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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

휴일 때문에 휴강이 되어서 묵직한 숙제들이 제시되었다.

이제껏 하루 전, 혹은 이틀 전에 급하게 해치우듯 읽던 책들을

이번에는 찬찬히(!) 한 줄 한 줄 곱씹으며 읽고있다.

 

<엄마를 부탁해>를 읽는 일은 고역이었다.

딱딱한  논문을 읽는 일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왜 이러지? 의아해하며....정말  왜 이럴까 궁금해하며

이 불편한 마음을 꼭 들여다볼 것, 스스로에게 숙제를 내며 견디듯 읽었다.

 

그리고 드디어 아드리엔느 리치의 '더이상 어머니는 없다'를 읽는다.

눈과 마음이 너무 빨리 문장을 따라가서 잠깐 멈춰서 다시 한 번 곱씹다가

다시 또 달려가는 마음을 진정시킨다.

 

저녁을 먹고 고민을 나누기 위해 m을 만나던 날,

합정역 개찰구 앞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한 m이

"공부 방해하는 거 아니야?" 했을 때

나는 "공부가 이렇게 재미있다니..." 하며 웃었다.

밥 대신  술을 먹으며

좀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좀더 젊었더라면

이런 저런 가정들을 늘어놓다가 

지금 이 순간 내가 있어야할 최선의 자리가 어딘가에 대해서 다각도로 모색해보는

정말  몇 년만의 밀도높은 대화를 나눴다.

 

m이 몇 번 물었다.

뭘 원하는 거야? 공부를 하고 싶은 거야, 영화를 만들고  싶은 거야?

-그렇게 묻는다면 영화지.

어떤 문이 열리고 나면 더이상 지금같은 영화를 못 만들 수도 있는데? 그래도 괜찮아?

-그 문을 열어나봤음 좋겠다.

 

같은 학교를 나오고 비슷한 시기에 영화작업을 시작했지만 지금 우리가 열망하는 건 서로 다르다.

"세상을 보는 시선, 생각하는 방식, 이야기의 태도, 그 모든 것을 페미니즘이 해결할 수 있을 것같애.

내가 지금 공부를 통해 갖고 싶은 게  그거야."

m이 빤히 나를 바라보기에 문득 '내 말이 너무 감동적이었나?' 생각하는데

m이 말했다.

"이즘을 너무 많이 믿으면 실망하고 회의할 게 더 늘어나. 그러지  마"

 

추운 도시의 외로웠던 유학시절, 하루에도 12번씩 포기하고 싶었던 마음,

네팔에서 담은 찬란한 촬영본들, '너는 영혼을 담을 줄 아는 아이구나'라는 지도교수의 칭찬

지적인 실험만으로도 좋았다던  최근작, 3분의  1 가까운 관객들이 자리를 떠나버리던  첫 상영

상호작용의 쾌락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그걸 포기할 수도 있구나....

나는 그거 때문에 다큐를 하는 건데.

글이나 극영화나 다른 어떤 것으로 도망가고 싶을 때에도

나의 등장인물과  교감하는 그 순간, 그 순간의 짜릿함.

바르르 떨리는 바늘 끝에 선 듯한 조마조마함과 두근거림을 도저히 놓을 수가 없어서

그래서  윤리를 고민하고 눈물을 고민하고 내 카메라의 무거움을 고민하면서도

절대 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문에 들어서면 그것마저 포기할 수도 있다는  거?

 

하지만 가보지 않고서는 모르지.

실망하고 회의할 게 많다 하더라도

지금 나의 심장을 뛰게 하고

지금 나의 관심이 온통  쏠려있는 그것.

책을 읽다보면 지나온 시간동안 내가 잠깐 멈춰서서 '이건 뭐지?' 했다가

일상에 쫓겨 두고온 문제들이 선명한 언어로  거기 놓여있어.

그 때 알았더라면 내가 선택했을 다른 길들을 책 속에서 보고 있어.

그렇다고 내 시간들을 후회하는  건  아니야.

나는 지금도 여전히 걷고 있으니까.

 

다만....그저....

이런 느낌, 얼마 만인지.

대학 시절의 맑스 레닌주의와

스물 여섯 살에 만난 다큐멘터리와

마흔 한 살의 페미니즘.

 

걷고  걷다 보면 이런  선물들을 만날 수 있다니

그래서  살아간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진창길에 빠져 단 한  걸음도 못 내디뎠던 어떤 시간들도

그래서  다 이해가 된다는.

앞으로도 웅덩이는, 진창길은 여지없이 나를 괴롭히겠지만

괜찮아. 어쨌든 나는 걷고 있잖아.

그거면  되는 거야.

 

걷기 위해 짐을 더 가볍게 해야해서

결국 의뢰받은 교육을 거절했다.

교육을 통해 내가 개척할 영역은 충분히 매력적이었으나

지난 몇 년간의 나의 사람들과, 경험들과, 성과들을 바탕으로

일정 시간 몰두한다면 교육역량과 내용이 한 단계  점프할  것임은 분명했으나

결국 인큐베이팅 정도로만 역할을 한정짓고 제안을 돌려보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매번 불안하다.

앞으로도 이런 불안은 몇 번 더 찾아올 것이다.

한 달에  한 번씩 짐을 정리하는 수도자처럼

물론, 수도자가 되기에는 버릴 수 없는 것들이 여전히 너무나 많지만

지금은 걷기 위해 짐을 줄여야할  때.

최종 목표점은 몰라도

지금 내가 어떤 길 위에서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나는 기쁘다.

그거면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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