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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커밍아웃

서른을 앞두고 교회로 돌아갔다.

가끔씩 "하느님 뜻이야"라는 말을 하면

나이 어린 사무실 선배는 소름끼친다고 싫어했다.

20대의 10년을 함께 보낸 사람들은 90% 이상이 무신론자였고

기독교인들을 혐오하던 사람들이었다.

새로워진 나는 지인들 앞에서 함부로 나의 신앙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

김두식선생님과의 대화가 담겼던 <복음과 상황>의 기사가 인연이 되어서

IVF로부터 청탁을 받았다.

그런 인연이 아니었다면 과연 내가 이런 글을 쓸 수가 있었을까.

결국 글은 기획의도와 어긋나서 반려되어왔다.

 

타인의 요청이 아니라 내 계획 속에서

언젠가 시간이 되면

다시 촘촘히 내 시간들을 돌이켜보리라.

 

주께서 저를 부르시어 제가 이 곳에 있나이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자신의 선 자리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같다. 조용한 사춘기를 보냈던 나에게 그 비틀거림은 20대에 왔다. 고등학생 때의 난, 학교와 교회만 왔다갔다 하던 조용한 학생이었다. 아침 7시에 도시락과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서 밤 11시에 별을 보며 집에 들어섰던 빡빡한 생활 중에 교회는 유일한 휴식처였다. 만남과 교류가 있는 학생부를 피해 대예배를 드리긴 했지만 그 시간을 거치고 나면 탁해진 영혼이 조금은 맑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었다. 대학에 들어간 후 교회는 내 생활에서 멀어졌다.
 

1989년의 대학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합격증을 받던 그 날에도 민주광장에서는 재단비리에 항의하는 집회가 열렸다. 그리고 입학과 동시에 '학원 민주화'를 위한 수업거부가 이뤄졌고 이에 맞서 학교 측은 휴업을 선포하였다. 수업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교수님들보다는 선배들로부터 더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교회 선배는 내게 “선배들을 조심하라” 했다. 너무 꽉 막힌 고교시절을 보낸 덕분에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좌편향으로 변해가는 후배들을 한 두 번 본 게 아니라면서 선배는 몇 번이고 내게 대학선배들을 멀리 하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난 대학보다는 교회로부터 멀어졌다.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기억할 수 없는 시기부터 교회를 다녔던 내게 신앙은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양한 종교동아리를 찾아다니며 내 신앙의 혼란을 다잡으려 했지만 결국 나는 교회로부터 멀어졌다.

만남, 그리고 다큐멘터리
고교시절에 가장 비통했던 순간을 꼽으라고 한다면 교회 수련회이다. 고2 겨울 수련회는 기도원에서 진행되었다. 오래 전 일이라 자세한 정황은 기억나지 않지만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난 ‘내 죄가 너무 깊은가 봐’ 하며 몰래 울었다. 나와 내 친구만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그 때의 난 항상 주님 앞에서 주눅든 채 살았던 것같다. 말씀에 대한 궁금증으로 질문을 하면 전도사님은 “인간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말라”는 조언을 하곤 했었다. 예민한 나에게 그 말씀은 조언이 아닌 책망으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스무 살부터 서른 살까지 교회를 떠나있었다. 그 10년은 그런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10년은 내 인생의 바닥이기도 했다. 세상은 짐작과는 다른 일로 가득 차 있었고 친구들은 자기 자리를 찾아 잘도 떠나갔다. 세상이 나 혼자만을 남겨두고 성큼 나아가는 것 같은 조급함과 사람들 사이에서 얻은 상처들 때문에 내 삶은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깜깜했다. 누구를 만나도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던 우울한 시간들.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날까?’라는 원망을 자주 했었던. 그 원망의 시기에 내 영화의 주인공들인 지적 장애인들을 만났다. 처음부터 그 분들을 주인공으로 영화를 찍을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다. 비가 새는 장애인센터를 좀더 편안한 곳으로 옮기기 위해 후원의 밤 행사를 치러야했고 그 행사에 쓸 영상물이 필요했다. 내가 일하는 푸른영상으로 영상물 제작 의뢰가 들어왔고 회의를 거쳐 내가 그 일을 맡게 된 것이다.
 

긴 시간이 흐른 지금도 나는 그 분들과의 첫 만남을 기억한다. 생전 처음 보는 그분들은 생전 처음 보는 나를 반갑고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밥 먹었냐?”는 일상적인 안부 한 마디에도 나는 눈물이 났다. 스스럼없이 내보이는 그 분들의 마음을 받으며 난, 그 곳에서 행복했다. 그 분들은 내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고 그 속에서 난 평안을 얻었다. 그 분들은 녹슨 면도칼이 몇 번이나 지나간 내 삶의 동맥을, 치유되지도 끊어내지도 못하는 남루한 내 삶을 어루만져주었다, 아무 말 없이. 넘어진 날 일으켜주는 누군가가 너무 고마워 친구들이나 엄마에게 그 고마운 사람의 얘기를 하듯 그런 속삭이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게 내 영화 인생의 시작이었다. 실수를 연발하며 그 분들을 알아가는 동안 나는 내 손에 카메라가 있다는 게 고마웠다. 평범한 내가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런데 그런 나의 손에 카메라가 있다는 것. 그 때 나는 감히 소명이라는 단어까지 떠올렸다.
 

10년의 공백을 메우려는 듯 그 시기엔 하루하루가 은혜였다. 그 분들이 부르는 찬송가 한 자락에도 눈물이 솟았고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루 동안 받은 선물들을 헤아리다 보면 마음이 터질 듯 벅차올랐다. 모든 시간이 주님의 것이었다. 한창 촬영이 진행되던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왼손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써야할 엄지와 검지가 움직일 때마다 찢어지는 듯 아팠다. 나는 그 때 생각했다.
‘주님께서 좀더 진실된 영화를 찍으라고 내 몸에 시련을 주시는구나’
장애인센터의 전도사님에게 그 말을 했더니 한참을 웃으시다 말씀하셨다.
“우리 주님은 그렇게 쪼잔하시진 않아요.”
 

나중에 병원에서는 내가 특정한 동작을 너무 오랫동안 반복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주었다. 선명한 화면을 얻기 위해 초점을 맞추느라 엄지와 검지에 항상 힘을 주고 있어서 생겼던 일이었을 뿐이다. 그 때의 나는 매 순간을,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주님의 선물이라고 느끼며 살았다.

주께서 저를 부르시어
나는 지금 네 번째 영화를 만들고 있다. 오랜 촬영기간이 지난 후 산더미처럼 쌓인 테이프들을 살피다보면 좌절과 기쁨이 교차한다. 당시에 느꼈던 마음이 그대로 들어가있는 화면을 보면 기쁘지만, 너무 밋밋하게 찍혀 있어서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이라면 전혀 느낄 수 없는 화면들을 보면 실망스럽다. 다큐멘터리 감독들마다 촬영스타일이 다르겠지만 나는 좀 많이 찍는 편이다. 내공이 깊은 감독이라면 현장에서 정확한 취사선택이 가능하겠지만 우유부단한 나는 가능한한 모든 시간을 기록하는 편이다. 그리고 그렇게 찍힌 화면들을 재구성한다. 그래서 촬영보다 편집에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하다. 신기한 건 촬영 당시엔 몰랐던 것들을 나중에 찍힌 화면들을 보면서 발견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촬영 테이프들을 꼼꼼히 검색한 후 오케이 컷들을 모아서 이야기들을 짜다 보면 항상 배운다. 열심히 공부하고 사전인터뷰들을 통해서 이야기의 얼개를 그렸다고는 하지만 현실은 항상 머리 속 생각보다 한 걸음 나아가 있다. 그래서 항상 생각한다. 한 편의 영화를 만들고 나면 나라는 사람이 한 뼘 정도는 자란 것같다고. 이렇게 열심히 다큐멘터리를 찍다보면 내가 좀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같다고.    
 

다큐멘터리가 좋은 이유는 셀 수도 없이 많지만 가장 좋은 한 가지를 꼽는다면 누군가의 자리를 이해하기 위해 온 마음을 기울일 수 있다는 점이다. 카메라를 들고 나의 주인공을 따라갈 때면 그 사람을 둘러싼 모든 것들, 그 사람의 말 한 마디, 그 사람의 표정 하나도 허투루 지나칠 수 없게 된다. 사람 만이 아니다. 뷰파인더에 비치는 모든 것들. 그리고 거기에 담긴 시간들. 그저 무심히 흘려보냈을지도 모를 그 시간들을 담기 위해 나는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조용한 편집실에 앉아 화면들을 붙여가다보면 완성된 그림은 항상 내게 더 큰 세상을 보여준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다. 그동안 내가 만든 세 편의 영화들은 모두 실패했다. 기획의도는 촬영 중간에 깨져 버리고 뒤죽박죽인 이야기 조각들을 붙든 채 망연자실한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실패가 반복되자 나는 실패 다음에 무엇이 올지를 기대하게 되었다. 자, 이번 영화에서는 무엇이 깨질 것인가. 그리고 그 실패 다음엔 어떤 새로운 것들이 내 영화를 채워줄 것인가. 생각지도 못한 상황들을 맞닥뜨릴 때, 또는 내가 생각하는 것들보다 훨씬 더 적절한 사건들이 내 카메라에 담길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생각한다.
‘주님께서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지금은 남편이 된 그 전도사님은 또다시 “우리 주님은 그렇게 쪼잔하진 않아요”라고 웃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깨달음이 너무나 좋다. 내가 기쁠 때에도, 내가 힘들 때에도, 내가 실패 안에서 좌절할 때에도 나는 그 모든 시간이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가끔 교회를 떠나있었던 20대의 10년을 떠올린다. 그 때, 그 막막함 가운데에 있을 때, 지금처럼 주님을 생각했다면 나는 조금 덜 힘들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있다.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것으로만 끝내지 않고 그 시간에 깃든 주님의 뜻을 좀더 헤아렸다면 그 시간이 그렇게원망스럽지는 않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많다. 하지만 나는 곧 애써 마음을 돌린다. 그 때의 시간이 있어서 지금의 내가 있는 거라고. 생각해보면 20대의 나는 지나치게 말이 많았고 지나치게 속단했고…… 그리고 교만했다. 20대 초반, 세상에 거침이 없었던 나는 망설이고 힘든 과정에 있는 친구들을 답답해하고 책망했었다.
“너 지금 고민을 즐기는 거 아니니? 답이 뻔히 나와 있는데 왜 자꾸 그래?”
20대 후반이 되어 정작 내가 비슷한 상황에 처하자 나는 그 때의 내 말들이 친구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는지를 뒤늦게 깨달았다. ‘현명한 사람은 역사에서 배우고, 보통 사람은 경험에서 배운다’는 말처럼 보통 사람인 나는 내가 그 자리에 서는 것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요즘 아이 때문에 중단되었던 네 번째 영화 작업을 다시 시작하고 있다. 5년을 끌고 있는 이 작업은 내게 고통이면서도 기쁨이다. 나의 모든 시간은 주님의 것이라 믿는다. 기한을 넘긴 영화를 만드느라 시간에 쫓기면서도, 예상치 못한 일들이 자꾸 내 일상을 흐트러뜨려도, 내내 이 한마디를 읊조리며 일상의 기도를 드린다.   
“주께서 저를 부르시어 제가 이 곳에 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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