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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23

나도 일기를 열심히 써야겠다. 이오덕선생님 일기를 읽는데 재밌다. 그 일기에 시대가 기입되어 있어서 의미도 있다. 

 

출근하는 첫날 지참했다. 출근부에 지참이란 도장이 찍혔다. 출근부는 카드로 되어 있고, 전근하면 어디든지 가져가게 되어 있는 것도 처음 알았다.(이오덕, 나는 땅이 될 것이다) : 지참이 무슨 말인지 몰라 찾아봄.--->지각은 사전에 정당한 이유있는 보고 통보 없이 늦게 참석(출근)하는 것, 지참은 정당한 이유를 사전에 보고 또는 통보하여 승(허)락을 얻어 늦게 참석(출근)하는 것이라 사료됨, 병치참은 병을 이유로 보고(통보)후 늦게 참석(출근)하는 근무 형태,  출근후 근무지 무단이탈과 조퇴, 반일연가의 차이도 이와 비슷함(사전 보고 통보후 승허락이 있었는가의 차이)

 

1967년 3월 9일 목요일

나를 도피라고 비난하거나 업신여기는 사람들에 대해 나는 며칠 동안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 나는 내가 취한 행동이 옳다고 단호한 결정을 내렸다.

:e북으로 책을 보다가 맘에 들거나 기억할만한 문장을 옮긴다. 내가 이 문장을 옮긴 건 5일 전인데  별 내용도 아닌 것같은 이 문장을 옮긴 이유는 이 문장으로부터 내가 위로받았기 때문이다. 굳건해보이는 이오덕선생님도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뒷담화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냥 나한테 위로가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에게도 이야기를 하지 않는 이유는 '그냥 흘려버려', '잊어' '신경쓰지 마'와 같은, 전혀  위로가 안되는 말들 때문이다. 애초에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따로 있는데, 그 사람은 사과 한 마디 없어 승승장구하며 인권영화감독인  것처럼 활개를 치고 다니는데 그로부터 마음이 상한 나는 대범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 그런 반응들이 싫어서 그냥 입을 다물고 잊혀지기를 바랄 뿐이었는데. 이오덕선생님의 이 글을 보면서 나는 혼자 하하 웃으며 선생님도 뒷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그 뒷말에 대해서 신경을 쓰셨군요, 라는 생각에 급 친밀감을 느꼈다.

금요일, 강연회에서 분노에 대해 들었다. 분노를 어떻게 관용의 퇴비로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강사선생님은 솔직하게 말씀하셨다. 그게 가능하지않습니다. 용서도 안되고 승화도 안됩니다. 분노가 내 몸을 상하게 해서 나는 죽게 되었습니다.  나는 내가 살아야해서 자연주의요법을 시작했고 이렇게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분노가 뭔가로 바뀌는 건 없는 것같습니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분노는 그냥 모른 척 하는 수밖에 없는 거다.  가끔 어떤 계기로 분노의 감정이 건드려질 때 다시금 화르륵 분노의 불길은 타오른다. 다른 일을 생각하고  다른 일로 내 일상을 채우면서 가치있게 살아가려고 노력할 뿐, 분노의 불씨는 사그러들지 않는다. 20년 전 일도 가끔 생각나면 가슴 속 불길이 화르륵 타오르는데 2년전 일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지. 

 

나의 감정, 나의 행동들에 대해서 지지해주는 사람들 틈에 있으면서 내 할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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