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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기독교

렌즈를 통해 타인의 삶을 보듬다
 

 


 

작년 가을이었다. <엄마>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난 건. 주인공인 엄마는 한마디로 파격적이었다. 자식들의 요구에 부응하느라 끊임없이 희생하며 마음 아파하는 엄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엄마하면 떠올리는 그런 푸근함과도 약간은 거리가 있었다. 노래하고 춤추는 자신의 끼를 맘껏 발휘하고 남자친구도 사귀는 그런 엄마. 6남매를 두었지만 함께 살길 거부하고 자신의 삶을 누리는 엄마. 자식의 요구도 냉정하게 거절할 줄 아는 엄마가 그 곳에 있었다.

<엄마>를 보면서 우리 엄마를 떠올렸다. 참 비슷했다. 그래서 그 다큐를 찍은 감독의 시각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었다. 나와 비슷한 엄마를 둔 류미례 감독을 꼭 한 번 만나고 싶었다.

요즘은 남매를 돌보느라 외출이 힘들다고 하는 그녀였기에 집으로 찾아갔다. 봉천동 <함께사는세상>은 대한성공회 소속의 장애인센터다. 그녀는 그 곳 5층 사택에 살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곳에서 일하는 성공회 사제를 남편으로 두었기 때문이다. 만나자마자 우리는 마음 잘 맞는 친구모양 수다를 쏟아냈다.

다큐멘터리를 찍다

그녀는 한때 문화예술운동의 성과를 대중화하고 민족통일을 지향하는 예술인들의 단체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에서 발간하는 <민족예술>이라는 월간지 기자로 일했다.
“취재차 갔던 ‘영상운동과 노동운동의 결합’이라는 강의를 통해 영상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어요. 영화와 현실이 접목해가는 과정을 보면서 저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죠.”

 



◇작업의 흔적인 비디오 테잎 앞에 선
아들 한별이와 류미례 씨.

 

1998년 푸른영상에 들어가면서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의 첫발을 내딛는다. 주류언론으로부터 소외받은 인권의 사각지대를 지킨다는 취지가 맘에 들었다. 개인 작업을 하지만 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수익사업을 해야 한다. 그녀의 첫 작품인 <나는 행복하다>도 그 수익사업의 일환이었다. 1999년 10월 대한성공회 봉천동 나눔의집에서 후원행사에서 상영될 영상물을 만들어 달라고 연락해왔던 것이다. 중심이 장애인센터인 그 곳에서 정신지체장애인들을 만났다. 다음 해에는 <나는 행복하다>의 연작시리즈인 <친구>를 찍었다. 이제 막 직업인이 되어가는 이웃들의 두 번째 이야기를. 그녀는 다음 작품 계획 중의 하나도 장애인의 이야기란다. 특별한 이유. 글쎄 그런 이유는 없다. 생활 공간 자체가 그들과 함께이니 특별한 소재가 아니라 그녀의 일상이다. 장애인에 대한 약간의 배려만 있으면 장애인도 충분히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개인으로 생활할 수 있다는 생각을 영상을 통해 드러내고 싶을 뿐이다.

당장 실행을 앞둔 계획 하나는 장애인센터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영상교육이다. 그들이 직접 비디오를 제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표다.

다시 크리스천이 되다

고교시절, 목사님의 승용차가 노후했다는 광고가 주보에 나오면 그 다음 주에 특별헌금 3천만 원이 봉헌되는 그런 교회를 다녔었다. 스무 살 이후 그 교회에는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그리고 종교와도 멀어졌다. 서울생활 5년 간 학교 외에 찾았던 유일한 공간이었는데 그렇게 떠났다. 물론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대학 신입생 때 여러 동아리들을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끝내 정리 하지 못했다. 그렇게 비신자로 10여 년이 흘렀다.

1999년 <나는 행복하다> 촬영차 갔던 봉천동 나눔의집에서 그 곳에 시무하던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수도자였던 남편과의 결혼을 위해서는 세례를 받아야 했다. 속성으로 세례를 받고 결혼했다. 아직 하나님과 만나지 못했는데 뭔가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만 했다.
“제가 예수님과 결별(?)한 지 딱 10년만에 다시 돌아오게 됐어요. 나눔의집 사람들과 남편을 보면서 닮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 전에는 닮고 싶지 않은 크리스천을 보면서 떠날 생각을 했는데. 닮고 싶은 사람들이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 그러면서도 타인에게 열려 있는 그분들을 보면서 저에게도 조금씩 변화가 일어났죠.”

고 2때 갔던 교회수련회의 모습이 떠오른다. 울며 통성기도하던 모습. 모든 이들이 다 방언을 받아 방언으로 기도하는데 류 감독과 친구 한 명만 예외였단다. 그 때는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이 그 방법밖에 없는 줄 알았다. 그렇게 되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힘들었다. 지금은 자신에게 딱 맞는 옷을 입은 느낌이다.

 



◇류 감독을 다시 신앙의 길로
끌어들인(?) 남편과 함께.

 

이 시대의 여성을 되돌아보다

2003년은 류 감독에게 뜻 깊은 한 해였다. 옥랑문화재단과 서울여성영화제가 매년 지원하는 ‘다큐멘터리 옥랑상’ 2회 사전 지원작으로 류미례 감독의 <엄마>가 선정됐다.
“영화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항상 궁금하죠. ‘나는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사람들이 이 이야기에 관심이 있을까’하고 말이죠. 그런데 그런 관심을 미리 가져주니까 힘이 됐어요.”

옥랑상은 기획안만으로 선정해 제작비를 지원한다. 그리고 완성된 영화의 배급 문제도 해결해 준다. 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되기 때문이다.
“독립영화 그러면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한 영환데 독립한 만큼 기댈 곳이 없다는 어려움이 있어요. 가장 안타까운 것은 영화를 만들어도 상영하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지금은 영화제 중심으로 가요. 그나마 상영이 가능하니까. 그래서 독립영화전용관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작년에는 <엄마>의 완성과 함께 둘째의 출산이 겹쳤다. 관객들과의 만남에도 종종 아기를 업고 가야 했다. “지금은 육아에 전념하느라 잠시 쉬고 있지만 내가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이 가장 기뻐요. 앞으로 장애인문제에 관한 것, 무계획적으로 개발되고 있는 사북의 카지노 사업 등을 찍고 싶어요.”

개인 작품을 시작하기 전에는 푸른영상에서 하는 작업을 도울 계획이다. 친구감독이 찍고 있는 <슬로브핫의 딸들>이란 제목의 작업이다. YMCA의 여성참정권 문제와 교단마다 입장이 다른 여성목사 안수문제 등 교회내의 가부장적인 문화와 여성의 입지를 다루는 작업이다. 어떻게 보면 류 감독의 다큐멘터리 <엄마>도 같은 시각이 아니었을까.
“노인들의 성과 사랑에 대해서 스스로 열려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정작 엄마가 사랑을 시작하자 당혹스러웠어요. 그러나 나 또한 한 아이의 엄마였고 그 자리에서 엄마를 바라보니 나는 엄마의 과거가, 엄마는 나의 미래가 되어 있었습니다. 세상이 정해놓은 어머니상, 할머니상을 전복하는 우리 엄마의 모습을 이제 딸로서가 아니라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옹호하고 지지해야 할 것 같았어요. 엄마인 내가 행복해야 딸도 행복하다고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한 아이의 엄마가 된 류 감독이 자신의 엄마를 통해 부모와 자식의 관계, 인간으로서의 사랑과 결혼을 영화로 만들면서 엄마를 한 여자로, 인간으로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는 이 작품을 통해 우선 기자부터도 매스컴을 통해 세뇌된 헌신적인 엄마상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영상운동가가 되고 싶었다는 류 감독에게서는 사람냄새가 났다. 이상의 실현 가능성과 현실의 한계를 아는 사람 특유의 여유가 있었다. 수다로 채운 다섯 시간이 이렇게 뿌듯할 수 있다니. 그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는 사람은 비단 기자만이 아닐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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