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만일 저에게 ‘스님은 무엇 때문에 삽니까’라고 묻는다면   ‘무엇 때문에 사는지 묻기 위해 살고 있다’고  답할 것입니다.


 

청춘이라는 것은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권위와 전통에 도전할 수 있는 이단의 정신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것입니다.   그러니 젊은 대학생들이 무조건 남을 따라가는 인생이 아니라 스스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끝없는 물음 속에서 자기만의 인생을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친구 따라 강남가고 저 사람이 하니까 나도 따라 하는 아류인생이 아니라 스스로 삶의 길을 묻고 내가 나를 찾아가는 나 자신의 길을 가야합니다.


 

남들처럼 대학 들어가고 취직을 하고 결혼해 가정을 꾸려 살다가 죽는 습관적인 삶보다 한 순간을 살더라도 내가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스스로 묻는 것이 정말 잘 사는 길이고  더 행복한 길입니다.


 

MB시대에 와서 오로지 부자가 되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이라는 착각 속에서 더 많은 것, 더 편한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만, 부자가 된다고 해서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욕망만 쫓아 살고 있는 우리 모습은 마치 울타리 안에 주인이 주는 밥 얻어먹고 때로는 매질도 견디면서 사는 가축과 같은 삶입니다.  이것에서 벗어나 길들지 않는 야생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 21세기 청춘들이 가야할 길입니다.

 

 

그로 인해 때로 춥고, 때로 배고프고, 불편한 잠자리에 들더라도 울타리 속에서 편하지만 노예와 같고, 가축과 같은 삶 대신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스스로의 길을 가는 진정한 자유인, 진정한 삶의 주인이 되어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참된 인생의 길이고 정말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 2011년 9월 8일 충북대 특강 ‘21세기에는 혁명적 이단아의 길을 걷자’ 중


 

충북대학교에서 명사들을 초청해 옴니버스 특강을 한 달에 한 번씩 하는데 저에게도 한번 와서 강연을 해달라고 해서 충북대학교 개신문화관에서 대학생과 시민 등 6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연 특강에서 한 말입니다.

 

 

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   “아침에 도를 듣는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논어〈이인편(里仁篇)〉에 나오는 말입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이날 강연 첫머리에 학생들에게 “무엇 때문에 삽니까?”라고 물으면서, 저에게 그렇게 묻는다면   “무엇 때문에 사는지 묻기 위해 살고 있다.”고 답할 거라고 했습니다.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누가 그 답을 쉽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솔직히 모르기 때문에 “왜 사는지 몰라서 산다.”라고 답합니다.  우리가 사는 까닭은 정말 왜 사는지 몰라서 사는 것입니다.  만일 왜 사는지 안다면 공자의 말처럼 아침에 도를 듣는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은 것입니다.

 

공자를 세계 4대 성인으로 꼽은 이유가 이 한마디에 다 들어 있다고 봅니다.  소크라테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만은 안다.”  정말 우리는 나 자신을 아는가라고 묻는다면 모른다는 답 말고는 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지렁이가 왜 기어가는지는 압니까?  역시 모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정말 우리가 모른다는 그 사실 하나뿐일지도 모릅니다.


 

진리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솔직하게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진리는 간명하고 변설은 화려하고 복잡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추장스러운 것들 다 버리고 솔직하게 모른다는 그 상태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물으면 된다? 나는 뭘까? 왜 살까? 묻고 또 묻는 것이 수행인 겁니다.  우리가 80년을 살건, 100년을 살건 내가 뭔지, 왜 사는지 모르고 살다가 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인생이라는 길을 가긴 가는데 왜 가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른 체 그냥 가는 것입니다.


 

친구가 강남 가니까 나도 강남 가고 친구가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나도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겁니다.  유행 따라, 친구 따라 살다 가고 있는 겁니다.  돈을 쫓아, 욕망을 쫓아다니다가 길어야 100년을 살다 가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무엇 따라, 누구 따라 사는 삶은 아무리 잘해도 2류인생입니다.  내가 내 길을 가면 그건 아무리 못나도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길이고 일류의 길입니다.  그런 일류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일류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명품으로 치장하는 그런 물질적 인생이 아닙니다.


 

인터넷에서 재미난 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프라다라는 명품 가방을 올리고 한 번은 상표를 떼놓은 뒤, 또 한 번은 상표를 붙인 채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더니 완전히 다른 반응이 나왔습니다.  상표를 붙이지 않았을 때는 ‘뭐 이런 싸구려 가방이 있냐’‘동대문에서 샀냐 남대문에서 샀냐’‘한 5만원이나 할까’라는 반응이 주를 이뤘습니다.  그런데 프라다라는 상표를 붙이고 올려놓자 ‘와 멋지다. 간지난다’‘어디서 샀어요. 나도 갖고 싶다.  샤방샤방’‘역시 명품이라 그런지 뽀대 나네요’라는 반응으로 바뀌었습니다.  가방은 똑같은 가방인데 상표가 붙느냐 안 붙느냐에 따라 천지 차이가 난 겁니다.


 

사람들이 가방이라는 실제보다 어떤 상표가 붙었느냐 하는 이미지를 더 쫓는다는 말입니다.  프라다에서 만든 가방이 프라다라는 상표를 붙이지 않는다고 품질이 나빠집니까?  아닙니다.  가방은 가방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미지를 쫓습니다.  마치 불나방이 불을 쫓아다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이미지를 쫓다 보니까 짝퉁들이 나오는 겁니다.  짝퉁은 명품이 아닌데 명품처럼 거짓되게 꾸민 상품을 말합니다.  짝퉁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남들 따라 사는 2류인생이 다 짝퉁인 겁니다.  그러나 자기만의 길을 당당히 가면 그게 세상에 둘도 없는 명품이 되는 겁니다.

 

 

헛된 것을 쫓다 보니까 치장을 하는데 시간을 다 보내게 되지요.  환상을 쫓아서, 남 따라 살다 보니까 자기 얼굴도 연예인 얼굴처럼 되고 싶어 그 사진을 들고 성형외과에 가서 그대로 고쳐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모두들 그렇게 유행 따라 우르르 몰려다니니 이 사람이 저 사람 같고, 저 사람이 이 사람 같은 세상이 된 겁니다.  거품이 잔뜩 끼어 있는 거죠.  그러다 보니 성형한 얼굴보다 자연적인 얼굴인 ‘생얼’이 더 호평을 받습니다.

 

‘생얼’이 뭡니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평가 받는 것이죠.  달리 말하면 꾸미는 데 치중하기보다 내실을 구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프라다 상표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가방의 실제적 품질에 노력을 쏟게 되면 좋은 가방을 만들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제대로 된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남들처럼 상표나 이미지 쫓지 말고 자기만의 길, ‘생얼’의 길을 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괜히 없는데 있는 척, 고상한 척, 성스러운 척 하지 말고 못나면 못난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보여주며 살자는 겁니다.  솔직하게 살자는 겁니다.  변소간을 아무리 금단청, 은단청을 해놓는다고 똥냄새가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삶은 변소간처럼 살면서 화장을 덕지덕지해서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처럼 살 수는 없는 것이죠.  삶이 부처님 같아지면 누더기 옷을 입어도 성스러운 겁니다.


 

우리는 그동안 물질적 욕망과 외적 모습만 쫓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삶의 실질적 내용보다 헛된 이미지를 더 중요시하면서 살아왔습니다.  허상을 보고 달려온 것이나 다름이 없죠.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물질수준이 높아지면서 더욱 그렇게 됐습니다.  인간이 물질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인간을 부리고, 욕망이 인간을 부리는 사회로 전락한 겁니다.  내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유행따라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체 길을 가는 겁니다.  마치 레밍이라는 쥐가 앞의 쥐만 쫓아가다 강물에 모두 빠져죽는 것처럼 이 길로 가는 것이 옳은가라는 물음, 성찰을 잃어버리고 욕망만을 쫓아온 겁니다.


 

저 역시 그런 시류에 편승해, 스님이라는 어떤 환상적 틀에 맞춰 고상한 척하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스스로 되묻고 있습니다.  왜 사는지, 내가 누군지 모르는데 우리가 과연 무엇을 옳다고 감히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모르면서 안다고 확신하는 그것이 가장 무서운 재앙입니다. 안다고 확신하고 옳다고 맹신하는 순간 우리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고 또 다른 오류를 만들어낼 수 밖에 없습니다.


 

2009년 11월 30일 경향신문에서 마련한 작가 신경숙 씨와의 대담에서 “저는 확신을 가진 사람은 위험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가장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에 대해 늘 회의하지 않는 사람이 제일 위험합니다.  그런 태도가 전쟁까지 빚어냅니다.  확신을 갖고 하는 일이 갈등을 낳는 겁니다.  나는 무엇일까, 어떻게 사는 게 옳은가에 대해 항상 회의하고 돌이켜 보고, 끝없이 옳은 길을 살피며 가는 것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반성하고 성찰하지 않기 때문에 MB가 가장 나쁜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라고 한 적 있습니다.


 

나는 무엇일까, 어떻게 사는 게 옳은가에 대해 항상 회의하고 돌이켜보면서 끝없이 옳은 길을 살피며 가야하는 것은 비단 MB나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나 자신에게 가장 무겁게 묻고 있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끝없는 판단과 선택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삶이란 끝없는 판단과 선택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갈 것인가’ ‘저렇게 갈 것인가’. 그런 갈림길에서 정말 이것만이 옳고, 이것만이 진정한 길이라고 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역시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기에 더욱 겸허하게 물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 겸허한 성찰과 물음이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지 모릅니다.  성찰과 물음이 있다면, 설사 잠시 잠깐 잘못된 길에 접어들더라도 다시 돌아 나와 바른 길을 찾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무언가 옳다는 확신에 빠지지 말고, 늘 회의하는 혁명적 이단아가 되자고 하는 것입니다.


 

단지불회(但知不會), 다만 아는가 알지 못함을.  보조스님 <수심결>에 나오는 말입니다.  제가 인생의 좌표로 삼고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는 아직도 왜 사는지 몰라서 살고 있습니다. 언제쯤 왜 사는지 알게 되는 날이 올지도 알 수 없습니다.  공자님 말씀처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걸 깨닫게 될 날이 올지도 알 수가 없는 겁니다.


 

다만 저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다만 물을 뿐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과 제가 나누고 싶은 것은 다만 이 하나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2011년 11월 22일 명진 합장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