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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2/23
    재밌을 거 같아서 오랜만에....
    칸나일파
  2. 2006/02/19
    친구(1)
    칸나일파
  3. 2006/02/15
    와...(7)
    칸나일파
  4. 2006/01/20
    평화를 살 수는 없지만, 함께할 수는 있죠(4)
    칸나일파
  5. 2006/01/15
    박종철 열사 추모제에 다녀왔다
    칸나일파
  6. 2006/01/10
    헌책방(1)
    칸나일파
  7. 2006/01/06
    불로그 만들다(2)
    칸나일파

재밌을 거 같아서 오랜만에....

무화과님의 [앞으로 몇 가지씩이나 남았을까?] 에 관련된 글.

어릴 땐 이런 거 많이 하고 놀았던 기억이 난다. '내가 좋아하는 숫자는?'

뭐 이런 거까지 전부 일기장에 정리해가면서 말이지..

오래만에 재미삼아 한 번 해본다.

 

 

Four Jobs I’ve had in my life(일생에 가졌던 네 개의 직업)

 

전쟁없는세상책임활동가

(엄마, 아빠는 매일 같이 사무실은 뭐하러 나가냐고 말한다. 갑갑한 일이지... 직장인이라면 이렇게 안 물어 볼텐데..'어이, 김과장 오늘 회사에는 뭐하러 가나?')

 

과외 

(-.-;; 중학교 수학 선생님 아들도 과외 했었다. 그 아이, 재수했다.)

 

집행국

(이거 돈벌려고 해 본 건 과외 밖에 없고. 궁색하다. 채울 게 없다.)

 

교무과 소지 

(궁색하다. 근데 아주 웃기지만 과외 말고 돈 받고 했던 일이 또 있으니 바로 이거다. )

 

I can watch over and over(몇 번이나 다시 볼 수 있는 네 가지 영화)

 

 

지구를 지켜라

(신하균 멋져, 백윤식의 발견, 내 사고 방식의 중요한 부분)

 

708호-이등병의 편지

(찡하다. 사실 이거 빼고 몇 번이나 볼 수 있는 건 없다. 몇 번이나 본 건 있지만.)

 

비트

(똥폼으로 일관하던 나날의 로망. 정우성은 비트에서 환상 그 자체였고, 비트에서 멈춰서버린 것 같다)

 

복수는 나의 것

(송강호의 대사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다. '나 너 착한 놈인 거 알거든.' 얽고 얽히는 비극의 알레고리)


Four places I have lived(살았던 적이 있는 네 곳의 장소)

 

충남 서천(7살때 서울로 이사와서 기억이 별로 없다.)

 

서울 종암동(잠시 2년간 청량리로 외도한 거 빼고는 20년 넘게 여기 살았다. 그런데 요즘은 아파트가 너무 많이 생겨서 어릴 적 다니던 동네들이 전부 사라졌다. 가난의 기억을 반추할 곳이 없다.)

 

서울 청량리(잠시 2년간 외도했던 곳. 아버지는 경동시장이 붙어 있어서 장보기 편하다고 무지 좋아하셨다. 지금도 틈만 나면 경동시장에 간다.)

 

학생회실(수배 생활 1년 동안 머물렀던 곳. 은박지를 깔고 1년을 살아도 튼튼한 나는 정말 체력이 좋은 거 같다.)

 

 

Four TV shows I love to watch(좋아하는 네 가지 TV 프로그램)

 

네멋대로해라 (처음으로 씨디를 구워 선물할 만큼 괜찮은 드라마)

 

떨리는 가슴(네멋의 인정옥 피디도 함께한 불후의 명작)

 

개그콘서트(나는 개콘 오타쿠...뜨시!!)

 

스타리그(-.-;;)

 


 

Four websites I visit daily(매일 방문하는 네 개의 웹싸이트)

 

진보넷 (주로 몇 몇 블로그를 본다.)

전쟁없는세상 홈페이지 (아무 생각이 없이도 가게 된다)

네이버 (단 맛에 길들여진 나)

법무부 민원센터(병역거부자들에게 편지 보내기, 전자서신이 있어 편하다)


 

Four of my favorite foods(가장 좋아하는 네 가지 음식)

 

라면

(사시사철 먹어도 안 질린다. 떡라면 먹다가 만두라면 먹다가 최근에는 치즈라면까지 섭렵했다.)

 

설렁탕

(매일 이것만 먹자고 해서 짜증내는 사람이 있을 정도..)

 

부대찌게

(-.-;;)

 

(매끼마다 먹는다.)

 

 


Four places I would rather be right now(지금 있고 싶은 네 곳의 장소)

하늘공원

(봄날에 낮잠자기 제일 좋다.)

 

남산

(평상에 누워 하늘을 본다. 바람소리에 사르륵 거리는 나뭇잎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 한 순간 시인이 된 거 같다. 근데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죽치고 앉아 소주를 마실 때가 많기 때문에 찜을 잘해야 한다.)

 

초등학교 운동장

(열심히 뛰노는 아이들을 보면 그냥 행복해진다. 내가 초딩 때는 매일 해질때까지 운동장이 바글바글했는데, 요즘은 아이들이 학원을 많이 다니니까 방과 후엔 운동장이 썰렁하다. 사람들이 잘 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아이들이 떠난 자리를 동네 아줌마들이 걷는다. 나는 가끔 뛴다. 기분이 좋다.)

 

바다

(항상 느낌이 다른 거 같다. 항상 무섭고 신비롭다)

 

 

 

Four bloggers I’m tagging(태그를 넘기는 네 명의 블로거)

 

-아랫집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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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언제부턴가 나는 단체활동과 관련된 경우가 아니고는 사람들을 잘 만나지 않는다.

불행한 일이지만 사람들을 만나도 별로 즐겁지 않을 때가 많다.

왜 이렇게 되었는 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을 만나면 부담스럽다.

내가 상태가 좋지 않으면 더더욱 사람들 만나기가 부담스럽다.

 

 

탈출구 같은 것일까? 이런 상태일수록 연애에 더 집착하게 된다.

연애가 잘 되지 않으면 그 때서야 사람들을 찾는다.

위로가 필요하다. 아주 이기적인 욕구다.

내가 힘들 순간이 찾아와야 비로소 타인과 소통하려 하고 타인의 손길을 요구한다.

 

 

이틀 전에는 아주 오래된 친구를 만났다.

서로 친구라 부를 만한 관계를 맺어본 적도 없으면서, 희한하게 연락이 끊기지 않는 사람.

민망하지만 '친구'라 부르지 않고는 딱히 뭐라 말하긴 힘든 그런 친구.

그 친구는 십년 전, 같은과에 입학했던 동기다.

우리는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에 입장이 서로 달라 으르렁 거리던 사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쪽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고 나 혼자 흥분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없는 녀석으로 보였을거다.

그토록 맹목적이고 저돌적인 사람일 수 있다는 게 말이다.

그러다 그 친구는 학교를 옮겨 재입학을 했다. 그리고는 서로 연락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 우리가 다시 만난 것은 아무래도 '병역거부'가 계기가 되었다고 해야 맞겠다.

보석으로 잠깐 나와 있는 사이, 그 친구는 응원의 메세지를 보내왔다.

한 사오년 만에 연락이 닿은 것 같다.

그리고 감옥에 있을 때 면회도 한 번 왔고, 편지도 한 번 보내왔다.

 

 

그렇게 해서 이틀 전, 우리는 다시 만났다.

나는 또 일방적으로 수다를 떨었다. 의외로 친구와 얘기가 잘 통했다.

 

 

 

친구는 내게 힘내라고 동화책 한 권을 선물했다.

동화책 선물, 아주 독특하다. 그 친구는 항상 나 만큼이나 독특하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발버둥칠수록 정작 그 활동가들은 우울하고

아프게 된다는 현실이 갑갑하지. 진짜 좋은 세상을 내 안에 품고 있으면,

나도 저절로 좋고 행복하고 남들 보기에 부러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친구는 속표지 가득 응원의 메세지를 적어두었다.

 

 

그래, 나도 그런 생각으로 가득할 때가 있었다.

너무나 많은 희망을 품고 있어서 하루 하루가 즐겁고

그런 나를 보는 사람들도 덩달아 즐거워지는.

그런데 지금은 왠지 너무 밝고 희망 가득찬 사람을 보면 거.짓.말 같다.

내 마음은 어딘가 모르게 심히 뒤틀려 있는 것 같다.

 

 

'어린 아이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면 기쁜 건 기쁘고 슬픈 건 슬프고 자랑스러울 땐

자랑스러울텐데...'

 

다시 한 번, 그런 마음으로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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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블로그 방문자가 벌써 1000명이다.

 

네이버에 있을 때는 하루에 두세명 왔다가는 게 고작이었다.

 

진보넷 블로그 떳나보다. 이 정도인 줄 몰랐다.

 

이거 슬슬, 신경, 쬐금 쓰인다.

 

자기 검열하는 거 아냐...

 

아웃사이더를 자청하는 칸나일파는 슬슬 고민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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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살 수는 없지만, 함께할 수는 있죠

이 맘 때 쯤이면 한 해를 돌아보고, 새 해를 그리며
그간 감사했던, 또는 소홀했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송년의 정을 나누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많은 분들 연하장을 쓰기도 하실 거고요.





그간 길바닥평화행동으로, 어린이와평화팀 지역 순회로
이렇게 저렇게 함께 하던 이들이 새해맞이 평화 엽서를 만들었어요.





처음 모티브는 이름없는공연팀의 공연 가운데 하나인
'이 아이들에게도 크리스마스를 01' 씨앗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성탄과 송년의 기운으로 바쁘게 오가는 시민들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로 말을 건네는 형식,
비록 작은 것이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시민들의 일상에 좀 더 가깝게 다가서고 싶은 바람이었습니다.





무뎌져가는 전쟁의 슬픔에 대한 이야기를
일상의 언어, 일상의 행위 속에서 함께 나누어갈 하나의 고리를 찾고자 한 거였고요.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할 때 쯤에는 이미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기에는 많이 늦어 있었고,
평화 연하장으로 그 마음을 담아 보고자 했습니다.

워낙 늦게 준비해 시작한 일인데다 특정한 책임 단위 없이
길바닥이나 순회 길에서 만나는 이들이 마음만으로 진행한 일이어서
진행하는 과정이 서툴고 급하기는 했지만
마음을 함께 해 주시는 화가 분들이 선뜻 내 주신 작품으로 해서  
평화의 울림이 여운 깊게 담긴 새해 맞이 평화 엽서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오늘이면 디자인을 마쳐 인쇄에 들어갈 예정이고요,
엽서는 모두 다섯 장을 한 세트로 해서 3000원에 판매하려 합니다.
내일이면 웹자보를 만들어 다시 홍보하게 될 거고요,
인터넷에도 도메인(peacecard.or.kr)을 등록해 이번 주말이면
평화 엽서 싸이트를 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와 관련한 배너와 온라인 직접 결제 방식들도 지금 준비 중이고요.

많은 분들 관심가져주기를 바랍니다.





억압과 차별로 아픔이 드리워진 자리
빼앗김과 쫓겨남으로 삶이 고달픈 자리
전쟁의 총성 아래 가녀린 목숨 스러져가는 자리

2006 병술 새해
작고 가난한 목숨들 살아가는 땅 위로
햇살같은 평화 고루 내리기를
당신과 함께 기원합니다.

이라크 점령군은 모두 돌아가야 합니다. 한국군 자이툰 부대의 철군을 기원합니다.





새해맞이 평화엽서에 쓴 작품들은

별음자리표 님 - 한송이 평화
손문상 님 - 무슬림 여인
최병수 님 - 콩 심은데 콩 난다
김환영 님 - 질경이
이철수 님 - 좋은 인연

들입니다. 고맙습니다.




법능 스님 - 절망하지 말자



< 출처 : 대항지구화행동(cga.gg.gg) >


 

구입을 원하시는 분은 여기로 가보세요.

http://cgakorea.org/bbs/zboard.php?id=peacec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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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열사 추모제에 다녀왔다

1.

학생운동을 시작했을 무렵, 학생회실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쌓여있던 수많은 책들. 지난날 학생운동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는, 수많은 팜플렛과 소책자들. 그 가운데 '그대 온몸 깃발되어'라는 책이 있었다.  그것은 합법적인 출판이 불가능하던 시절에 나왔던 해적판 박종철 열사 평전이었다.

 

 

2.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싸움이다. 한 편, 역사는 망각과 선택을 둘러싼 싸움이기도 하다.

과거사 청산을 둘러싸고 말들이 많은 요즘, 전쟁의 상처와 기억이란 주제로 고민이 많은 요즘, 부쩍 그런 생각이 늘었다.

 

사람들은 달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수많은 열사 추모제 때마다 기조를 무엇으로 할 지 다툼을 벌였다. 사회자들은 적절히 용어들을 골라 쓰려고 애를 썼다. 어떤 사람들은 '수구세력 청산'을, 어떤 사람들은 '자주민주통일'을, 또 어떤 사람들은 '노동해방'을, 또 어떤 사람들은 '인간해방'을 외쳤다. 각자 조직 성향에 따라, 인식에 따라 열사들의 행적을 취사선택해서 기억했다. 망각과 선택을 둘러싼 싸움은 때론 거친 분위기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것을 알아서 였을까? 추모제 때마다 아버지는 '내가 여기에 오신 분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그저 계속 종철이를 기억해주시는 분들에게 감사드릴 따름입니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한나라당에 들어갔다는 박종운 씨(박종철 열사가 끝까지 거처를 대지 않았던 그 사람) 역시 늘 그 추모제 자리 한 켠을 지키고 있다.  

 

처음 학생운동을 배울 때 그는 내게 '투사'였고,

조직운동을 시작했을 때 그는 내게 '사회주의자'였다.

그렇다면 그는 내게 지금 무엇하는 누구인가? 아니 나는 그를 무엇하는 누구로 기억하려 하나?

 

 

3.

박종철 열사는 과학생회장을 지낼 때 과방 칠판에 '개인주의 귀신 물러가라'고 써두었을 정도로 개인주의를 싫어했다. 자기 한 몸 돌보는 것을 이기적인 요구로 여겨 항상 남을 먼저 도왔던 휴머니스트이기도 했다. 또 그는 써클에 참여하여 레닌을 공부하고, 자본과 권력을 날카롭게 비판하던 사회주의자이기도 했으며, 민주주의자이자 동시에 반미주의자이기도 했다.

 

 

오늘날의 잣대로 뭔가를 끄집어내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지난날의 과학적 인식과 운동방식으로 오늘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짓이다. 

 

 

나는 그저 이 날 하루 나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으면 된다.

내가 생각하는 최선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지 생각하면 된다.

그가 인간에게 희망을 품었다는 것, 그래서 다른 세상을 꿈꿨다는 것, 그리고 행동했다는 것을 기억하면 된다. 그 이상의 해석은 모두 자기 몫이다.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

(박종철 열사 추모시)

 



오늘 우리는 뜨거운 눈물을 삼키며 솟아오르는 분노의 주먹을 쥔다

차가운 날
한 뼘의 무덤조차 없이
언 강 눈바람 속으로 날려진
너의 죽음을 마주하고,
죽지 않고 살아남아 우리 곁에 맴돌
빼앗긴 형제의 넋을 앞에 하고
우리는 입술을 깨문다

누가 너를 앗아갔는가
감히 누가 너를 죽였는가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우리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다
너는 밟힌 자가 될 수 없음을
끝까지 살아남아 목청 터지도록 해방을 외칠
그리하여 이 땅의 사슬을 끊고 앞서 나아갈 너는
결코 묶인 몸이 될 수 없음을

너를 삼킨 자들이
아직도 그 구역질나는 삶을 영위해가고 있는 이 땅, 이 반도에
지금도 생생하게, 생생하게 살아있는 너
철아,
살아서 보지 못한 것, 살아서 얻지 못한 것
인간 자유, 해방
죽어서 꿈꾸어 기다릴 너를 생각하며
찢어진 가슴으로 약속한다
거짓으로 점철된 이 땅
너의 죽음마저 거짓으로 묻히게 할 수는 없다

그리고 말하리라
빼앗긴 너를 으스러지게 껴안으며 일어서서 말하리라
오늘의 분노, 오늘의 증오를 모아
이 땅의 착취,
끝날 줄 모르는 억압,


숨쉬는 것조차 틀어막는 모순 덩어리들,
그 모든 찌꺼기들을
이제는 끝내주리라.
이제는 끝장내리라.

철아,
결코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우리의 동지여,
마침내 그 날
우리 모두가 해방춤을 추게 될 그 날
척박한 이 땅 마른 줄기에서 피어나는
눈물뿐인 이 나라의 꽃이 되어라.


그리하여 무진벌에서, 북만주에서 그리고 무등에서 배어난
너의 목소리를 듣는 우리는
그 날,
비로소 그 날에야
뜨거운 눈물을 네게 보내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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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구색에 맞는 신문을 구할 수가 없어 계속 읽고 있는 한겨레 신문. 한겨레 수준의 주장을 갖고도 극좌파 소리를 들어야 하는 세상에서 ‘한겨레마저 없다면..’ 하는 불안감에 오늘도 나는 한겨레를 본다. 한겨레가 진보의 레테르를 지켜내기 위해 홀로 ‘유일한 진보신문’을 자처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빨리 오기를 바라며.

김대중에서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민주화 세력의 연속 집권, 민주노동당의 분전 이후로 정치면은 아예 접었고 그나마 사회면은 직업 특성상 보게 되는데(이런 식으로 신문을 보면 사실 별로 볼 게 없다), 그나마 문화면을 가장 즐겨 본다. 이유인 즉 문화면이 가장 자유롭게 발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라는 외피를 두르면 무슨 얘기든 할 수 있다는 관념을 가장 잘 써먹는 건 조선일보, 동아일보 같은 메이저 신문사들인데 이들은 심지어 마이너리티 리포트 따위의 지면을 만들어 병역거부를 기사화하면서 사설란에서는 피를 튀기며 병역거부 결사반대를 외치는 자들이다. 하긴 그런 걸 꼬집어 욕하면 ‘우리는 원래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식으로 대답하겠지.


한겨레 신문은 금요일마다 책과 지성이란 타블로이드판 섹션을 덤으로 발행한다. 정말 재밌고 유용하다. 특히 기획특집기사로 연재되고 있는 ‘헌책방 순례’는 그 중 최고다. 난 헌책방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적당히 낡은 책냄새도 기분 좋다. 헌책방 주인들은 나름대로 터득한 운영방식 때문인지 대체로 손님을 터치하지 않는다. 하루 종일 뒤적이다가 빈 손으로 돌아가도 아무말 하지 않는다. 과도하게 친절한 점원이 들러붙지도 않고, 시간에 쫓기지도 않으며, 책값은 무지 싸고, 무엇보다 예상치 못한 수확이 가져다주는 기쁨이 엄청나다.

2주 전, 여자친구랑 인천에 있는 헌책방엘 다녀왔는데 신기하게도 그 다음날, ‘헌책방 순례’에 그 서점이 실렸다. 다음은 기사에서 발췌한 글이다.



“책은 예우받아야 합니다. 사실의 기록이기 때문이죠. 연애소설에도 시대상이 반영돼 있어요.”

....

“책 손님 또한 예우받아야 합니다. 귀한 시간을 내 자기를 찾고자 하는 분들이니까요. 책을 읽고 고르는 행위는 기도와 같아요. 이곳은 기도하는 공간입니다.”

....

“책방은 소중한 두 존재가 만나는 공간입니다. 책방 주인은 그저 책을 정리해주면 그만이죠.”

...

책과의 인연은 1966년 열일곱 살 때부터. 야간중학을 다니며 책을 월부로 팔았다. 당시는 전집뿐 아니라 단행본도 그랬다. <가정백과> 1500원짜리는 다섯달 끊어 한달 300원씩이었다. 걸으면서 종일 책을 읽었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하지만 그에게 ‘책은 곧 길’이었다.

....

“길 위의 모든 것이 책입니다. 책은 길보다 높지도 낮지도 않아요. 그저 삶을 알아가기 위해 디디는 것일 따름이죠.”

....

73년 스물네 살 때 두평반 책방을 차렸다. 그만큼 알고 싶은 게 많았고, 그 결과 세상과 타협하지 않아도 되었다. 당시는 큰길에서 영화학교 정문 근처 건널목까지 헌책방이 즐비했다. 그의 책방은 골목 안쪽에서 시작해 큰길 쪽으로 차츰 진출하면서 규모가 커졌다. 아벨은 가지를 뻗고 다른 책방들은 점점 사라졌다. 지금은 새책방 한 곳을 포함해 6곳이 남았다. 왜 그럴까. “책방은 죽지 않습니다. 책방 주인이 죽을 뿐이죠.”

....

죽어가는 게 어디 책방 주인뿐이겠는가. 실제 창고를 지으면서 보니 공사장에 젊은 인부가 없단다. 깨끗하고 폼나는 정보기술 쪽으로 몰려간다는 얘기다. 젊은이들한테 사는 것을 가르치지 않아서라는 진단이다. “책만 읽힌 아이는 머리 큰 귀신을 만듭니다. 설거지도 같이 시켜야 합니다.”

....

“책은 제값은 물론 몸의 수고와 함께 먹는 양식입니다.” 인터넷으로 ‘콕 찍어먹는’ 세태가 아쉽다.

....

마음 고픈 사람들이 세상을 읽어가는 연습도 하고, 삶의 의미를 읽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살아있는 글들이 살아있는 가슴에.’ 명함의 글이다.

.....

기사 전문을 보고 싶은 사람은 다음 싸이트를 방문해 보시라.

http://www.hani.co.kr/kisa/section-paperspcl/book/2005/11/000000000200511101855601.html



산다는 건, 생의 의지를 되새긴다는 건, 아주 단순한 일인지도 모른다. 헌책방 주인 인터뷰 읽으면서 가슴이 무지 시리고 뜨끔했다. 특히 그 날 하루 종일 이 한마디가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책방은 죽지 않습니다. 책방 주인이 죽을 뿐이죠.”


그래 내가 추구해 온 유토피아적인 가치들은 죽지 않는다. 지나온 날들이 후회되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쓸쓸하게 느껴질 때, 그 때는 다만 내가 죽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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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로그 만들다

1.

유행이 있다. 96년 입학 당시엔 나우누리가 대세더니 조금 지나 인터넷에 밀렸다.

아이러브스쿨, 다음, 프리챌, 싸이월드... 대략 이렇게 대세가 바뀌었던 것 같다.

싸이월드는 항상 쓰기 불편한 마음이 있었다. 다들 경험해 봤으리라. 시간이 흐른 뒤

남아 있는 수많은 흔적들... 그걸 지워버리다가 아예 미니홈피를 폐쇄했던 기억들을.

보이는 것보다는 쓰는 것이 백 배는 편하다. 이런 심리를 가진 사람들이 블로그를

쓴다고 한다.

 

2.

출소 후에 네이버 블로그를 쓰기 시작했다. 열심히 써도 찾아오는 사람 별로 없고

누가 누구인지 알아낼 길이 없는데다, 검색기능이 워낙 빠방해서 글을 찾는 사람은

그럭저럭 있으니 이게 딱 내 스타일이다 싶다. 그런데 친구들 중에 네이버는 쓰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첫번째 친구는 '네이버가 삼성 자본거라 안쓴다'고 했고

두번째 친구는 '네이버가 블로거들 사이에 비난을 많이 받는다'고 했다. 비난을 받는

이유는 블로그에 쓰인 글들을 교묘하게 자기들 이윤을 위해 이용할 뿐만 아니라

검열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용약관을 다시 읽어보니 원한다면 얼마든지

자기들 맘대로 정보를 이용할 수 있겠더라. 상업적 이용도 가능하고, 검열도

가능하겠더라.

 

3.

네이버 블로그를 없애기는 좀 그렇고,

일단 진보넷 불로그를 동시에 써 보기로 마음 먹었다.

아무래도 여기에 썼을 때 남들이 관심을 가져줄 만한 글이 있겠다 싶다.

진보넷을 쓴 지 한참 됐는데, 그래도 이 만한 공간이 없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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