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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턴

꿈 속 시간은 작업실이 영농조합법인에 있을 때였다.

그 때처럼 영농법인의 사람들과 웃으면서 인사하지만 교류는 하지 않는 그런 관계.

오랜만에 작업실에 갔는데 바닥에 지푸라기며 흙먼지가 많았다.

작업실이 오래 방치가 되어었었던 거다.

기분이 별로 나쁘지는 않은 상태로 청소를 할까 말까 하고 있는데

kms가 왔다. kms는 내게 사과를 했고 나는 그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런데도 kms는 경찰에 끌려가게 생겼다.

kms를 도울 방법이 없을까 영농법인의 회장님, 부장님하고 같이 상의했지만

그들은 별 관심이 없었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지만 그다지 절실하지는 않은 마음으로

kms를 걱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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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완벽하게 몰락하기 전까지 kms라는 이름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을 지옥에 빠뜨렸다.

2017년 이후에 나는 남편과 그 이름을 사이에 두고 미친 듯이 싸웠다.

그녀는 남편 직장의 직원이었고 불행한 결혼생활 중이었으며 남편에게 많이 의지했다한다.

남편은 위기상태에 빠진 그녀와 자주 상담을 했고

남편과의 대화에 힘입어 이혼을 감행했다고 한다.

산책을 할 때면 남편은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그런가 싶었다.

미디어교육 때문에 사무실에 가서 보면 그녀는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남편 사무실에는 두 명의 여성이 있었는데 두 사람 다 이혼을 했고

그리고 남편이 펼치는 회사의 전망에 희망을 갖고 있었다.

나는 늘 조심했으나 그녀들은 나를 불편해했다.

책임자를 좋아하고 존경하지만

책임자의 아내가 자기네 사무실에 오는 것이 불편한 걸거라고만 생각했었다.

그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경제적 지표로는 좋은 평가를 얻기 힘드니까

활발한 프로그램으로 좋은 평가를 얻기를 원한 남편이 내게 부탁을 해서

미디어교육을 시작했다.

기획안이 뽑혀서 강사료가 생긴 시점부터는 동료들에게 교육을 넘겼으나

워밍업 기간에는 그냥 내가 교육을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누가 돈도 안받고 이 먼 강화까지 와주겠나.

 

그런데 그녀들은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걸 귀찮아했다.

문제는 자기네 직원들 회의를 할 때에는 네네 하고나서

영업과 배송으로 모두 나가고 두 사람만 있을 때 내가 교육을 가면

냉정하게 대하곤 했다는 거다.

남편의 아내라서 그런 식으로 대해지는 건 처음이 아니니 그냥 조심하며 할 일만 했다.

문제는 나의 동료들이 교육을 할 때 일어났다.

교육일정을 공유하지 않아서, 그러니까 교육이 없다는 걸 알려주지 않아서

두 번이나 내 동료들이 허탕을 쳐야했다.

두번째 허탕을 치던 날, 그날 나는 아침방송 때문에 여의도로 가고 있었는데

가는 길에 전화를 받았다.

남편이 전화를 해서 "오늘 교육없는데 알고 있냐"고 했고

나는 황급히 내 동료에게 전화를 했고 내 동료는 이미 합정역에서 M버스를 탄 후였다.

첫번째 허탕을 쳤을 때 나는 사무국장에게 일정 정도는 공유해달라고 했으나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한 거다.

 

두 명의 여성 중에 한 명은 회계였고 한 명은 프로그램 담당이었다.

프로그램 담당에게 전화를 해서

교육을 하고 싶지 않은 거냐.

그렇다면 당신들 조직 안에서 그렇게 말하고 교육을 안하겠다고 해라.

우리는 당신네 대표가 부탁해서 오는 사람들이다,

다른 도움은 바라지도 않는다. 일정조차도 공유하지 않는건 너무한 거 아니냐..

 

나중에 집에 돌아오니 나 때문에 그녀가 울었다며 나보고 뭐라고 그랬다.

뭐냐 이건.

막장드라마에 나오는 여성캐릭터들에 내가 걸린 거야?

어쨌든 남편과는 기나긴 냉전에 들어갔고

그리고 한 달 후, 시사회날,

나의 동료들이 와서 시사회 준비를 하는데

(그러니까 암막커튼을 치고 의자를 배치하고 기타 등등)

그녀들은 꼼짝을 하지 않고 구경만 하다가

시사회가 시작을 했는데도 오지 않아서 남편이 부르러 가고

뭐 기타 등등.

남편은 그러니까 처음으로 그녀들이 나와 나의 동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자기가 애써 부탁해서 하게된 사업에서

자기네 직장 동료들이 어떻게 처신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쪽팔렸겠지.

쪽팔렸을 거다.

 

그러니까 멍청한 남편은 그동안 호구노릇을 하고 있었던 거야.

좋아하는 과자를 사주고 신부님, 신부님, 하면서 살살 거리니까

그냥 자기가 잘하고 있는 줄 알았던 거다.

그리고 자애로운 신부님으로서

이혼위기에 빠져있는 여성이 형편이 어려우니까

출근시간은 늦춰주고 퇴근시간은 당겨주고

아이가 학교 끝나는 시간이면 언제든 픽업을 위해서 나가게 해주고.

 

언젠가 남편 회사에서 오리요리를 했다고 초대를 한 적이 있었다.

큰 애와 같이 갔다가 본 이상한 풍경.

그녀는 자기 아이들 뿐 아니라 자기 친구들까지 데려와서 호스트노릇을 하고 있었다.

내가 사무실에 가면 늘 무표정했던 그녀는

그렇게 다른 얼굴로 호스트노릇을 하고 있더라.

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 간 거라서 나도, 큰애도 그냥 인사만 하고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러니까 어떤 풍경은 나중에 아주 다르게 이해된다.

그러니까 오리요리가 넉넉해서 가족들과 친구들을 부른거다,라고 넘어갔던 그 일이

다시 떠오른 것은 시사회 이후였다.

시사회 사건 이후로 남편이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며칠동안 외부활동 없이 조용히 직원들의 상황을 파악하고

나이 어린 사무국장이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말하자면 두 명의 여인들이 실질적인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출근시간도 멋대로고, 퇴근시간도 멋대로이고

야근을 한다 하고서 저녁을 먹으러 가서 외부에 오래 있다 와서 얼마 있다가 퇴근하는,

그런 행태들을 파악한 후에

전체회의에서

"이제 특혜는 없다. 그냥 원칙대로 한다"라고 한 후

그녀들은 무단결근을 했다가

법인에 내부고발을 한다.

 

횡령 얘기는 그 때부터 나왔을 거다.

그녀들은 그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1. 내가 사무실 일에 너무 관여를 해서 일을 할 수가 없다.

2. 내가 푸른영상 이름으로 사업을 벌이기 위해서 우리 조직을 이용한다.

3. 신부님만 아는 돈거래가 있다.

뭐 기타 등등.

 

그녀들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

그러니까 오물을 뒤집어 쓴 나의 자리에 대해서는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만 법인은 내부감사를 통해

kms가 맡은 일은 회계인데

회계 일이 제대로 안되어있다는 것,

조직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남편에게 경고.

뭐 그런 식으로 일처리가 되었다고 들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얼마 후에 그만뒀다.

그녀는 갈 데가 많은 정신보건사회복지사였으므로.

그리고 kms만 남았다.

법인의 감사가 이뤄지면서 kms가 남편을 찾아와서 그랬다고 한다.

저는 신부님을 우리 교회 목사님보다 더 믿고 의지했어요.

사실은 그 얘기를 전해들으면서

성격이라고만 생각했던 그녀의 무표정이

사실은 나에 대한 적개심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매개가 되어서 이상하게 꼬여서 이룬 성과는

어쨌거나 조직정비는 이뤄졌다는 거다.

내가 남편에게 화난 이유는 남편이 나를 믿지 않았다는 거다.

내가 가끔 교육을 하러 가서 보는 풍경들

장애인 당사자들은 작업실에서 일을 하다가 나와 교육을 하고

교육 중간에 비품이 필요해서 나와보면

인터넷 쇼핑을 하거나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던 그녀들

집에 돌아와서 내가 본 풍경을 얘기하면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뭘 봤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직원들, 박봉에 격무에 시달려.

매일 야근을 해야할 만큼 일이 많아."

 

최근 남편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 중에

회계 문제 때문에 오해를 당하는 걸 지켜보면서

약간 고소했다.

봐,그러니까 내 말을 들으라고 했잖아.

새로 오신 회계 선생님 덕분에 그 전 회계가 얼마나 일을 엉망으로 했는지

누락본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서 남편은 아주 구체적으로 전해들었을 테니까.

그리고 모든 것을 잃고 나니까 이번에도 역시나 내 말을 듣는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을 한다.

착하고 순진한 신부님이 세상일에 대해서 뭘 알겠냐고.

나한테는 이런 궁금증이 있다.

그렇게 좋은 사람으로 패싱되고 싶을까.

우리는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꿈, 내가 이루고 싶은 일들, 그것을 향해서 사는 거 아닌가.

나는 무능이 싫고 게으름이 싫고 책임회피가 싫고 도둑질이 싫다.

불평등이 싫고 거드름이 싫고 권위주의가 싫다.

그런데 남편한테 가장 중요한 건 뭘까...좋은 사람이라는 이름표인가.

 

그녀들이 내부고발을 하러 갔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걱정했다.

혹시나 성폭력같은 걸로 남편을 걸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나는 남편을 믿지만

그리고 모든 것이 남편의 호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남편은 그녀를 위해 온갖 편의를 봐주었고

갈 곳이 없는 그녀를 위해 덕포리에 집도 구해주었다.

남편 혼자 구해준 것은 아니지만

계약서를 쓸 때 남편이 옆에 있어줬다.

나는 그 마음을 믿는다.

척박한 시골동네에서 혼자사는 여자에게 동네 사람들이 함부로 대할까봐

든든한 뒷배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남편 회사에서 계약서를 쓰게 했고

옆에 같이 있어줬다고 한다.

 

내부고발을 위해 서울 법인 사무실에 그녀들이 면담을 하는 동안

그리고 그 소식을 듣고 남편도 서울로 가는 동안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는가에 대해서 궁금해하며 기다리고 있는 동안

남편은 서울에 도착했는데 그녀들의 면담이 길어진다는 얘기를 듣는 동안

내가 걱정했던 게 혹시라도 성폭력같은 걸로 걸리는 게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출근 시간을 늦춰주고 퇴근시간을 당겨주고

중간중간 특혜도 봐주고

집을 얻는 데에 보증도 서주고...

그것은 남편의 좋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혹시라도 나쁜 마음을 먹고

그런 특혜들의 이유는 사실 따로 있다, 라고 말할까봐.

그래서 오명을 뒤집어쓸까봐 걱정했다.

그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발효하는 언니네 집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 집 맞은 편이 kms의 집이라는 것을 발효언니가 알려주었다.

kms는 가장 힘든 시기에 그냥 안나와버렸다.

2018년 교육을 위해 기획안 신청을 했고

두 개의 지원을 받아서

내 이름으로 된 두 개의 통장과 두 개의 카드를 발급받아서

kms에게 전해주었는데

(교육은 우리가, 행정은 남편네가 하기로 했으니까)

갑자기 그만 둬버려서 사무실 동료들은 강사료도 못 받고 일을 했다.

그리고 결국 11월이 되어서야 회계처리를 내가 해야 했다.

그냥 만들기만한 계정,

전해준 메모가 어디있는지 몰라서

아이디와 비번을 물어보느라 전화를 했지만 전화는 받지 않았고

가장 무책임한 방식으로

나에게 가장 고통을 주는 방식으로

kms는 그렇게 우리에게 복수하고 떠났다.

 

연민은 나를 움직이는 가장 큰 동력이다.

아마 나는 연민 때문에 망할 것이다.

만취한 남편이 엄마, 엄마, 엄마 하면서 잠꼬대를 할 때면

엄마없이 험한 세상을 살아왔을 남편에 대한 연민에 마음이 아프다.

그 연민을 어쩌지 못한 채

나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20대의 나는 반복되는 패턴에 상처받았다.

열렬한 구애와 그래서 시작된 연애와 멀티플레이, 그리고 결별.

사람과 사랑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접었을 때 남편을 만났다.

기대없이 결혼했고 결혼하자마자 임신을 했고 그렇게 숙제처럼

제시되는 미션들을 한 개씩 클리어하며 지금까지 살고 있다.

나의 인생게임은 정교하게 디자인된 듯 하다.

그러니까 연애 미션을 포기한 댓가로

배신없는 사랑을 선택한 댓가로

그러니까 사제이니 최소한 그런 식의 멀티플레이는 없겠지라는 믿음때문에

이 관계를 선택했는데

그 이유때문에 바꾼 이 스테이지가 너무 어려워.

 

이 관계에서 반복되는 패턴은

나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거.

그리고 모든 것을 잃은 후에야 그 때서야

나의 말에 귀기울이고

위기 때 가장 관계가 좋다는 거다.

나의 인생게임은

너무 고난이도다.

가끔은 이 관계를 포기하고나면

내 삶이 지금보다는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직은 더 여지가 있다.

20대의 나는 늘 타인을 탈출의 수단으로 삼았다.

북경에서 맞았던 29살의 크리스마스가 내가 솔로로 맞았던 유일한 시간이었다.

나는 쉴새없이 연애를 했다. 그렇다고 그것이 나의 의지는 아니었다.

그냥 수동적으로 흐름에 나를 맡기다보면 그렇게 되어있었다.

페미니스트 벨훅스가 말한다.

"홀로 존재하는 법을 아는 것은 사랑의 기술의 핵심이다.

홀로 있을 수 있을 때

타인을 탈출의 수단으로 삼지 않고

그들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이다."

 

타인을 탈출의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는 말을 기억해야했다.

다른 이들을 수단삼지 않고

고독을 수련해야했다.

29살에 나는 북경에서 고독을 수련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30살의 9월에 결혼을 했다.

9개월은 고독을 수련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던 것같다.

고독을 수련하지 않은 댓가로

나는 지금 너무 어려운 스테이지에서 고전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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