Km의 직구를 던졌는데 구대성선수가 그걸 치는 게 아닌가. 그것도 중간 깊숙한 곳으로 치며 2루타를 말이다.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셰이 스타디움에 있었던 선수들과 관중들은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곳에 있던 사람 중에 이게 끝이 아닌 걸 안 사람은 몇이나 됐을까? 다음 타자 호세 레이예즈의 보내기 번트에 홈까지 쇄도하는 게 아닌가. 그것도 세이프.(화면상으로는 아웃이었다. 심판 욕 좀 먹었을 듯.) 이후 충격 먹은 랜디 존슨은 미구엘 카이로에게 홈런까지 허용하며 강판당하고 만다.

 

(랜디 존슨과 다른 코리안 메이저리거의 인연은 별로 없는 거 같다. 김병현 선수야 같은 팀 메이트였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고. 박찬호 선수의 2001년 첫 등판이 원래 랜디 존슨과의 선발 대결로 예정되어 있었던 걸로 알고 있다. 다행히 팀 에이스였던 케빈 브라운이 부상당해 개막전 선발로 나서게 되었고 동양인으로서 두 번째 개막전 승리투수를 기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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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호 선수 트레이드 요청이라...

2010/01/07 21:13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한국시리즈 6차전을 봤던 몇몇 분들이 이런 말을 했죠.

 

마지막에 장성호 선수의 웃음을 잊을 수가 없다고...

 

 

 

장성호 선수 뿐만 아니라 최희섭 선수 조범현 감독까지

 

출입기자여서 과연 협상 도중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알고 싶을 정도입니다.

 

우승후폭풍이라고 볼 수도 없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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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디 존슨 은퇴

2010/01/06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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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베이스볼 오타쿠 주인공은 랜디존슨 입니다. 이렇게라도 아쉬움을 달래야 할 거 같아서요(사진= 한겨레 신문사)

 

아무리 전설적인 인물이 많더라도 제 눈으로 목격했던 사람을 더 많이 추억하게 되지요.

 

오늘 랜디존슨이 은퇴를 발표했습니다.

 

제가 MLB에 가장 많은 관심을 쏟은 시기 리그를 호령했단 선수가 흘러가는 시간에 순응하며

은퇴를 선언하니 격세지감과 함께 여러가지 감정이 앞서네요.

 

그의 업적에 대해서는 많은 기사들이 그걸 입증하고 있으니 여기서 나열하진 않겠습니다.

 

대신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에 Chris Haft 기자가 작성한 은퇴 기사의 마지막 문장을 올리기로 하죠.

 

One factor is virtually certain: Johnson will be elected to Cooperstown on the first ballot.

(한 가지는 확실하다: 존슨은 첫 투표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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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즈 트레이드 단상

2010/01/01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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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턱돌아. 너는 그래도 계속 목동에 있는거지??(출처=서울히어로즈 홈페이지)

 

히어로즈와 관련된 트레이드가 성사되었죠.

간 사람들 얘기를 조금 하면 홈런이 많이 나오는 구장으로 유명한 목동구장에서 잠실구장으로 홈 구장을 바꾼 이현승선수가 홈런이 더 자주 나오는 대구구장으로 간 장원삼 선수보다는 좀 더 유리해 보이네요. 이택근 선수는 LG 트윈스에 있다는 보장이 아직 없어서 얘기 하기가 그렇구요.

 

세 명을 트레이드 시킨 걸로 막아서 다행이라고 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그 분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요.

 

물론 이 세 건의 트레이드가 지금 당장에 문제가 생긴다는 건 저도 우려하는 바이고

그랬기에 베이스볼 오타쿠에 히어로즈 글을 쓰게 된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반대를 한 이유는 우선은 당위성 때문이고 두 번째는 히어로즈의 전력 약화였습니다.

 

첫 번째는 두고 두고 이야기가 나올 것입니다.

저 역시 현금 트레이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반대의 논거로 이 세 건의 트레이드를 이야기 할 생각입니다.

 

다만 전력 출혈을 어느 정도는 막았다는 게 다행으로 여겨집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그래도 숨통이 트일 여지는 만든 거지요.

우선 쌍방울 레이더스 처럼 잘하는 선수들을 밑도 끝도 없이 다 내주는 트레이드는 아니였습니다.

당장 핵심전력인 강정호, 황재균 선수와 기대주 강윤구 선수는 지켰지요.

여기에 트레이드를 통해 받아 온 금민철, 김상수 선수는 항상 주목받는 유망주이지 않습니까?

베이스볼 아메리카 처럼 한국에 야구 유망주 전문 잡지가 있다면 팀 내 상위에 랭크될 선수를 받은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히어로즈에 잠시 있다 팀 내 선발 후보로까지 주목 받게 된 박성훈 선수까지 얻었지요.

(다만 이택근 선수의 빈자리가 조금 아쉽긴 하네요.)

 

여기에 유망주들은 잘 키워 낸다는 팀의 능력을 감안한다면

상당한 시너지 효과가 날 거 같습니다.

내년은 힘들겠지만 2011년 부터는 강력한 포스트 시즌 후보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단 전제는 '내년에 또 주축 선수를 파는 트레이드가 없어야 된다', '히어로즈의 수익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든지 새로운 모기업을 찾아야 된다' 입니다. 이렇게만 되면 KIA타이거즈로서 첫 풀타임 시즌이었던 2002년 2위로 바로 도약했던 기적도 일어날 것입니다.)

 

※ 참고로 없는 돈 때문에 잘 하는 선수 돈으로 파는 건 어느 때이건 반대입니다.

예전에 타이거즈 팬으로서 디인 기억이 있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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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09년 베쓰볼

2009/12/30 22:16

1학기에 수강했던 정치학 수업에서 정치와 관련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발표를 하는 과제가 있었다. 나는 ‘민족주의의 폐해’를 선택하였다. 황우석 사태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진보적 민족주의를 추구하는 분들의 잘못도 이야기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민족주의에 대해 디스(Diss) 한 놈이 올 해 3월에는 뭐 했을까? WBC 국가대표 유니폼 져지 사려고 10만원 모으고 있었다.(결국 실패했다.ㅠㅠ)

 

리쌍의 ‘발레리노’를 들어보면 이런 가사가 나온다. ‘무언가를 지켜야 하는 건 그것에 지쳐도 미쳐야 하는 것.’ 확실히 난 야구에 미쳤었다. 지켜야 할 게 없었음에도 지치도록 야구에 미쳐 있었다. 어머님의 구박과 좁아져 가는 대인관계 속에서도 야구를 버리기가 쉽지 않았다.

 

2004년 풋풋한 스무 살 새내기 때 이런 사실을 밝히면 “나는 매니아요” 라고 광고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강산이 바뀌려 시작하는 5년 후-대운하 땜에 진짜 바뀌려 한다.- 똑같이 이야기를 하면 상대방에게 “아, 그러세요. 주위에 그런 사람 많은데.”라는 심드렁한 대응만 돌아오게 되었다.

 

WBC 대만 전 류현진 선수가 1번 타자에게 내 준 볼넷부터 한국시리즈 7차전 나지완 선수의 끝내기 홈런까지. 2009년 하나의 유령이 대한민국을 배회하였다. 야구라는 유령이.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 즉 초등학생과 사춘기 청소년, 여대생과 남학생 커플, 부부와 미취학 아동들이 유령을 보려고 입장료를 지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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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이런 모습을 보기 위해 야구장을 찾습니다. 그리고 선수들은 이런 모습을 보여줍니다.(출처=기아타이거즈 홈페이지)

 

프로야구는 이들에게 실망감을 주지 않았다. 비록 KBO가 상식 이하의 행정을 펼치며 팬들의 마음을 비참하게 한 적은 있었지만 최소한 선수들은 팬들을 실망시켜주지 않았다. 선수들의 플레이 하나 하나에 혼과 열정이 담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극적인 승부를 불러오고 이는 또 다른 사람들을 야구팬으로 만드는 선순환이 이루어졌다. 오승환 선수를 상대로 한 박용택 선수의 만루 홈런, KIA 타이거즈의 단일 개월 최다승인 20승을 완성했던 장성호 선수의 만루 홈런, 홍성흔 선수의 갈매기 타법에 이은 끝내기 안타까지 이 모든 게 팬이 없었다면 나올 수 있었을까?

 

그리고 흥행만큼이나 논란거리도 많았다. WBC 결승전에서 임창용 선수의 싸인 미스 논란. 선수들의 잦은 부상과 노후 된 구장들. 방송사와 대행사간의 중계료 문제. 감정싸움까지 오가게 했던 한국시리즈 대결. 허점투성인 FA제도. 돔 구장 건설계획과 히어로즈 현금 트레이드 논란. 선수노조 결성 노력까지. 오로지 야구결과만을 이야기 했던 예전과 달리 야구와 관련하여 많은 소재들과 담론들이 논쟁의 장으로 소환되었다.

 

22년 째 야구팬으로서 이런 현상에 어안이 벙벙하기도 하지만 흐뭇해지기도 한다. 내가 사랑하는 야구가 몇몇 소수 팬들의 전유물에서 모두가 즐기고 고민하는 문화코드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특이한 걸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자기만 좋아하면 외로운 법이다. 올 해 확실히 난 이런 외로움에서 벗어났다.

 

다만 이런 야구 열기를 이용하려는 몇몇 정치인들의 행태에는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4대강 살리기에 성공하면 야구장도 자동적으로 짓게 된다고 주장하는 분. 지난 7년 동안 야구장을 짓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다가 줄어드는 지지율과 연고지 팀의 극적인 우승을 보며 쌩뚱맞게 돔 구장을 건립하겠다고 이야기 하는 광역단체장. 과연 이 분들은 야구를 이용하며 살림살이가 나아지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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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도 이야기 했지만 저는 행운아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주제에 대해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야구 가지고 밥 먹고 살고 싶은 데 가능할까요?(출처=미디어스 홈페이지)

 

이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베이스볼 오타쿠를 시작하는 시점이 늦었다는 건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크다. 개인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많은 야구인을 만나고 싶었고 나름 야구 전문 블로거 로서 활약하고 싶었던 올 해의 바람이 여러 가지 상황들로 인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야구 열기에 편승해서 칼럼으로나마 야구팬들과 만나기에 야구와 관련하여 많은 포스트를 작성하고 있는 블로거 분들께 죄송하기만 하다.

 

2009년 부끄러운 칼럼리스트에서 2010년 ‘전문’이란 단어가 부끄럽지 않는 야구 전문 블로거로 환골탈태할 것을 약속하겠다. 내 방 넷북 앞에서 때로는 현장에서 야구와 관련된 모든 이야기를 할 것이다. 많은 분들의 접속과 격려 그리고 질책을 기대하고 있겠다.

 

사흘 후 2010년이 다가온다. 혹자는 ‘올 해 반짝 흥행이 아니냐. 내년 2010년 시즌이 문제다.’ 라고 걱정한다. 이런 행복한 시간 전에 경기장에서 선수들이 관중석에서 흐르는 벨 소리를 듣는 것도 경험한 적이 있었기에 이 들의 걱정에 일면 동의한다.

 

하지만 올 해 많은 분들이 야구가 무미건조한 스포츠가 아닌 인간의 희로애락을 불러일으키는 예술이라는 걸 알지 않았는가. 야구는 야구다.(Baseball Being Baseball) 야구가 달라지지 않으므로 벌꿀이 꽃을 향해 날아오듯 많은 분들이 이 희로애락을 다시 느끼기 위해 야구장을 방문할 것이다. 벌써 2010년 프로야구가 기대된다. 내년에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야구장과 미디어스에서 뵙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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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제 선수의 쾌유를 기원합니다.

2009/12/29 15:44

 컴퓨터를 켜니 김명제 선수의 교통사고 소식을 접하게 되네요.

개인적으로 2007년 포스트시즌 때 리오스, 랜들에 이어 3선발로 활약한 장면들이 생각납니다.

기사들을 보니 크게 다친 거 같은데 부디 건강하게 그라운드에 복귀하기를 기원합니다.

교통사고 후유증을 겪지 않게 되기를 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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