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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하루

1. 영화상영이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는데 객석에 대학선배들이 앉아있었다.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너무나 달라져있었기에 나는 오랜만에 만난 선배들이 너무 낯설어할까봐 말을 제대로 못했다. 말을 제대로 못했다기보다는....말은 많이 했는데 갈팡질팡하며, '너는 너무 많이 달라졌구나'라는 느낌 때문에 선배들이 쓸쓸해할까봐 말을 많이 골랐다. 내 속에는 내가 너무 많은데 그 많은 요소들이 균등한 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나는 소멸해가고 어떤 나는 생성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경우에 따라 특정한 나를 끄집어내는데, 그러니까 칸막이 치고 살아가는데, 서로 다른 칸에 있던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이게 되면 나는 분열된다. 교회 분들이 내 영화를 보고 싶다고 할 때, "나중에 좋은 상영관에서 틀게 되면 그 때 초대할께요"라고 뻥을 치고(그럴 일은 거의 없기에) 그리고 최근에 감독 특별전이라는 이름으로 십몇년만에 상영하는 영화도 있었지만 나는 약속한 분들을 부르지 않았다. 어떤 칸에서는 특정한 모습만 보이기를 바라니까. 내가 사람들과의 만남을 꺼리는 이유도, 아니다 특정한 사람들하고만 교류하는 이유도 감정노동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그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서울로 전학을 온 13살 부터인 듯. 문화충격도 컸지만 여러 이유로 나를 적대시하던 서울 여중생들 앞에서 나는 살아남기 위해 '중2 서울여학생'이라는 스테레오 타입을 만들어놓고 퍼포먼스하듯 살았던 것같다. 밤마다 나를 괴롭히는 두드러기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피부에 두껍게 한 막이 쳐지거나 입술 또는 눈이 퉁퉁 부었다. 약국에 가서 물어보면 '우리 몸 속엔 바이러스가 흩어져서 살고 있는데 저항력이 약해지면 그것들이 모여서 특정 부위를 공격한다"고 말해줬다. 나는 밤마다 흉칙한 내 얼굴을 보며 다음날 그 얼굴로 학교갈 일을 걱정했고 다행히도 퉁퉁 부었던 입술이나 눈은 수업이 시작하는 9시 쯤이 되면 가라앉았다. 버스를 타고 등교하는 동안 누가 그런 얼굴을 볼까봐 마스크를 하고 다녔고 늘 , 다행스럽게도 수업시간 전에는 얼굴이 가라앉곤 했다. 그 땐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극심한 자기분열로 마음이 못 견디니 몸이 반응했던 건 아닌가 싶다. 

 

2. 그래서 인생이 군데군데 끊겨있다. 그 시공간을 떠나면 다시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거다. 나는 일찍부터 혼자를 키우며 살아왔던 것같다. <아이들>에서 하은이가 친구를 사귀지 못해서 엄마를 필요로 하는 장면을 편집하면서 "하은이가 아직까지 나를 필요로 한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다"는 내레이션으로 얼버무렸지만 정작 진심은 "너는 나를 닮아서 네 안에 사람을 들이지 않는구나"와 같은 말을 사실은 하고 싶었던 것같다. 중2가 되었는데도 절친이 없는 걸 보면, 그리고 늘 웃는 모습으로 미끄러지듯 살아가는 그앨 보면 그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2013년의 집에 닥친 큰 일이 그 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려나. 더이상 집에 친구를 데려오지 않고 절친을 만들지 않는 그애를 보면.... 걱정된다. 그래도 그게 아주 나쁜 건 아니야. 엄마도 그 시간을 건너왔고 뭐 그럭저럭 잘 살고 있으니까.

 

3. 이별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본다. 체호프 <귀여운 여인>의 주인공처럼 자주 가는 공간과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 싹 물갈이가 되는 방식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관계가 끊겨있다. 최근에 두 개의 활동을 정리하면서 이제는 좀더 성숙한 이별을 할 때도 되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 흐르는 시간 안에서의 나의 태도는 가능하면 외면하는 것이다. 맘에 드는 정리방식은 아니었지만 맘에 드는 정리방식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나는 또 더많은 시간과 마음을 써야할 것이고 그렇게 시간과 마음을 많이 쓴다고 해서 바람직한 정리가 될 거라는 확신도 없었다. 어느 날, 누군가의 한마디 말에서 폭풍처럼 마음 속에서 고함이 터져나올 때, 더이상 버티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뒤도 안 보고 돌아왔다. 아마 분명히 나중에 이 시간을 후회할 것이다. 하지만 차악이다. 최악의 모습으로 헤어지지 않기 위해서 나는 차악을 선택한 거다. 차선이나 최선은 너무나 멀리 있었고 억울함이나 냉소, 더 싫었던 건 '내가 지금 내 일을 접어두고 이걸 하고 있는데....'와 같은 희생레토릭이 목 아래까지 차있는 것을 느끼며, 이러다가는 정말 최악의 모습으로 폭발하고 말 것같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그리고 결국 차악을 선택하며 냉정하게 돌아서게 된 거다. 돌아선 이후에 마음은 딱딱해졌기 때문에 별 자극이 없었는데 어느 날, 떠나온 곳의 촬영본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발견한 순간, 처음엔 멍했다가 두번째는 큰일났다는 생각에 허둥거렸다가 마지막으로는....진짜 이별이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촬영본이 사라진 것처럼 그 곳에서의 추억과 사람들에 대한 미련이 내 몸에서 스르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나중에 촬영본을 찾았지만 스르르 빠져나간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2015년 오늘의 작가상 수상집을 보다가 '그곳을 위한 일일주점'에 대한 어떤 수상작가의 말을 보았다. 1년을 기억하는 행사가 있는 날, 밭일을 하고, 테입 캡쳐를 받고, 저녁을 먹은 후 책을 보다가 문득 발견했다. 잠시 멈췄지만 곧 마음을 거두고 다음 문장을 읽었다. 나는 제법 이별에 유능하다.  

 

4. 지난 며칠 동안 옛날 장소들을 우연히 다시 만났다. 학교를 졸업하고 뭘 해야할지 몰라서 닥치는대로 강좌를 듣고 다니던 20대. 강의가 열시에 끝나고 가볍게 시작한 술자리가 길어지면 마지막은 늘 인사동 포장마차였다. 취해서 흐린 눈으로 앉아있으면 늘 장미꽃을 팔던 수화를 쓰는 남자가 있었다. 함께 술마시던 이들은 몇 번은 장미를 샀고 그런 만남이 반복되자 나중에는 장미를 사지 않았다. 상영회가 끝나고 메르스 때문에 텅빈 거리에서 흐린 눈으로 야외술집에 앉아 동료들과 마감이 턱에찬 작업얘기를 하거나 삐진 멘티를 달래다가 오래 전 그 거리에서 길을 찾느라 절박했던 그 마음을 떠올렸다. 그리고 오랜만에 가본 학교. 지나간 시절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고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술을 마셨다. 마지막 장소는 부천판타스틱영화제. 아이디카드로 첫회 영화부터 마지막 영화까지를 보고 나면 막차시간이 빠듯해 전철역까지 뛰어갔던 그 때. 깊은 슬픔 때문에 말을 잃어버린 <키친>의 주인공에 깊이 이입되어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을 찾아 읽고 영화를 구하러 다니던 시절. 장소는 기억을 상기시키고 사람을 불러낸다. 다행히 좋았던 사람들만 꿈 속에 나타나주어서 신에게 감사를.

 

4. 여러 날동안 잠을 못 잤더니, 아니 못 잤을 뿐인 것같은데 5kg가 줄었다(그렇더라도 앞자리는 불변. ㅠㅠ). 건강검진을 위해 병원을 찾았다가 체중이 감량된 걸 알고 이 참에 앞자리 숫자가 바뀌도록 다이어트나 운동을 해볼까 생각했다. 생각만 하는 중이다. 삶은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으니 그 얼굴 하나하나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명랑하게 가는 거다. 명랑한 발걸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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