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오래된 거리

목요일은 방송과 면담과 회의를 하는 날.

학생 한 명과 전화면담을 한 덕에 시간이 남음.
다음 회의 장소에 미리 왔는데
너무 일찍 오고 말아서 길가 벤치에 앉아있다.
여섯 개의 벤치가 나란히 있고
할아버지 한 명 앉은 벤치, 그 옆에 빈 벤치, 그 옆에 3명의 할아버지가 앉은 벤치, 바로 옆에 빈 벤치, 내가 앉은 곳, 그리고 나의 오른쪽의 벤치에는 30대 남녀가 맹렬하게 싸우고 있다. 원래 벤치 이야기 쓰려고 시작한 게 아닌데
바로 옆 남녀가 너무 큰소리로 너무 맹렬하게 싸워서
이렇게 되어버렸네.
 
둘이 싸우다가 여자가 갔고 남자가 뒤따라갔는데
다시 한 바퀴 돌아서 
이제 왼쪽 벤치에서 싸우고있다.
방금 전까지 할아버지들은 커피를 나눠 마시면서
너무 많다, 너가 더 먹어라, 그렇게
사이좋은 옥신각신을 하다가
지금은 모든 음성을 줄인 채
가만히 앉아 싸우는 소리를 듣는다.
여자는 남자가 말만 꺼내면 소리 지르면서
듣기 싫다고 하고 그만 말하라고 하고
그러면서 소리소리 지르면서
나 길에서 이렇게 소리지르는 미친년 
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정신병원에 들어가서 쉴 거라고 한다.
그리고 일어나서 가버림.
 
암튼 처음에 이 벤치에 앉아서
따뜻한 봄햇살을 쬐면서 
이 거리가 20대엔 자주 오던 곳이었다라는 걸
적고 싶었는데.
남의 싸움 이야기를 이렇게 옮기고 있다니.
 
암튼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자.
팩스로 온 원고를 입력하거나
취재를 해서 작성한 글들을
여러 번 교정을 보고
한글 편집을 해서
파일이 담긴 디스크와 
인쇄된 최종원고와 사진을 넘긴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이 거리에 온다.
편집실의 지시에 따라 필름이 나와있고
나는 그 필름을 보며
사진은 자리를 잘 잡았는지
잉크가 뭉친 곳은 없는지 등등을 체크한다.
편집부장 선배가 오래 책임을 맡다가
그만 두기 몇 달 전부터 내게 그 일을 맡겼고
나는 정식으로 책임을 맡기 전에 잘렸다.
선배는 그만 두기 몇 달 전부터는 이 곳에 나 혼자 보냈다.
한글프로그램으로 편집을 할 때에는
밤을 자주 새웠고
필름을 점검하는 과정에서부터는
하루 이틀 느슨하게 보낼 수 있었다.
 
내가 벤치에 앉아서 주변을 살피다가
갑자기 20대의 어느 아침을 떠올린 이유는
어느 날, 필름점검을 마치고
그대로 편집실에 들어가기 싫어서
이 거리 어딘가에 있는 영화관에서
혼자 영화를 봤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아내가 떠난 후 사진과 기억들을 태우던 첫 장면
엘리자베스 슈가 집단폭행을 당한 후
상처입은 몸으로 
죽어가는 니콜라스 케이지를 위해
섹스를 해주던 장면.
감독은 남성들을 위한 위로를 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쓰라려서 내 몸이 같이 쓰라려서
몸서리가 쳐졌던 그 장면.
영화는 눈물 한 방울도 허락하지 않을 만큼
차갑고 건조했다.
조조영화라서 극장문을 나서는 순간
쏟아지는 햇빛이 너무 밝아 
눈이, 마음이 부시던 순간.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더 늙었던 것같아.
희망 하나 없이
말라갔던
바삭바삭 나의 20대.
그 때 그 거리가
낡은 채 여기 남겨져 있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