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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3

1. 오늘의 메시지

살아있는 한 피할 수 없는 정신적 상처를 입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검 3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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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체

글쓰는 일이 예전만큼 편안하지가 않다.

이번 작업을 하면서 '담담한 글쓰기'에 대해서 오랫동안 고민? 연구? 같은 걸 하다보니

그동안의 나의 글들이 간지럽게 다가왔다.

블로그에 자주 오던 학교 선배가 "네 글은 너무 어두워"라고 말을 해서 발끈한 적이 있었는데

선배가 하고 싶었던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새삼 알아가는 중.

 

작업기간 중에 문체를 연구하려고 <완득이>, <발이 닿지 않는 아이>, <캔들 플라워>를 봤다.

'문체'라고 하니 왠지 기술적인 냄새가 나는데 '태도'라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발이 닿지 않는 아이>는 해설을 쓰면서 몇 번이고 펼쳐보곤 했었다.

그렇다고 내가 해설을 그렇게 썼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닮고 싶었다는 정도.

신형철은 말한다.

 

그러나 마음을 아프게는 하되 신파로 칭얼대는 법은 없다. 이를테면

이런 '고통의 철학'앞에서는 잠시 말문이 막힌다. "지금 내게 있는 여러 가지 고통들이 때로는 고맙다.

내가 후회로 서서히 죽어가지 않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나는 현재의 고통만으로도 숨이 벅차서

과거 일로까지 고통받을 시간이 도무지 없다."(63쪽)이것이 이 소설의 톤(tone)이다.

 

나는 신파가 정말 싫지만 내가 쿨하거나 나이브하기보다는

신파에 가까운 인간형이라는 걸 잘 안다.

그래서 신파를 싫어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캔들 플라워>는 뭔가... 좀.... 이물스러웠다.

읽다가 중간에 그만 뒀다.

한마디로 발이 땅에 닿지 않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IMF 때문에 중산층에서 추락한 희연이라는 인물이 코코펭...어쩌고 하면서 주문을 외우는 것도

멋지게 차려입고 공항에 가서 앉아있는 것도 유치하게 다가올 뿐.

신파라고 하기에는 멋스러웠지만 어떤 거냐면....

오버스럽다고나 할까.

 

'상처는 나의 힘'이라고 웅변하는 듯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나혼자 상처주의자라고 이름을 붙여두었다.

아마 나도 그런 부류의 인간이었을 것이다.

더 그러고 싶지 않다.

누구나 자기의 그늘은 가장 커보이겠지만

예민한 촉수를 상대방의 말 한마디, 태도 하나에 뻗어놓은 채

니가 내게 상처를 주었다, 는 식으로 살아가는 건 그만 하고 싶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태생적 예민함이 사라지는 건 아닐 것이다.

집안 식구들간의 얘기 속에서도

"하루는 예민하니까...."라는 말이 나오는 걸 들으면

내가 어떻게 행동했었지? 하고 돌아보게 된다.

예민하더라도 예민한 티를 내고 살지는 말아야겠다.

칭얼대며 살지 않겠다.

 

나는 변하고 싶은 것이다.

 

3. 다시 상처에 대하여

살아있는 한 피할 수 없는 정신적 상처를 입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당신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인터넷에 접속하는 일이 드물어 당신이 언제 이 글을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또다른 나일 수도 있는 당신에게 이 글을 보냅니다.

당신의 삶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발화점을 예측할 수 없는 그 예민한 신경을

성격이라고 이해하기에는 우린 나이가 너무 많지 않습니까?

뭐 나 또한 비슷한 인간이라 당신에게 이런 말 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나는 노력은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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