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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

나는 술자리를 좋아한다.

처음 술을 먹었던 19살 시절부터 내내 나는

알콜 때문에 벽이 허물어지거나 섬세해지는 그 순간들을 즐겨왔다.

다시 말하면 알콜없이도 누릴 수 있다면 그런 시공간을 좋아한다.

 

오늘 교육이 끝나고 누군가 물었다. "오늘 일찍 가야해요?"

나는 웃으면서 "일찍 가야해서 빨리 뒷풀이 가려고 서두르는 중이예요"

그런데 나중에사 오늘 농성이 있고 거기 같이 가고 싶어서 물었다는 걸 알았다.

나도 알았다면 가고 싶었을텐데...

정확하게 말해주었다면 나는 여의도로 갔을텐데...

 

사람들한테 나는 어떻게 보이는 걸까?

술 좋아하는 사람.

뒷풀이에 목매는 사람. 그런 건가?

내가 뒷풀이에 꼭 가려고 하는 건 가서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교육시간 중에는 절대 안나오는 이야기들. 그런 것들.

나는 다음 주에도 꼭 뒷풀이에 갈 것이다.

 

그런데....나를 오해하지는 말아주세요. ㅜ.ㅜ

 

오늘의 옮겨적기

 

글쓰기가 주는 기쁨 가운데 가장 강렬한 것이 뭔지 아세요?

누군가 내게 "당신은 바로 내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또는

"이 책은 바로 나예요."라고 말할 때랍니다.

 

"나는 세상 모든 사람들처럼 한 가지 독특한 방법으로 사물을 경험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보편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싶다."......

브레히트의 문장이 생각나는군요.

"그는 타인들 속에서 생각하고, 타인들은 그 속에서 생각하곤 했다."

 

때때로 난 삶과 글쓰기라는 두 차원을 동시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다시 한 번 말하건대, 당신이 떠올린 "나는 내 사랑 이야기를 '쓰고' 내 책들을 '살고' 있다."

라는 문장에서 내가 말하고자 한 것은, 내 책과 내 책들 사이의 접근과 교환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투쟁입니다.

그러한 상호작용은 내 삶 속에서 그리고 내 책들 속에서, 사랑과 성과 글쓰기 그리고 죽음 사이에서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니 에르노 <칼같은 글쓰기>

 

책이 나온 뒤에는 다시는 책에 대해서 말도 꺼낼 수 없고 타인의 시선이 견딜 수 없게 되는 그런 책,

나는 항상 그런 책을 쓰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열두 살에 느꼈던 부끄러움의 발치에라도 따라갈 수 있으려면 어떤 책을 써야 할까?

          -아니 에르노 <부끄러움>

 

내가 했던 생각들을 이렇게 책 속 활자가 정확하게 표현해줄 때

나는 짜릿함과 함께 질투를 느낀다.

역시나.....세상에는 깨달음의 눈송이들이 평등하게 내리고 있고

깨어있는 소수만이 그것을 받아안아 형상화한다.

나는 그게 정말 샘이 난다고.

 

정말 그걸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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