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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outube.com/watch?v=pqWevyXEvoQ&feature=player_embedded
태쌤을 따라다니니 이렇게 감미롭게 아침을 시작할 수도 있다.
종강을 했고 이젠 작업에 몰두할 일만 남았다.
어제 아이들은 축구를 보았다.
티비를 없앴고 축구는 절대 안보고 살았지만
어린이집에서 하돌과 앵두는 응원연습을 하고 얼굴에 축구그림을 붙여왔다.
생각해보면 축구가 죄는 아니지.
인터넷으로 축구를 보게 해주고 나는 한강의 신작을 읽었다.
남한이 한 골을 넣자 하늘이 너무 좋아하며 알려주었다.
조국이나 민족에 대한 호감은 본능적인 걸까?
지난 토요일에도 하돌은 축구보는 게 숙제라해서 혼자 남편의 핸드폰으로 축구를 보고
다른 식구들은 <아주르 아스마르>를 보았다.
몇번이나 본 하늘은 우리하고 꼭 그걸 같이 보고 싶어했다.
하늘 덕분에 좋은 영화를 보았다.
어제 밤 켜놓은 라디오에서는 월드컵 노래가 연이어 나왔다.
축구가 죄는 아니지...
......
그냥 그렇다고.
축구가 끝난 후 아이들은 잠자리에 들고 나는 읽던 책을 마저 읽었다.
새드엔딩의 힘은 어떤 것인가?
해피엔딩을 좋아하지만 <검은 사슴>도, <바람이 분다, 가라>도 완전한 비극은 아니니...
겨자씨만큼이라도 희망을 찾을 수 있게 해준 데 대해 감사할 따름.
<검은 사슴>을 다시 읽고 싶다...
그 책을 빌려갔던 그애는 이민을 간 걸까?
자취를 찾아볼 수가 없다. 내 미안함을 그 책으로 바꿔도 될까?
잘 가라 <검은 사슴>. 열에 들뜬 내 청춘의 해열제. 고마운 인영을 기억하며.
<바람이 분다, 가라>도 오래 갈 것같다. 잠을 잘 수가 없다.
난 말이지, 정희야,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어......나를 사랑한다는 그 어떤 남자의 말은,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말일 수도 있고, 나를 오해하고 있다는 말일 수도 있고, 내가 그를 위해 많은 걸 버려주길 바란다는 말일 수도 있지. 단순히 나를 소유하고 싶거나, 심지어 나를 자기 몸에 맞게 구부려서, 그 변형된 형태를 갖고 싶다는 뜻일 수도 있고, 자신의 무서운 공허나 외로움을 틀어막아 달라는 말일 수도 있어.....그러니까,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내가 처음 느끼는 감정은 공포야.
삶이 제공하는 당근과 채찍에 철저히 회유되고 협박당한 사람의 얼굴로 어머니는 작은 방에서 늙어가고 있었다. 따뜻한 아랫목에서 어머니의 살비늘 냄새를 맡고 있으면, 그녀에게 삶이 폭력이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녀는 어떤 희망에 그토록 교묘하게 회유당했을까. 가정의 평화, 아들들의 출세, 딸의 행복한 결혼, 오순도순한 노부부의 말년, 종내에는 무릎을 무너뜨려 계단조차 오르내릴 수 없게 만든 삶을 그녀는 한번도 원망하지 않았다.
큰길까지 걸어 내려가면 상점들은 모두 셔터가 내려져 있어. 차가 다니지 않는 도로 한가운데를 걷고 또 걸어. 다리가 아파지면 밤고양이처럼 중앙선에 웅크리고 앉아서 힘이 돌아 오길 기다려. 죽음 따위 무섭지 않아. 강도나 치한 같은 것, 겁 안나.....그렇게 걷다 보면 갑자기 깨닫게 돼. 정말 두려운 사실을....어디도 더 갈 데가 없다는 걸....
생명이 꺼지면 영혼은 고통 없는 곳으로 간다는 말을 당신은 믿습니까 그 믿음에 의지해 때로 사람들은 피 흘리는 동료, 신음하는 개를 앞당겨 죽입니다. 하지만 사실일까요. 전장에서, 동물병원에서 그들의 고통을 사라지게 할 때, 정말 사라지는 것은 그들을 지켜보던 우리의 고통 아닐까요.
나는 믿지 않습니다. 어떤 것도 찾아지지 않고, 어떤 것도 완성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언어를, 눈물을, 피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왜 술을 마시느냐고 나한테 물었지? 갑자기 그녀는 나를 향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불안 때문이야....불안을 알아? 진짜 불안이 뭔지 알아? 돈. 빌어먹을 추위. 가망 없는 그 애의 병. 내가 인간이라는 거. 이 모든 걸, 빌어먹을 누구와도 나눠서 짐 질 수 없다는 거.
부산하고 살풍경한 변두리 번화가가 눈앞에 펼쳐진다.
만일 그가 아프지 않았다면, 하고 상상하면 혼란스러웠다. 아픈 그를 지워버린 뒤에 남는 그의 정수, 그 위로 겹겹이 쌓였을 또 다른 그의 모습들은 내가 알던 그와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달랐을까.
어떤 관계는 고인 물처럼 시간과 함께 썩어간다는 것을, 거기 몸을 담근 사람까지 서서히 썩어가게 한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소유와 의존, 집착과 연민, 쾌락과 무감각과 환멸, 한줌의 간절한 진실이 한무더기의 뱀들처럼 서로의 꼬리를 물고 얽히는 동안, 땅 밑에서 하나씩 뿌리가 문드러져 가는 나무처럼 어깨가 굽고 목소리가 잦아들어 가리라는 것을 몰랐다.
이 년 가까이 스테로이드 제제로 치료를 받았지. 부작용으로 온몸이 백 킬로그램 가까이 부풀어 올랐어. 견디기 어려웠어. 그렇게 육중한 몸으로, 조그만 상처도 내지 않으려고 절절매면서, 어린 누나가 안간힘을 다해 벌어오는 돈으로 생명을 부지하고 있다는 게. 그러던 어느날 밤 꿈을 꿨어. 꿈에 보니 난 이미 죽어 있더구나. 얼마나 홀가분 했는지 몰라. 햇볕을 받으면서 겅중겅중 개울가를 뛰어갔지. 시냇물을 들여다봤더니 바닥이 투명하게 보일 만큼 맑은데, 돌들이 보였어. 눈동자처럼 말갛게 씻긴.....동그란 조약돌들이었어. 그중에서 파란 빛이 도는 돌을 주우려고 손을 뻗었지. 그때 갑자기 안 거야. 그걸 주우려면 살아야 한다는 걸.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걸......그게 무서워서, 꿈속에서 나는 조금 울었던 것 같아...
무한히 번진 먹 같은 어둠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삼촌은 말했지.
생명이란 가냘픈 틈으로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지만,
언젠가 우리한테서 생명이 꺼지면 틈이 닫히고,
흔적 없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게 될거라고.
그러니까, 생명이 우리한테 있었던 게 예외적인 일, 드문 기적이었던거지.
그 기적에 나는 때로 칼집을 낸 거지. 그때마다 피가 고였지. 흘러내렸지.
하지만 알 것 같아.
내가 어리석어서가 아니었다는 걸.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는 걸.
.....지금 내가, 그 얼음 덮인 산을 피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출처] 바람이 분다, 가라.....한강 장편소설|작성자 허당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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