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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고리

다음 주 금요일을 가편집 시사회로 잡고 쉬지 않고 편집중이다.

목요일부터 아이들을 강화로 보내고 나는 사무실에서 자고 먹고 한다.

집이 멀진 않지만 우리 집은 좀 무서워서.

조연출이 그렇게 하면 컨디션이 많이 나빠질 거라 하던데

단지 이틀을 잤을 뿐인데 오늘 아침에는 목이 아파서 잠을 깼다.

보통 새벽 2시 정도까지가 하루 작업의 마감선인 것같다.

그 정도가 되면 신체적으로 무리가 온다.

택시비도 그렇고 해서 사무실 숙식을 선택했던 건데 다시 고려해야할 듯.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다.

하지만 곧 마음을 잡는 건 지금이 유일한 기회라는 사실.

그리운 아이들과 마음 편하게 지내기 위해서라도 지금 이래야만 한다.

식구들이 모두 떠나서 텅 빈 집처럼 나도 외롭다.

하지만 뭐 원래 이 작업이야 외로움이 핵심이니까.

아무도 없는 사무실(사실은 바깥 칸에 항상 한 분이 계시지만)

깊은 밤 정적 속에서 이야기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맞춰가다보면

나는 극도로 예민해진다. 그 예민한 틈으로 이물질이 끼어들면 상황은 다시 원점.

노다메처럼 천재는 아니지만

노다메가 버스 안에서 악보를 보다가 전화벨 소리를 듣고

나중에 연주회장에서 연주 중간에 전화벨 멜로디를 연주했던 것처럼

뭐 그런 비슷한 느낌.

 

가끔 쌓여있는 쓰레기라든지 상한 음식들 때문에 짜증이 난다.

보통 때라면 치워주면 그만이지만 내내 앉아있다가 잠깐 화장실가는 길에 그런 것들을 보게 되면

고질적인 의문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든다.

왜 다들 주인의식을 갖지 않는 거지?와 같은.

하지만 감정을 표출했을 때엔 뒷감당이 더 커서 그냥 참는다.

화요일, 조연출한테 한 번 화를 내고 났더니 화낼 일 투성이다.

그러니까....문제는 상황이 아니라 나인 거다.

조연출은 아마도 나한테 가장 약한 고리였었나?

참아주어서 고맙. 다시 화면만 보며 묵묵히 간다.

 

집중의 결과가 객관화인 듯.

영화가 재미가 없다. 누가 내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까?

유심히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의미가 전달되지 않을텐데 누가 그렇게 집중해서 볼까?

어제까지는 '어쩌면 이런 좋은 화면들이...'하며 신나게 편집하다가

어제 저녁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 커트들을 쳐나가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작업창을 닫았다.

일단 끝을 다 내고 나중에 나중에 내 호흡으로 한 번 보면서 다시 손을 보자고 다짐하며.

 

편집구성안을 꼼꼼하게 짰다 하더라도 조연출이 편집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원래는 동시에 같이 편집에 들어가고 밤마다 함께 볼 계획이었지만

편집은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거다.

커트의 선택, 길이의 조절, 커트들의 배치, 그런 세세한 선택을 나 대신 누가 한단 말인가?

하지만 바보처럼 나는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을 한 거다.

 

영화의 제목은 <아이들>이다.

<반짝반짝 빛나는>이라는 이름을 짓고 잠깐 좋아했으나

검색을 해보니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이름이었다. 그것도 유명한. 

배급사 이피디님이 "검색어 첫번째에 떠야해!"라며 강력하게 말렸다.

<아이들>은 사무실 ㅇㅈ감독님의 실습작 이름이다.

아직 이 영화는 진행중이고 내 영화보다 1년쯤 뒤에 나올 예정이다.

내 영화가 <아이들1>이 되고 ㅇㅈ감독님 영화가 <아이들2>가 될 것이다.

감독님은 제목이 너무 약하다고 말렸으나 문대표님은 찬성. 지금은 이것이 최선.

 

조연출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엔딩'을 주문하고 매일 들여다본다.

정신이 흐트러지거나 안붙는 그림 때문에 실망스럽거나 피곤할 때

조연출이 만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엔딩'을 본다.

나에게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울 수 있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엔딩'은

앵두의 어린이집 적응기이다.

수요일에 사무실에 들른 남편에게 살짝 보여주었더니 눈물가득 고인 눈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세상의 많은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의 첫 한 달을 어떻게 보내는지 전부를 보여줄 수는 없지만

세상이 끝난 것같은 절망으로 우는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따뜻하게 감싸는 보육노동자들의 손을 보여주고 싶었다.

 

매일 엔딩을 보며 매일 생각한다.

빨리 이 엔딩에 도착하자.

이 엔딩에 도착할 때까지 아이들이 보고 싶고 바깥 공기를 쐬고 싶더라도

자리를 떠나지 말고 견디는 거다.

더디게 지루하게 혼란스럽게 진행되는 편집이지만 저 엔딩을 만날 수 있는 날까지.

내 영화를 본 이들이 보육노동의 소중함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시간이 갈수록 욕심이 없어지는 게 고맙다.

 

이 영화는 나의 10년을 정리하는 거고 5년만의 신작이다.

이런 말을 할 때의 나는 부담으로 어깨에 힘이 들어간 상태일 것이다.

나 아직 떠나지 않았다고, 나 여전히 이렇게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증명하고 싶은 거다.

지난 5년동안 아기를 업고, 혹은 아기를 맡기고 동료들의 신작을 보고 돌아오는 길엔

항상 뿌듯함과 스산함이 교차했다.

너희들은 그렇게 차곡차곡 돌탑을 쌓고 또 차곡차곡 너의 길을 가는데 나는....

다시 돌아갈 수나 있을까?

그런 생각에 스산해지곤 했던 마음들을 지우고 싶었다.

 

하지만 일단 영화를 완성했으면 좋겠다는 나루의 조언처럼

이 무거움을 빨리 떨쳤으면 좋겠다는 문대표의 걱정처럼

나는 이제 한가지만 생각한다. 

부산영화제에 상영되고 나면 아무도 불러주지 않을 영화가 될지도 모르지만

괜찮아. 이렇게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니까.

내가 스스로에게 '그래 최선을 다했어'라고 할 정도라면 어떤 결과라도 그건 나인 거니까.

약속한 일에 대한 결과보다는 그 과정을 소중히 여기고 싶다.

그것이 또한 다큐멘터리의 좋은 점이잖아.

 

모든 작업은 항상 "내가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아픔과 고독.

내가 이길 수 있는 만큼의 시련. 그리고 내가 참을 수  있을 만큼의 눈물.

그것보다 더 큰 선물은 앞으로도 내가 계속 그럴 수 있다는 믿음"의 산물이다.

소리가 들어가지 않은 졸업식 장면 앞에서 또다시 가슴이 미어졌지만

이젠 예전처럼 일주일을 우는 게 아니라 이 장면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이렇게 나는 나의 시간을 채워가는 거고 이렇게 과정에서의 노력과 발견을 기억하려고 한다.

 

<아이들>

내 아이들. 그리고 내 안의 아이.

너를 빨리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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