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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식 건축물

1. 몇 달동안 묵혀두었던 블로그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꿈 때문이었다. 기록해야할 꿈이 생겼기때문에.

그런데 그 꿈을 기록하지 못했다.

오늘 아침 깨어서 갑자기 기록하지 못한 그 꿈 생각이 났다.

그 꿈은 나에게 큰 위로를 주었으므로 어떻게든 기억해보려고 한다.

 

그 곳은 쁘렝땅백화점이 있던 그 거리의 어떤 건물을 연상케했다.

민예총 편집실에서 일할 때

낙원동 사무실에서 쁘렝땅백화점까지 걸어가서 718번을 타고 집으로 갔다.

아침에는 시흥역까지 걸어가서 1호선을 타고 종로3가역에서 내려 걸어갔었고.

쁘렝땅백화점 앞에서 718번을 기다릴 때엔 늘 할 일이 없어서 건물들을 보았고

그러다보니 그 건물들이 눈에 익었나보다.

 

꿈 속 건물은 쁘렝땅백화점 혹은 그 부근에 있던 어떤 근대식 건물을 연상하게했다.

건물 밖에서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연좌농성을 하고 있었다.

그 곳에 jsy도 있었는데 그는 그 무리의 지도자격인 것 같았다.

나의 위치? 심리상태는 관광객이었다.

그 곳 호텔은 편안했고 나는 그 곳에 관광객으로 묵고 있는 사람이었다.

jsy와 그 일행은 낮 동안은 농성을 하고 밤에는 우리와 같은 층에서 잠을 잤다.

 

나는 여행자의 마음으로 농성자들을 구경하거나

건물의 모양새를 관찰하기도 했다.

농성자들이 나를 경계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어디든 갈 수 있었는데

농성자들이 농성하는 그 위치에서 PBS라는 큰 영어문자가 씌어있는 건물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포인트가 있었다.

그러니까 밖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 안에 들어오고 싶어하고

특히나 카메라맨들이 탐을 낼만한 포인트에

나는 누구의 제지를 받지도 않고 접근할 수 있었던 거다.

하지만 나는 촬영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여행자의 마음으로 하릴없이 배회하다가

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쪽문이 있어서 들어갔는데

내가 들어가자마자 두 명의 사람이 나를 밀고 들어왔다.

그 문은 내가 묵고있는 호텔로 들어갈 수 있는 비밀문 같은 곳이었다.

그 두 사람은 사복형사같은 위치였는데

순간 나는 내가 조심하지 못해서 jsy와 그 일행들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너무나 미안했다.

어떻게든 그 두사람을 막아내고 다른 사람들한테 이 문제적 상황을 알려야했다.

그런데 거기 박환성PD가 나타났다.

박환성PD는 JP와 비슷한 시기에 장례를 치러야했던 독립PD인데

생전에 일면식도 없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꿈 속에서는 박환성pd는 그 두 사람의 침탈자를 가볍게 제압했고

나는 작은 카메라로 그 장면을 찍었다.

두 사람은 이내 포기하고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박환성PD때문에, 그리고 내 카메라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박환성PD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위로했다.

박환성PD와 함께 일하는 후배PD들이 있었는데

나는 그 PD들을 보면서 '저 사람들은 확실히 배우겠구나'라는 생각을 했고

그 사람들이 부러웠다. 

 

얼마 후 큰 운동장에서 연대집회가 있었다.

우리는 관광객으로 왔지만 연대집회에는 참여하기로 했다.

운동장 스탠드 같은 데에 앉아있는데 내 앞자리에 자폐성 장애를 가진 젊은 남성이 있었다.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의 돌발행동 때문에 난감해하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람에게 인사를 했고

그리고 머리가 너무 헝클어져있어서 그 사람의 머리를 빗겨주었다.

그 사람의 머리는 곱슬이었는데 아주 많이 엉켜있었고

내가 가진 빗은 얼레빗이 아니라 드라이용 빗이라서

머리를 빗기면서도 '이게 빗기려나' 싶었는데

의외로 술술 잘 빗겨졌다.

그 사람의 머리를 빗기고 있는데

남편이 왔다.

 

그는 남편이 오자 활짝 웃으며

"신부님, 저 예쁘지요?" 하며 안겼고

남편은 "네 좋네요. 하면서 다정하게 안아주었다.

모두가 어떻게 다가가야할지 몰랐던 그 사람을

편안하게 대해주는 남편이 모습에 내 마음이 환해졌다.

 

꿈 전문가는 현재 내가 처해있는 상황이 아주 잘 풀릴 거라는 것을

말해주는 예지몽이라고 했다.

예지몽을 꾼 적은 없었던 것같지만

(아니다 1년 전에 예지몽인지 몰랐는데 결과적으로 이제 와서 보니 예지몽인 어떤 꿈이 있었다)

그 말을 믿고 싶었다.

어떻게든 내가 처해있는 이 상황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꿈 속 박환성pd가 어쩌면 JP일 수도 있다고

JP가 어떻게든 나를 돕고 있을 거라는 말도 해주었다.

그 말에 슬픔과 따뜻함이 내 마음에 물처럼 차올랐다.

 

2.

쁘렝땅 백화점과 근대식 건축물에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앞날이 궁금해진다.

1971년부터 1984년 9월까지는 해남에서 살았고(13년)

1984년부터 1992년까지는 중랑구 중화동에서 살았고(8년)

1992년부터 2000년 9월까지는 광명 하안동(8년)

2000년부터 2010년 1월까지는 관악구 봉천동(10년)

2010년부터 2011년 2월까지는 주중엔 관악구 봉천동, 주말엔 강화

그리고 2011년부터 2019년까지 강화에서 사는 중이다.(8년)

 

3월 개학 전에 목포에 한 번 가고 싶다.

마루에서 창밖을 바라보면 평화로운 들판, 그리고 그 너머 산이 보인다.

내 노년의 풍경 또한 여기일까,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작년 이맘때 이혼 얘기가 나올 때

남편과 언니는 이혼 말고 별거를,

그래서 나는 서울에서 따로 살고

아이들과 남편은 강화에서 살면 어떨까라는 제안을 했었는데

나는 내 아이들과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이제 곧 아이들은 자랄 것이고 그리고 이 집을 나갈 것이다.

주중에는 흩어져살다가 주말이면 모두 모이는, 그런 형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내가 평생 바라봐야할 풍경이 이 풍경일까

누군가는 편안함을 말하지만, 그리고 나도 평화롭다고 느끼지만

여행지라는 느낌이 크다.

 

목포에 갔을 때 나는 고향에 온 것같았다.

나는 가겟집 아이였고

집 앞에는 5일장이 있었다.

장날 전에는 생선좌판 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셔서 같이 먹고 잤다.

그 할머니를 나는 좋아했다.

할머니 말고도 볼이 빨간 아주머니도 장날 전에 집에서 묵었었는데

어느 저녁, 아버지가 그 아주머니에게 친근감을 표현하는 걸 보고서

그 아주머니가 잠시 미웠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니 돌아가시기 전부터 장은 쇠퇴해갔고

이제 장은 안 선다.

축제같던 장날의 풍경과 정서는 이제 고향 그 곳에는 없다.

2003년에 어린 하은과 겨울여행을 갔었다.

남편이 운전하는 차의 뒷좌석에서 어린 하은을 무릎에 눕힌 채

차창 밖을 바라보면 규칙적으로 숫자가 적힌 푯말이 나타났다.

0에서 시작해서 숫자는 올라갔다.

그리고 목포에 도착할 때쯤 푯말에는 300이라고 써있었다.

남편이 말해주기를 서울에서 목포까지가 300Km라고 했다.

그 겨울여행의 첫 날은 군산에서 잤다.

밤샘운전이 무리였으므로 하루밤 묵을 어딘가를 찾다가 군산에 간 것이다.

그 때의 군산에는 특별한 기억이 없다.

 

나에게는 목포가 강렬했다.

목포의 항구에서 저녁을 먹는데

뱃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고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노란색 염색머리의 중년 여성을

뱃사람들은 "박양아~" 불렀고

박양이라고 불린 그 분은

뱃사람들에게 술을 따르고 있었다.

 

젖먹이 아이를 안고 뜨거운 국물을 떠먹으면서

나는 좀 슬펐다.

그리고 이 사람들 곁에서 함께 살면서 영화를 찍는 건 어떨까

그런 막연한 상상을 했었다.

최근에 목포가 화제가 되면서 그 밤의 슬픔, 그 밤의 상상이 떠올랐다.

노년의 나는 어떤 곳에서 누구와 함께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생각해보곤 한다.

이 곳은 아닐 것이다.

지금은 위기의 시간.

지금만 잘 넘기고 나서

천천히, 아주 꼼꼼히 생각해봐야겠다.

내 몸 안에는 떠돌이의 피가 흐르고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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